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성장은 자신의 한계상황을 뚫고 나가는데 있다. 한계를 뚫고 나가는 힘은 인간안에 있는 무한한 힘에 있다. 히말라야 영봉의 하나인 촐라체를 오르는 두 명의 등반가와 한 명의 캠프지기가 있다. 저들은 이 촐라체를 오르면서 자신의 한계를 밀고 나아간다. 


아버지가 다르지만 어머니가 같은 30대 박상민과 20대 하영교가 서로 '안자일렌' 자세로 로프를 감고 생명을 건 등반을 시작한다. 1박 2일이면 오르리라 생각했던 것에 차질이 생겼다. 경사도가 50도에서 70도까지 이르는 겨울의 설산이다. 눈보라가 치고 벽면은 빙벽이다. 예당초 계획보다 며칠이 더 걸린다. 놀랍게도 그 빙벽에서 잠을 잔다. 이것을 '비박'이라고 한다. 그 한계상황에서 잠을 자다니. 오싹오싹 소름이 돋는다. 완전 한계상황이다. 이건 잠자는 게 아니다. 잠을 자는지 환상을 보는지 모른다. 촐라체 영봉의 정적과 가끔씩 빙벽이 갈라져 수백미터, 수 킬로가 갈라지는 소리는 두려움과 떨림을 가져다주는 거룩한 신의 모습이다. 


아뿔싸, 버너를 영교가 놓쳐서 더 이상 물을 끊일 수가 없다. 이것은 영양공급원인 파워바나 파워젤, 심지어 물을 먹지않고 단식상태로 겨울에 에베레스트의 빙벽을 오르는 극한 상황이다. 이 상황이 내가 7일간 단식하던 상황과 교차하여 빨려들어가듯 책을 읽었다. 단식하며 에베레스트의 겨울 빙벽을 오르는 과정은 하나의 수행이다. 나의 모든 한계를 경험하며 또 그것을 뚫고 가는 수련이다. 아니 나 자신을 부인하고 초인적인 힘으로, 정신력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저들은 각자 자신의 과거의 삶과 화해하며, 삶을 되돌아본다. 에베레스트에 가면 눈물이 난다고 박범신은 말한다. 그는 13번이나 에베레스트를 다녀왔다. 물론 정상은 갈 수 없지만 말이다. 그곳을 걷노라면 삶에서 목숨걸었던 것들이 그렇게 목숨걸만한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미움, 증오, 탐욕 등이 정화되는 것이다. 저자는 두 가지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신자본주의의 탐욕의 길인가, 아니면 정적이 있고 정화가 있는 자신을 찾아가는 길인가. 마치 에리히 프롬의 명제인 <소유냐 존재냐> 삶의 방식을 선택하도록 독자에게 촉구한다. 


우리 나라에 너무 빠른 속도로 성장했기에 성장통이 있다. 이제 정신을 차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볼 일이다. 세 사람은 죽음을 뚫고 극적으로 생환했다. 그 결과 동상에 걸려 썩었던 손가락, 발가락을 잘라야 했다. 영교가 크레바스에 떨어져 발목이 부러지면서 등반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둘 사이에 연결된 로프를 끊는 것이 등반가의 '모럴'(암묵적인 규칙)이다. 그런데 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둘 다 죽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둘 다 극적으로 살았다. 


저들이 오른 촐라체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이제 삶으로 돌아온 저들은 두려울 것이 없게 되었다.

이전에 저지른 삶의 문제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극복해나가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은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죽음을 뚫고서 촐라체에 올라가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이 땅의 유한한 인생의 한계 너머의 불멸의 세계를 경험해보았는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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