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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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빔밥을 좋아한다. 갖은 야채와 채소가 빨간 고추장 그리고 참기름이 더해져 나오는 매우면서도 고소한 맛 그리고 밥과 함께 잘 버무려진 야채와 채소의 질감은 언제나 나를 군침돌게 한다. , 그 맛은 여러 가지 재료가 부족하지 않으며 넘치지도 않고 잘 어울려졌을 때만 나올 수 있다. 문학이라는 장르도 그런 것 같다. 우리내의 삶을 담고 있기에 단순할 수 없으며 언제나 복잡하다. 인간의 감정, 그 속의 개인의 감정과 사람들 간의 감정, 사회적 문제, 종교적 의문점 등 너무나 많은 재료들이 문학이라는 음식 안에서 버무려지기 때문에 너무 짤 수도 너무 매울 수도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라는 작품은 이 모든 요소들이 얼마나 잘 한 작품에 녹아내려 맛있게 버무려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복잡한 작품이다. 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의 심리상태, 변화하는 감정들, 그리고 사회적 사건 등은 처음에 나를 너무 혼동에 빠뜨렸다. 하지만 글을 읽어나가면서 점차 그들의 감정이 그들의 생각이 이해되고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 작품이 평범한 우리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창해서 우리가 넘볼 수 없는 삶이나 존경심과 경외심을 갖고 우러러 봐야할 인물이 아닌 나의 이야기, 나의 친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잡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쉬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세상은 흑백TV과 아닌 컬러TV라고 생각해 왔다. 절대 이분법적으로 모 아니면 도라고 딱 잘라 결정내릴 수 없으며 옳고 그름의 경계가 모호할 때도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다. 근데 아니다. 소설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읽고 있는 동안에도 나도 모르게 나는 등장인물 중 누가 나쁜 사람인지 누가 악한 존재인지를 찾으려고 했고 그를 비난하려고 들었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악당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 내가 느낀 이 작품의 놀라운 점이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우리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며 잘못 할 수 있고 누군가를 비난할 수 있으며 비난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분법적인 사고로 너는 나쁜 놈,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후회하고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내가 꼭 어제의 나와 같을 수는 없다. 어제의 나의 실수와 잘못이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없다. 후회와 반성를 통해 안나의 남편인 카레닌처럼 변할 수도 있다. 그들을 판단하고 심판한다는 생각이 아닌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마음, 그들의 감정을 따라가면서 그들의 삶에 동화되어야 한다. 이 소설은 그 점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도 몰랐던 나의 나쁜 습관을 알게 해 주었다.

 

  여기에는 등장인물이 꽤 많이 나온다. 거기다. 러시아 작품이다보니 이름도 생소하고 역시나 기억하는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두 인물을 비교해 보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나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인물은 알렉세이 키릴로비치 브론스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콘스탄친 드미트리치 레빈. 두 인물은 삶을 보는 관점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당연히 사랑에 대한 그들의 생각도 많이 다르다. 브론스키는 외향적이고 사교적이며 항상 주위에 사람을 끌고 다니는 성격이다. 거기다 변화의 시대에 있던 당시 러시아에서 개방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반면 레빈은 내향적이며 자기만의 생각이 깊으며 밖으로 그것들을 풀어내는 게 쉽지 않은 인물이다. 남 앞에서 쉽게 얼굴을 붉히고 자책을 하며 보수적인 인물이다. 여기에 두 여인이 등장한다. 안나 카레니나, 카체리나(키티) 알렉산드로브나가 그들이다. 한 남자의 아내였던 안나는 과감히 남편과 별거를 하고 주위의 시기와 비난에도 브론스키와 동거한다. 그리고 브론스키와 레빈사이에서 고민하던 키티는 레빈과 결혼하게 된다. 여기에 남녀간의 감정의 충돌이 일어난다. 과연 사랑이란 무엇인가? 질투는 무엇이며, 증오와 시기심은 무엇인가? 이런 감정의 충돌과 감정의 변화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으킬 수 있는 당연한 것들이며 빛과 그림자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것들이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강렬하게 타오르면서 차츰 꺼져가는 사랑이었다. 격렬했던 만큼 그들은 서로를 원했고 서로를 사랑했다. 하지만 브론스키에게는 남자로서의 삶, 즉 사교생활을 청산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사랑이 그 인생의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브론스키는 그녀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버린 그 갈망......존중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녀가 그를 사랑의 올가미로 얽매려 애쓰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했다..... 만약 점점 더 강해져가는 이런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더라면, 모임이나 경주를 위해 도시로 가야 할 때마다 법석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욕망이 없었더라면 브론스키는 자신의 생활에 충분한 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3p.199”. 그의 사랑만을 원하고 항상 확인하고 싶어하는 안나, 밖으로 자신의 능력과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브론스키, 그 둘은 사랑하면서도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가 자유에 대한 권리를 표현할 때의 시선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언제나처럼 한 가지 결론, 즉 자신이 모욕을 받았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그에게는 자신이 원하면 언제, 어디든 떠날 권리가 있어. 떠날 뿐 아니라 나를 버리고 갈 권리지. 그는 모든 권리를 갖고 있지만 나에게 아무 권리도 없어..... 3p.243”

반면 키티와 레빈의 사랑은 조금씩 불타오르는 사랑이었다. 청혼을 거절당한 레빈의 수치심과 부끄러움도 결국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을 잠재울 수 없었으며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녀 또한 그녀의 사랑이 누구인 줄 알게 된다. 엇갈린 듯 한 그들의 사랑은 이렇게 맺어진다. 소심하고 쉽게 오해하고 고민하며 조심스러운 레빈 그리고 그것을 알고 이해하고 받아주는 키티 사이에서는 브론스키와 안나 사이에서와 같은 갈등과 충돌은 있을지언정 그들과 같은 불화와 불행한 결말은 없다. 그들의 사랑은 서로간의 희생과 이해로 더욱 견고해졌다.

 

  이 소설은 19세기 쓰여 졌지만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인간으로서 언제나 사랑에 취하고 사랑에 아파하며 시기하고 질투한다. 결국 레빈이 이야기한 것처럼 거창한 말로 세상을 분석하고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정의내릴려고 하지만 시대에 상관없이 언제나 그 답은 우리 주위에 있다. 우리 삶 속에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그 모든 일에 상관없이, 이제 나의 삶은, 나의 모든 삶은, 삶의 매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의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나에게는 그것을 삶의 매 순간 속에 불어넣을 힘이 있어. 3p.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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