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라이어마허 - 감동과 대화의 사상가 현대 신학자평전 4
최신한 지음 / 살림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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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는 현대신학의 아버지이다. 데카르트가 철학의 주제를 '의식'(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으로 바꾸었다면,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의 주제를 교리와 형이상학에서 직접적인 자기의식, 곧 감정으로 바꾸었다. '주체성의 신학'을 했다는 점에서 그는 현대신학의 창시자이며, 직접적으로 신과 매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프로테스탄트의 만인제사장설을 반영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자유주의, 위험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아서 보수적인 한국사회에 잘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는 당시 계몽주의의 이성과 의지, 도덕과 교리중심의 종교에서 기독교를 구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교의 본질은 감정이며, 그것은 직접적인 자기 의식이며, 최고의 직접적 자기의식은 경건이라고 하였다. 경건은 신의식과 죄와 은총의식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전도사 최신한의 이 책은 슐라이어마허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다. <종교론> <신앙론> <독백> <성탄축제> 등의 책에 나오는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을 소개하며, 그의 사상이 나온 당시의 계몽주의, 경건주의의 배경들을 다루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성과 의지, 도덕종교, 합리종교의 사회는 '무한'을 빠트렸으며, 기독교의 본질을 빠트렸다고 보고, 인간 안에 있는 종교의 불꽃을 다시  피우고자 했다. 종교는 신의식, 절대의존의 감정, 경건이라고 하였다. 감정에는 자유와 의존이 있다. 세계에 대하여는 자유이며(영향을 주고 받는다), 신에 대하여는 절대의존이다(영향을 줄 수 없고 받기만 한다). 감정에는 매개된 감정=성찰된 감정, 동물적 감정(자연적 감정)이 있다. 개인의 영혼은 경건이 자리하는 곳이다. 내면이 형성된 개인은 공동체를 이룬다. 


절대의존의 감정=경건, '감정' '주체성'을 다룬다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무조건적인 감정이며, 신의식의 감정이다.

주체성의 신학은 아래로부터의 귀납법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이는 교리학이나 신조, 요리문답과 같은 연역적 방법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교의학의 역사적인 시대정신을 반영해야지만 생동적이고 살아 있는 것이다. 교의학이 성서신학이나 조직신학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진리가 아니라, 교의학은 당시의 학문과 신앙의 물음들에 대한 응답이며,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교의학은 역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가 교의학를 교회사로 변질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슐라이어마허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그의 변론이 최신한의 책이 나타나 있다. (글쓴 후에 그것을 정리하자.)


단점. 사실 그의 기독교 신학은 기존의 삼위일체론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는 <신앙론> 끝을 삼위일체론으로 끝냈다. 그러면서 삼위일체론은 별개로 더 논의해야할 주제라고 말한다./ 그가 시도한 것은 '학문성'을 토대로 한 개신교 교의학이다. <신앙론>이다. <종교론>과 달리, <신앙론>은 경건, 즉 기독교인의 특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교의학은 단지 경건의 감정이 없는 그런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신앙론>의 핵심은 경건의 감정이다. / 문제는 복음의 초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부활 등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술은 없다. 물론 그의 설교에 나타나겠지. 오직 '주체성의 문제' 인간의 수용성, 감정의 구분, 죄와 은총의 감정의 대립, 동물적 감정과 인륜적 감정 등을 다루고 있다. 자유감정/절대의존의 감정(163) / <신앙론>의 목적, 경건의 본질 탐구, 기독교적 경건의 특징 밝힌다(162)/ 세계와의 관계를 넘어서(계몽주의) 우주를 직관하는 의식(신의식)을 말할 때는, 스피노자, 류영모, 야코비 등이 생각난다. *신앙은 경건의 감정에 토대를 두는 것이지, 교리체계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의 경건은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의 사건을 토대로한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차이가 난다.(165)/ 주관성 신학인 <신앙론>의 핵심은 기독론이다. 세계에 대한 자유감정이나 신에 대한 의존감정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의식에서 최고상태에 돌하며 완전한 주관성에 이른다.(170) / 신앙을 갖는 것은 구원의 의식을 갖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의식을 갖는 것과 같다.(170) 그리스도는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다.(171) 할 말이나 주제를 놓쳤는데, 그러면 책을 정리하자. # 비판 1: 이성과 도덕을 신앙에서 배제했다. 신앙을 내면성에 둘 때 이성과 신앙 간의 매개가 불가능하다.(172) 비판2: 반계몽적 초자연주은 그를 범신론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그를 지극히 자연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비판한다. 근거는 신앙을 위해 경건한 감정이나 직접적 자기 의식과 같은 인간적 가능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비판3: 종교적 각성주의와 신조주의에서는 그가 신앙과 비신앙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지 않는다는 비판을 한다. 창조와 심판교리, 메시야사상, 세계와 인간의 유한성 등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고 말한다. / 튀빙겐의 신학부 바우어는 <신앙론>은 역사성을 결여한다고 지적한다. 즉 기독교의 역사, 예수의 역사적 사건 등이다. 역사적인 것을 간과함으로써 주관주의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비판4: 제자격인 헤겔은 비판한다. <신앙론>에 대한 반발로 <종교철학강의>를 한다. 신앙을 '절대의존감정'으로 규정한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의존성'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유한한 종교이며, 기독교는 완전한 종교로서 이러한 유한성을 넘어서 있다고 주장한다. 로마종교는 공포와 의존성의 감정이 지배적이지만,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자유라고 설득력있게 반박한다. (의존성이 중요하다면, 개가 최고의 기독교인다. 왜? 개는 절대로 의존하니까.)175쪽


슐라이어마허는 역사성, 학문을 교의학의 중요한 요소로 다룬다. 철학과 신학, 신앙(계시)과 학문의 조화를 추구한다. 주관성에 무관하게 주어지는 도그마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의 내면성 가운데서 되살아나야 한다. # 비판의 두 입장: 1. 개신교 보수주의: 계시의 절대성을 상대화했다. 계시의 역사성이 결핍되었다는 비판 2. 철학의 계몽주의적 입장: 감정을 강조함으로 이성을 약화시켰다는 비판/ * 교의학의 기본 형식은 '인간 삶의 상태' 내지 '기독교인의 내적 경험'에 대한 기술이 되어야 한다.


<신앙론> 2판 1장 '교회의 개념'을 다룸. 4부분

  1. 기독교의 본질을 경건으로 간주
    1. 경건이 형성되는 교회 공동체를 설명
    2. 경건은 모든 교회 공동체의 토대로서 "지식도 행위도 아니며 감정과 접적 자기의식의 규정성이다."(CG2 3절) 경건은 절대의존의 감정 내지 신의식이다.(4절) 경건은 교회 공동체와 관계하는 인간 본성의 근본요소로 간주한다.(6절)
  2. 경건의 형태: 
    1. 경건한 공동체: 역사적으로 등장한 상이한 전개단계 7절
    2. 유일신론적 경건, 물신주의와 다신론 8절
    3. 자연적 인간상태와 인륜적인 인간상태/ 목적론적 경건(기독교)와 심미론적 경건.(9절) *윤리학의 문제
    4. 공동체적 경건: 역사적이며 내적인 , 10절
  3.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는 일신론적 신앙방식이며, 이 경건의 모든 것은 나사렛 예수를 통해 성취되 구원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통해 다른 경건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11절 역사 속에 구속자가 나타난 기독론적 매개의 사실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인다. 구원의 사건은 초자연적인 것도, 초이성적인 것도 아니다.(13절) 계시가 역사적이라는, 합리적인 요소가 있다는 Tony Kim박사의 입장과 통함. 기독교 신앙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예수 바깥에는 불가능하다. 14절)
  4. 교의학과 기독교적 경건의 관 계
    1. 교의적 명제의 교회적 가치와 학문적 가치의 관계성 17절
    2. "교리 신학은 일정한 시대의 기독교 교회 공동체에서 유효한 가르침의 연관에 관한 학문이다."(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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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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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성장은 자신의 한계상황을 뚫고 나가는데 있다. 한계를 뚫고 나가는 힘은 인간안에 있는 무한한 힘에 있다. 히말라야 영봉의 하나인 촐라체를 오르는 두 명의 등반가와 한 명의 캠프지기가 있다. 저들은 이 촐라체를 오르면서 자신의 한계를 밀고 나아간다. 


아버지가 다르지만 어머니가 같은 30대 박상민과 20대 하영교가 서로 '안자일렌' 자세로 로프를 감고 생명을 건 등반을 시작한다. 1박 2일이면 오르리라 생각했던 것에 차질이 생겼다. 경사도가 50도에서 70도까지 이르는 겨울의 설산이다. 눈보라가 치고 벽면은 빙벽이다. 예당초 계획보다 며칠이 더 걸린다. 놀랍게도 그 빙벽에서 잠을 잔다. 이것을 '비박'이라고 한다. 그 한계상황에서 잠을 자다니. 오싹오싹 소름이 돋는다. 완전 한계상황이다. 이건 잠자는 게 아니다. 잠을 자는지 환상을 보는지 모른다. 촐라체 영봉의 정적과 가끔씩 빙벽이 갈라져 수백미터, 수 킬로가 갈라지는 소리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져다주는 거룩한 신의 모습이다. 


아뿔싸, 버너를 영교가 놓쳐서 더 이상 물을 끊일 수가 없다. 이것은 영양공급원인 파워바나 파워젤, 심지어 물을 먹지않고 단식상태로 겨울에 에베레스트의 빙벽을 오르는 극한 상황이다. 이 상황이 내가 7일간 단식하던 상황과 교차하여 빨려들어가듯 책을 읽었다. 단식하며 에베레스트의 겨울 빙벽을 오르는 과정은 하나의 수행이다. 나의 모든 한계를 경험하며 또 그것을 뚫고 가는 수련이다. 아니 나 자신을 부인하고 초인적인 힘으로, 정신력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저들은 각자 자신의 과거의 삶과 화해하며, 삶을 되돌아본다. 에베레스트에 가면 눈물이 난다고 박범신은 말한다. 그는 13번이나 에베레스트를 다녀왔다. 물론 정상은 갈 수 없지만 말이다. 그곳을 걷노라면 삶에서 목숨걸었던 것들이 그렇게 목숨걸만한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미움, 증오, 탐욕 등이 정화되는 것이다. 저자는 두 가지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신자본주의의 탐욕의 길인가, 아니면 정적이 있고 정화가 있는 자신을 찾아가는 길인가. 마치 에리히 프롬의 명제인 <소유냐 존재냐> 삶의 방식을 선택하도록 독자에게 촉구한다. 


우리 나라에 너무 빠른 속도로 성장했기에 성장통이 있다. 이제 정신을 차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볼 일이다. 세 사람은 죽음을 뚫고 극적으로 생환했다. 그 결과 동상에 걸려 썩었던 손가락, 발가락을 잘라야 했다. 영교가 크레바스에 떨어져 발목이 부러지면서 등반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둘 사이에 연결된 로프를 끊는 것이 등반가의 '모럴'(암묵적인 규칙)이다. 그런데 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둘 다 죽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둘 다 극적으로 살았다. 


저들이 오른 촐라체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이제 삶으로 돌아온 저들은 두려울 것이 없게 되었다.

이전에 저지른 삶의 문제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극복해나가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은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죽음을 뚫고서 촐라체에 올라가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이 땅의 유한한 인생의 한계 너머의 불멸의 세계를 경험해보았는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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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부둥켜안은 기도 믿음의 글들 258
헬무트 틸리케 지음, 박규태 옮김 / 홍성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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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건 뭐지? 틸리케의 주기도문설교였다.

그 당시 독일의 상황에서 나온 주기도문 묵상이며 해설이며, 그 당시의 현대적 메시지이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신앙과 기도의 핵심이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왜 독일신학자나 목회자의 글은 당장 나에게 와 닿지 않는가?

막연하고 관념적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나 저자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이해가 짧다는 것이다.

 

분명, 몇 개월 후, 아니 몇 년 후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틸리케의 진정성,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깊은 열망을 발견하고 감탄하리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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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의 교육이론 교육학 번역 총서 5
로날드 J. 만하이머 지음, 이홍우 외 옮김 / 교육과학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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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영혼이 담긴 번역서라고 나는 맡하고 싶다. 역자 이홍우가 "임병덕 교수와 함께, 비록 한평생이 걸리더라도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로 결심한 것이 그 때였다"고 자기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아서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역자는 둘 다 서울대 교수이다. 임병덕교수는 SK전공자이다. 그런데 이홍우교수 역시 SK에 조예가 깊다. 역자해설을 이홍우가 썼다. 이홍우는 이 책을 처음 대학원생들과 접했을 때 2, 3주 만에 저주하고 좌절하면서 포기했다고 한다. 4, 5년 후 그의 태도는 180도로 바뀌어 다시 학생들과 공부하게 되었고, 임병우교수와 함께 이 책을 평생동안에 번역하기로 결단하였다고 한다. 그의 개인고백은 이 책에 혼이 담겼음을 알려준다.

 

만하이머의 한국어 서문에서 글속에 SK에 대한 간결하고도 심도있는 소개가 적혀 있다. 그리고 교육학과의 관계성도 간략히 적혀있다. 그는 유대인이기에 SK가 밝히는 기독교인이 될 의향은 없으나, SK 사상은 '인간 발달의 철학'이며 '인간 형성의 심층논리'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언어의 마술사'이다. SK앞에서 만하이머와 역자들은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내가 보기에 솔직하다. 자신의 한계를 절망하고 있음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SK의 의도를 잘 간파한다. SK의 의도는 자신의 사상을 직접전달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실존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만하이머가 체험한 고백을 나도 절실히 공감한다. SK에 관한 글을 쓰고, 말로 교육할 때에, SK가 내 등 뒤에서, 어깨 너머에서 비웃고 있음을 느낀다. 1. 그의 의도를 잘못 파악했거나. 2. 그의 의도대로 따라가지 않고 있거나, 3. 간접전달을 직접전달로 바꾸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언어로 표현하여서 가짜 신의식을 조장하는 것을 문제시한다. 가짜 신의식, 가짜 변화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직접 전달하거나 들은 사람들은 만족함에 빠지는 것을 보니 어찌 SK가 비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황필호의 말이 옳다. 우리는 SK앞에서 절망한다.

 

이홍우의 역자해설은 진솔하다. 그는 원저에 대한 해설과 만하이머의 해석, 그 두 가지를 해설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만하이머의 의도와는 달리, 이 책의 1부인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반복해서 읽을 것을 권한다. 소크라테스는 SK의 대학 논문 주제이며, SK는 끊임없이 소크라테스를 참조하였다. 아이러니. / 참 만하이머는 인생의 삼단계의 핵심 키워드를 잘 요약해주는 동시에 각 단계사이의 요소를 드러내주고 있다.

 

이홍우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1.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고자 한 SK의 간접전달을 일반교육학에도 적용가능한가? 2. 간접전달은 하나의 '방법'인가? 그래서 누구나 쓰면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그런 방법, 3.  키에르케고어의 천재성은 어디에 있는가? (언어의 마술적 능력)

 

내가 이홍우의 역자해설에게 얻은 통찰은

1. 사색일지. 저널과 다이어리의 차이이다. SK는 한 줄도 쓰지 않은 날이 없다. "Nulla dies sine linea." (No day without a line) 여기서 사색의 깊이나 표현의 정확성이 나왔다. 단순히 하루의 일지가 아니라, 사색이다. (저널, 덴마크판 20권, 영어판 7권) 여기는 그의 저서의 초고가 변경내용이 있다. 그의 이런 언어능력은 아아버지와의 '옥내산책'에 있다. 아버지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밖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래서 옥내 산책을 하면서 아버지가 언어로 밖의 세상을 표현해주는 것을 이 어린이는 들으면서 상상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탁월한 논리가였서 집에 오는 손님들의 생각을 180도로 반박하여 바꾸어 놓는 능력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2. 의족비유이다. 가짜 신, 여기서는 내 것으로 내면화하지 못한 신이다. 단순히 하나의 개념과 관념에 불과하여 나의 살과 피가 되지 못한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내 것이 되었다면, 내 다리와 내 팔을 떼어낼 수 없듯이, 그것은 내 삶이 되어야 한다. 그게 진짜 신앙이다.

 

3. 지식과 인격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직접전달의 한계를 자인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참된 교육은 여전히 인격과 함께 가는 것이라고 이홍우는 말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SK와 공감한다. 한편 SK의 사상의 목적이 참된 인간, 참된 기독교 신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유럽중심의 제국주의이며, 타문화와 종교사상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비판이라고 말하면서, SK의 핵심 자체를 따르려는데는 많은 거부감을 가지는 것이 일반세상의 현실임을 살짝 비추고 있다. 나는 이홍우의 글이 진솔하며, 자기 글이며, 글표현과 씨름하는 사람임을 알고 그의 글을 기쁘게 읽었다.

 

만하이머의 글쓰기 방식이 제목에 이어서 장과 절로 죽 이어간 것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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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파이돈 향연, 문예교양선서 30
플라톤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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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에 의해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 고소당했다. 이 책은 소크라테스가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면 변론하는 세 개의 연설로 이루어졌다. C.S. 루이스는 말한다. "고전은 어렵다"는 말은 오해다. 오히려 현대서적이나 해설서가 더 어렵다. 고전을 읽어라.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와는 달리, 말 잘하는 웅변가는 아니지만 차분히 자신을 담대하게 변호한다.

그는 알량한 지혜와 진리, 그리고 영혼의 진보를 가져도 못하면서도 많은 과외비를 받는 소피스트들을 비판한다.

 

무신론자라는 죄와 젊은이들을 현혹한다는 두 가지 죄로 고소당한 소크라테스는 세 친구의 고발이 사실이 아니라고 조목조목 반박한다. 자신은 지혜롭지 못하면서 지혜로운 체 하는자들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와서 신 앞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만일 나를 무죄선고해주고 날 풀어주면서 다시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판결한다면, 나는 여전히 내 삶을 계속 살 것이다. "나는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보다 신의 말을 따르겠다." "나는 여러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를 증진하는 삶을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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