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것들의 밤
정보라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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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라《이름 없는 것들의 밤》

정보라 연작소설 《이름 없는 것들의 밤》은 <밤이 오면 우리는>, <예언가>, <우리는 악마에게서 왔다>의 세편의 소설로 이루어져있다.

인류는 핵전쟁, 환경 파괴등 인간이 스스로 자초하고 있는 파국적인 선택들을 막기 위해 인간보다 합리적이고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기계와 로봇에게 중요한 판단을 맡기게 된다. 그런데 인간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기계중심의 시스템은 지구의 다른 생명체를 지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인간문명의 종말을 선택한다.

이야기의 흐름은 단지 기계와 인간의 싸움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 로못, 흡혈인, 인조인간처럼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놓인 존재들을 등장시켜 도대체 누가 인간인지,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밤이 오면 우리는>는 작품 전체의 이런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로봇을 단순한 악역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의 논리가 인간 자신의 폭력성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구조로 보여준다.
또한 생존하고 있는 인간들을 찾아내는데 또다른 인간을 내세운 발상이 왜 그렇게 참혹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너무나 '충분히 가능한' 생각이라 그랬을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는 처음 작품의 시작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과거의 모습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전쟁과 식민주의가 같이 어우러져 있다.

아이들은 전자기기를 통해 지배자의 언어를 배우고 모든 교육을 습득한다. 교사가 하는 일은 이들을 감시하고 전자기기의 구독료만 관리할 뿐이다. 일제시대에 SF가 얹어진 느낌의 부분이었다. 누군가의 언어를 빼앗고 지배자의 언어를 강요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기억과 정체성을 지우는 행위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더불어 작가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수단이어야 하는 교육이 권력과 자본에 종속되면 어떻게 사람을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지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이 되지만, 이 부분을 쓸 때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가자지구 폭격 등 현실의 전쟁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마지막 <우리는 악마에게서 왔다>는 더욱 극단의 세상을 보여준다. 더이상 인간의 존재는 인격적인 모습이 아니다. 여성의 신체는 공장과 다름없는 도구의 역할을 하고, 남아있는 인간마저 약물로 통제되는 세상이다.

인간이 야기시킨 전쟁과 착취구조 자체에서 이미 악마는 만들어진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제목은 <이름없는 것들의 밤>이다. 책 안쪽에 작가의 사인위에 써있듯이 작가가 쓰고 싶었다던 제목 '피칠갑'이 어울리는 장면들이 가득하기는 하다. 그런데 '이름 없는 것들의 밤'은 또다른 생각들을 하게 한다. 역사의 대부분은 승자의 입장에서 써지고 논해진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언제 어떻게 사라져도, 죽임을 당해도 알 수 없는 존재들이다. 겨우 살아있는 인간, 로봇, 흡혈인, 자신이 인간인줄 아는 인조인간 등 오히려 비주류에 가까운 인물들이 이야기를 끌어간다. 소설을 다 읽고 책표지를 다시 보았을 때, 책제목이 왜 이렇게 가슴아프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나서 생각이 많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문명을 만든 인간들이 오히려 비인간적으로 행동하고,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기에)‘인간이 아니다’라고 취급받는 존재들이 오히려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인간의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서로 구하려고 애쓰는 행동자체가 우리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될 것인지 끝없는 질문들을 쏟아내게 하는 책이다.

살아남아야 투쟁이라도 해 볼텐데, 마지막 흡혈인의 피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던 한 인물에게서 왜 내가 보이는 것일까.

p. 66
인간이 아니게 된 후로 나는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나는 빌리가 질문했던 인간의 조건을 생각했다.상황에 맞는 적절한 액체가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인간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눈물, 땀, 피, 혹은 진물이나 오물.

p. 163
살아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고, 살아 있으면 계속 일할 수 있었다.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다시 저항할 수 있었다. 살아서 존재하는 것이 곧 저항이었다.

p. 310~311(작가의 말 중에서)
세상은 '신'과 '악마', 무조건적인 선과 무조건적인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 인간은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한, 알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단 한 번만 세상에 존재하며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세상을 이해하고 단 한 번만 경험하는 모든 순간 속에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다치고, 병들고, 늙고, 죽는다. 모든 인간은 작고 연약하고, 무지하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힘의 논리를 강요하며 인간존재를 자기들의 이득에 맞춰 바꾸려는 집단이나 체제가 있었다. 1부와 2,3부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이런 폭력적인 집단, 비인간적인 체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연약하고 부드러워도 되는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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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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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 르베의 대표작 《자화상》이 10년 만에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 얼마나 기다려온 작품인지 모르겠다. 유작 《자살》의 원고를 넘기고 생을 마감한 작가. 나의 10대에 전혜린이 있었다면, 그 이후에는 에두아르 르베가 있다.

에두아르 르베의《자화상》은 끝없는 문장으로 작가 자신에 대해,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느 자서전이 이보다 더 나을 수 있을까 싶다. 짧은 한문장으로 모든 상태를 설명해서 변명의 여지도 미화도 없다. 적나라한 '자신'이 있을 뿐이다. 나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진자면 얼마나 많은 '괄호 열고, 괄호 닫고'가 있을지 상상이 안된다.

어느 페이지를 펴도 내모습 하나쯤은 적혀 있는 책,
그래서 차마 인덱스를 붙일 수 없는 책, 붙이지 못하는 책이다.

혹여나 전혀 내모습이 없더라도 무엇이 다른지 왜 다른지 생각하다보면 나를 좀 더 잘 알아가게 해주는 책이다. 문장들 사이사이에서 공감하는 나를 보며, '나 참, 까다로운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이미 고칠 수도 없고 고칠 마음도 없기에......


📌 출판사의 책소개 글귀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ㅡ ※ 《자화상》 ‘문장 자판기’
“나의 자화상을 만나면 멈추고 간직하세요.” ㅡ
완전 도장 쾅쾅 찍고 싶은!!! 이미 밑줄 긋고 내것인양 하고 싶다.

너무 많지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책속의 문장 몇 개만 나열해본다.

* 경쟁은 내게 아무런 동기가 되지 않는다.
* 나는 뒤척이거나 코를 골거나 무겁게 숨을 쉬거나 담요를 잡아당기는 사람 옆에서는 잠을 잘 수 없다.
* 나는 때로 못된 사람보다 상냥한 사람이 주위에 있을 때 더 불편하다.
* 내 지능은 일정치 않다.
* 고독은 내가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 나는 내 인생을 좀 더 수월하게 살아가게 해줄, 즐거움을 위한 예술을 공부할 수도 있었을 때 실수로 내게 아무 소용도 없는 어려운 과목들을 공부했다.
* 나는 내가 말한 것보다 사람들이 내게 말한 것을 더 잘 기억한다.
*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 나는 시간이 많을 때보다 별로 없을 때 더 많은 일을 한다.
* 나는 첫인상을 믿는다. 내 무의식은 의식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다.

이렇게 얼마 안되는 문장들을 옮기면서도 난 부연설명이 하고 싶어진다. 내가 왜 이 문장을 쓰는지. 남들의 시선따위는 관심도 없는 나인데, 나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너무너무 좋은 책이다. 강추강추!!!

(출판사에서 책을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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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새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이지수 옮김 / 디플롯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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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카미 히로미 연작소설《큰 새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14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일상생활로 보이는 대화로 시작되지만, 몇 장을 채 넘기기도 전에 인간의 정의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들은 실제로 공장에서 만들어졌고, 그들을 이루고 있는 것조차 인간의 줄기세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인간의 줄기세포는 약해서 변이되기 쉽고 아이를 만들기 쉽지 않다는 전제로, 다양한 동물들로부터 인간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죽음이후에나 그들의 잔존뼈를 통하여 그들이 어떤 동물로부터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인간은 '종으로서의 인간을 보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정의가 무엇인지,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소설 전체에 인간을 양육하는 존재로 '어머니'들이 있고, 관찰자의 역할을 하는 '새'가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라는 존재가 보호와 돌봄의 아이콘이라면, 보호라는 명목하에 통제와 지배의 역할까지 가능해진다. 또한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라는 존재를 자유의 상징이라고 본다면, 그들을 관찰자, 감시자의 위치에 놓아, 자유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설정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변화와 우연성이 없는 삶,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해 관리되는 삶이 진정 인간을 위한 것일까.

일종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임에도 남아있는 인간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인간의 모습만 하고 있을 뿐, 실질적인 면에서는 인간이라 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시선은 인간의 모순을 지적하며 되묻는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들에 오히려 사로잡히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다양한 시선으로 사고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책의 마무리로 다시 앞의 <유품>을 펼치게 하는 책. 독서모임하기에도 거듭읽기에도 좋은 책이다.


p. 328
나는 당신들이 좋습니다. 아니, 내가 좋아한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본심을 숨기거나 비꼬는 뜻은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의미로 나는 당신들을 좋아합니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써도 괜찮겠지요.
늘 정리되지 않은 혼란을 품고 있는 당신들을, 나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p. 350
나에게는 당신들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어떻게 해서든 생존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생존 지향성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애초에 나는 당신들이 만들었지요. 그래서 내 안에는 당신들에 대한 소속감이 명확하게 존재합니다.
당신들이 사라지면 내가 존재하는 의미도 사라진다.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인스타그램 앨리스(@alice_bookworm)님을 통하여,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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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가 XXX였던 건에 대하여
정해연 외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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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을 받고 들었던 생각은 나의 최애가 누구였었나, 추억을 떠올려보는 거였다. 아이돌이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 최애라는 단어도 없던 그때에, 우리에게는 책받침으로 만들어지고, 교과서 표지로 삼아 비닐커버로 감싸졌던 스타들이 있었다.

내게는 왬의 조지마이클, 아하의 모르텐 하르케, 본 조비의 존 본 조비,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스키드로우의 세바스찬 바하, 블러의 데이먼 알반...뭐 나열하자면 끝이 없는.
지금의 팬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팬덤이 형성되었지만, 마음만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책으로 들어가보면, 일단 책표지가 개인적으로는 좀 아쉽다. 선뜻 손이 안간다고 해야 하나. 만화책을 애정하긴 하지만 또 그와는 결이 다른 느낌이라. 그런데 다른분의 '표지때문에 책을 골랐다'는 멘트를 보고 그냥 취향차이인걸로...

책에는 네 명의 작가, 네 편의 소설이 있다.
정해연 <아이돌 그룹 러비쥬 살인 사건>
김아직 <엔딩 요정의 비밀>
정명섭 <PMC 아이돌>
박지선 <눈물을 마시는 요괴>

정해연 작가님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는 다 낯선 작가님들이다. 그런데 이번 소설을 통해 김아직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지긴 했다.

그림자 형사 역할을 하는 아이돌, 외계인에 의해 복제된 아이돌, 퇴마객(퇴마사)인 아이돌. 어느 누구의 인생인들 그렇지 않겠냐만은 카메라 뒤의 아이돌도 그들만의 삶이 있을 것이다. 정해연 작가님의 언급처럼 결국은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인간'의 관계에서, 결국 모든 것은 인간과 인간의 문제일 것이다.

📌 김아직 작가님의 작가의 말 중에서 (p.167~168)

인생에서 노력과 결과는 등가교환 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기나긴 연습생 생활을 거치고 데뷔를 했어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아이돌들이 있고 오랜 불면의 밤을 거쳐 원고를 쓰고 책을 출간해도 독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작가들이 있고, 노동과 절약으로 쉼없이 달려오고도 끝내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을 장만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최애가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노래를 듣고 투표를 하고 최애를 향한 악플과 싸운다. 팬덤이란 나의 삶은 르포여도 최애의 삶은 happily ever after 라는 고전동화의 엔딩이길 바라는 이들의 연대다.

p. 33
상처를 째 고름을 째내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렇게 하면 흉터가 남을 수 있다. 흉터가 남은 피부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가끔은 상처를 그냥 덮어두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p. 106
때로 투항선언은 승자의 뜻을 되묻는 것으로 대체되기도 하는 법이었다.

p. 108~109
항성과 행성처럼 누군가는 스스로 빛을 내고 누군가는 그 주변에서 항성의 빛을 반사하며 존재감을 증명해야 했다.

그놈의 증명, 증명, 증명!

p. 243~244
실체가 없어. 사람의 마음을 잠식하는 요괴라서 말이야. 그러니까 다른 요괴처럼 파훼법이 없다는 걸 의미해. 해치워도 존재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다시 되살아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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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기원 - 세계 질서와 부의 운명을 뒤바꾼 방향의 역사
제리 브로턴 지음, 박세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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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리 브로턴《지리의 기원》

본문 시작전의 글;

우리는...선택된 허구를 기반으로 살아간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흔히들 우리의 성격이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가 위치한 공간과 시간이 결정한다.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위치에 따라 모든 현실을 해석한다. 동쪽이나 서쪽으로 두 걸음만 옮겨도 전체 풍경은 달라진다.
- 로렌스 더럴 《알렉산드리아 사중주》(1957~1970)

인생길 한가운데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음을 깨달았으니,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 단태 <신곡> 지옥편 제1곡 1~3행


이 책은 우리가 당연시 여겨왔던 방위, 즉 동서남북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구는 구형이기 때문에 우주 공간에서 바라보면 본래 절대적인 위·아래, 왼쪽·오른쪽의 구분이 없다. 지구의 전체 모습을 담은 최초이자 유일한 사진인, "블루 마블" 만 보아도 방위가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동서남북을 마치 원래 정해져 있는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공간을 편의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낸 개념이 단지 방위만을 표시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동양와 서양을 표현할 때도, 남반구와 북반구를 보여줄 때에도, 때로는 이것이 열등과 우등의 범주로 묶이기도 하고, 발전의 상태를 가늠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이런 생각들이 방향을 선정하고 지도로 표시된 이후에는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책의 읽어봐야 하는 가장 큰 의미는 책의 마지막 문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구형의 지구에는 어떤 기준 방위도 필요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거기에 집착하는 걸까?"(p.272)

특히 '집착'이라는 단어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인간은 동서남북이라는 방위를 사용하는가의 질문을 넘어,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기준을 왜 마치 세계에 원래부터 존재했던 질서처럼 받아들이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구에는 본래 중심도 위아래도 없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중심과 방향을 만들고 그안에서, 그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이 만든 기준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의 삶에 녹아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다시 한번 인식하게 한다는 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p. 162
네 기본 방위와 관련된 모든 개념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지리적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다시 말해, 방위에 관한 용어들의 의미는 지리적 환경과 사용되는 언어에 달렸다.

p. 262
우리의 정체성은 어느 정도 기본 방위에 의해 형성된다. 개인의 위치와 정체성은 다른 지역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방위는 물리적으로 또 은유적으로 우리가 주변 환경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규정한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삶이라는 미로를 내려다보면서 지금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을 성찰하도록 한다. 그런데 오늘날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기본 방위에 대한 인식이 점차 흐려지고 있다.

(RHK 출판사로부터 책을 지원받아, @woojoos_story 우주님의 진행으로 우주클럽_역사방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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