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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나라
손원평 지음 / 다즐링 / 2025년 8월
평점 :
#손원평 #젊음의나라 #다즐링출판사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글입니다.

이전의 단편 [아리아드네 정원] 속 뿌려 두었던 씨앗을 가져와서 조금 더 문제를 확장했다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전작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젊음의 나라에 빠져들어서 몰입할 수 있었으니까.
미래 세상에 대한 영화나 글 속 소재는 이제는 더이상 신선하지 않다. sf장르의 히트는 이티와 스타워즈 아바타로 이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내 피부에 와닿지 않고, 신비롭고 환상같은 판타지적 스토리와 cg에 국한된 감명이 주류를 이루는 감상평 때문일지도 모른다. 추천사에 예언서라고 하는 문구가 인상 깊다. 그런데 예언서라니 보다는 현실고증에 가깝다고 느꼈다.
젊음의 나라는 sf적요소를 현실에 깊숙이 끌어들임으로써
현 시대를 사는 유나라. 엘리야. 김재희, 고수현이라는 mz세대와 그들의 부모세대가 동시에 겪는 갈등과 혐오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그전과는 다른 신선한 불편함을 느꼈던 것 같다. 현실이 소설같고, 영화같고, 소설이나 영화가 현실같은 지금이라 그런 것 같다.
내가 대학입학하던 2004년에 요양보호사업이 공단에서 시행되면서 사회복지전공자들을 대상으로 요양보호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었다. 그 와중에 교수님과 공단관계자들은 4년제 학생인 우리에게 요양보호사보다 간호조무사를 따라고 권유하기도 했었다. 요양보호사보다는 간호조무사가 사회복지사로의 직업적 권위격상에 도움이되고 처우도 다르다는 이유였다. 교묘하게 나누는 등급이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시카모어 섬 과 유카시엘 재단>
시카모어 섬은 카밀리아 레드너 라는 이가 쓰레기섬을 지상낙원으로 변화시켰고, 철저히 아주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한 노인들만 입도가능했다. 청년들은 그런 노인을 보살피고 돕는자로서 일할 수 있었지만 이마저도 까다로운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하다. 주인공은 이 시카모어에 입도해서 사는게 꿈이다.
"거짓 없이, 가식을 걷어내고 오로지 진짜 모습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곳.
시카모어가 가상의 천국이 아닌, 실재하는 낙원임을 주지시키기 위해 정한 방침이라고 한다."
젊음의 나라 선샤인 마운틴 내용 중
실재하는 낙원임을 주재시키려는 자본적 투입이 과하게 느껴지는 것은 마치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아드- 의 '시뮬라크르' 라는 개념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진짜와 가짜가 혼동되는 지금의 세상에게 무엇이 진짜인지는 자본의 투입으로 인한 무한한 노출과 그 노출에 판단력을 소멸하면서 자리잡는 하나의 세상일 것이다. 시카모어 섬도 그런 곳일거라 여겨졌다.
유카시엘 재단이 운영하는 시설인
유닛 A.B.C.D.F 쉽게 말하면 실버타운의 등급이다. 누리는 비용의 차이가 크고, 입소하는 사람도 균질적으로 비슷하다. 균질적이라는 단어가 불쾌하고 무례했다. 현대판 계급제 같은데 노인에 한정된 것이라는게 어찌보면 다행인가 싶은 생각까지 든다. 아름다운 단어들의 향연은 꼭 책에서 확인하길 바라는 마음에 쓰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유나라는 시카모어 섬의 입도가 꿈이고, 그 과정에 유카시엘 재단에서 일을 하는 것은 상당히 도움이 되는 일이기에, 꿈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호텔에서 청소하며 당하던 부당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고용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더 나은 무엇인가를 향한다는 설렘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노인인구증가로 인한 각 분야별 정책,
법, 제도, 복지 문제.
청년일자리. 청년인구수의 급감.
임금인상과 세금관련 문제.
빈익빈부익부의 심화로 인한 양극화.
AI 기술 활성화에 의한 인권문제.
노후준비의 불확실성. 도시격차.
세대간갈등. 다문화가정. 난민구제.
자발적 미혼모.선택적 존엄사.
등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제도나 산업으로 포장되어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계속해서 삶 속에 녹아있다. 녹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모든 것이 청년들에게 짐 지워진 채 사는 현실이 되어있다.
유나라 라는 주인공의 29세의 어느 날에서 서른을 맞는 새해, 그 일년동안의 일을 일기형식으로 독백하듯 적었다.
그래서인지 유나라의 삶이 흐르는 과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이름이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더 몰입이 쉬웠다.
책 속 유나라가 된듯 유카시엘의 각 유닛에 근무하는 경험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조금, 가끔은 함께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어딘가에 있을 그들의 삶은 나의 미래를 꿈에서 보여주는 듯 환상 같기도 하고 현실같기도 해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읽는 내내 미래가 아니라 현실인데!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각적, 청각적 요소가 구체화 되었을 뿐.
뉴스나 미디어에서 보던 것과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아마도 유나라 라는 인물에 몰입한 탓인것 같다.
"오늘따라 내 위로 뜨는
연보라빛 이파리가 부끄러웠다.
내가 섬에 속해있지 않다는,
이방인의 증명을 지우고 싶다."
젊음의 나라 선샤인 마운틴 중에서
유나라는 시카모어 섬 VR에 여유가 있을 때마다 접속한다.
실제 섬에 접속하기 때문에 현지인(입도인포함), 주민이 아니면 연보라빛 이파리가 뜬다.
현지인은 애머럴드 빛 이파리가 뜬다. 한국인이지만 자발적 미혼모 제도로 태어난,
진짜 나의 세상에서도 이방인인 자신이 시카모어 섬에 서도 이방인이라는 것에 대한 외로움이 안쓰러웠다.
그럼에도 자신의 작은 도움이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순간에는 어제보다 부자가 된 기분이라고도 한다. 서른을 지나는 모든 지금의 청년들이 겪는 혼란이 조금 특별한 상태로 묘사되긴 했지만, 넋두리 하자면 40대를 지나는 나도 나라야 너와 같은 고민에 종종 젖는다면 위로가 되겠니? ... ...
<엘리야의 혐오와 가식>
나라의 룸메이트 엘리야는 외국인인다. 급격한 고령화로 인해 정부정책에 의해 이민자들을 대거 수용하면서 한국에 정학한 엘리야의 부모. 뱃속에 엘리야가 있을 때 한국에 와서 갖은 수모를 견디며 살아온 청년이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한국인이지만 '진짜 한국인' 이라는 단어를 쓰며 자신이 받아 온 차별을 이야기 한다. 유나라의 입장에서 엘리야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약자' 이고 그 권력의 힘을 모르는 엘리야가 미깔스럽다. 아래의 엘리야의 말에서도 느껴진다. 알고 싶어하지 않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해 자신의 고통은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악을 쓰는 모습에서...
"- 난 기회를 얻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나빠?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다들 마찬가지라고! 정의로운 척하는 감상 따위 집어치워. 네가 지금 하는 말은, 부러워서 미치겠는데 쿨한 척하는 사람의 신 포도에 지나지 않아. 넌 그냥 게임에서 진 거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젊음의 나라 프리 하우스 중에서
차별이라는 것이 당하는 각자는 정도가 다 다른것 같은데, 늘 자신이 당하는 차별이 가장 힘들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이럴 때는 사람이 더불어 사는 존재라기 보다 이기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지배한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당하는 차별과 외국인이라서 당하는 차별의 경중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 어떤 차별도 당연한 것은 아닐진데, 내가 더 불행했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하등 누구에게도 좋을리가 없는데 말이다. 이런 감정은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닥친 현실이었기에 그렇게 뜨거워지는 거다. 3자로의 관망하는 거리에서 이 사실을 본다면 둘 다 이해되는 경험을 하게 되니까.
이해와 공감은 엄연히 다르지만, 이해하지 못하면 공감은 언감생심이기에, 가끔은 이런 불편한 관계도 삶의 과정인가 싶다.
엘리야는 결국 유나라 보다 먼저 시카모어 섬에 입도한다. 그토록 혐오하는 노인들을 섬기고자 한다는 가식적인 면접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생존에는 가면이 필요하다. 엘리야는 기회를 얻고 싶다고 했지만, 그 기회는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간절했을 것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지 않는가.
엄마의 말이 맞았다.
"미움은 미움을 낳고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누군가의 몰락을 바라며 느끼는 쾌감을 옳지 않다. 설사 시대의 흐름이 그렇더라도,
내 주변의 모두가 그게 자여스러운 거라고 말하더라도, 나는 그러한 쾌감을 즐기는
무리에 속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오늘의 일기는 그 다짐을 기억하기 위한 기록이다."
젊음의 나라 아리아드네 정원 중에서
결국 노인이라는 어떤 시기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의 몰락은 곧 있을 나의 엄마의 몰락이기도 했고, 더 하면 나의 몰락이기도 하다. 그 몰락을 지금을 당기는 어리석은 혐오의 쾌락은 옳지 않음을 나라가 깨달았음도, 그것이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음도 잊지 않아야 한다. 가끔 어른들의 몰상식한 말들에 상처를 받거나 혀를 찰 때가 있다. 화가 나서 받아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사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던 그들의 삶을 알고 이해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집단의 폐해가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그 개인의 본질은 나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젊음을 가진 이가 젊음을 잃은 이들의 젊은 시절을 잠시 돌아봐 주는 지혜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민아 이모와 엄마>
소설 속에 민아 이모는 나라의 유년시절 엄마보다 더한 애정을 주고 받는 옆집 이모다. 엄마와도 영혼의 단짝같던 이모였는데 갑작스런 아빠의 등장으로 민아이모는 사라졌고, 나라는 가족을 잃은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모와 엄마, 나라가 진짜 가족이라 여겼던 때에 아빠의 등장은 진짜 가족의 개념을 바꾸었고, 나라의 행복도 빼앗아 갔다. 아빠와의 어색함과 낯설음 , 민아 이모와의 친밀함과 고마움 사이에서 쭈뼛거리며 민아 이모를 밀어내는 엄마에 대한 미움이 싹튼 것도 아빠 때문이었다. 유사 가족이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음을 .
가족은 혈육으로 맺어진다는 기본적인 개념을 무너뜨리는 민아이모의 존재는 공동체 의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작금에 가장 현실적인 가족의 개념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나의 기본 모델이 있고 그것을 벗어나거나 다른 형태가 되면 비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는 시선은 예나 지금이나 있다.
그러나 시대는 변화하고 있고, 가족의 본질적 기능, 역할이 유지되는 거라면 그 기본적 개념도 넓어져야 하는 융통성이 발휘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입양이나 동성애 부부라든지 그들의 출산이나 입양에는 선뜻 지지가 되지 않는 나의 생각에 혼란이 오기도 했다.
개인은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고, 사회는 어디까지 용인하고 보호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현대문학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고민과 질문을 하는 게 너무나 오랜만의 일이라 이런 내가 너무 진지해서 거북스럽기까지 했다. 이런 고민을 이토록 쉬이 깊어지게 하는 작가님의 필력에서 또 한 번 글의 힘을 깨달았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헤어졌던 이모를 만나고는 나라가 찾던 정답에 가까워지는 행보를 하게 되는 것을 느꼈다. 엄마와의 갈등도 민아 이모의 한 마디에 용기를 내고, 그렇게 자신의 인생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그 시간을 함께 했던 존재는 온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유년시절의 가정 환경이 성인이 되어서도 커다란 지분을 차지 하는 건가 보다 싶었다.
(중략)
나라야, 그걸 알아야 해.
네가 나에 대해 좋은 기억만 가지는 이유는, 난 네게
상처를 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란다. 유진인
참 용감한 아이였어. 제대로 된 엄마라면 다 그렇듯이.
젊음의 나라 프리 하우스 중에서
제대로 된 엄마는 상처도 사랑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
민아 이모를 통해 내가 모르던 엄마의 속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 이것이 진정한 가족이 아닐까. 엄마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나의 꿈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하는 민아 이모다.
그리고 노인 세대 또한 젊은 세대를 품을 기회가 없었던 세대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어찌 되었 건 그들이 걸어 온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누리는 것이 있는것도 사실이다. 어떤 세대이든, 시대이든 역지사지는 필수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미래는 언제나 상상을 비껴가니까."
젊음의 나라 프리 하우스 중에서
민아 이모의 꿈과 엄마의 꿈이 맞닿아 있음을 깨달은 나라.
두 사람 모두 죽음 이라는 꿈을 갖고 있다. ' 평안하고 인격적인 죽음' 은 선택사라는 말로 묘사 되는 것 같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느꼈다. 막대한 돈과 권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선택사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곳에서 내게 주어진 순간을 만끽하며 다소 운명론적일지라도 살아내겠다고 한 그 때까지 살 권리] 그것이 선택사의 뜻 이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삶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민아 이모의 어떻게든 되겠지는 희망적이었다. 시키모어 섬과 유카시엘에 갇힌 삶과 죽음이 아닌,
오롯이 나의 바람대로 가능한 선택이니까.
<셋만의 피크닉 동산>
함께 지내던 아파트의 옥상에서 내 꿈을 자라게 한 장면 안에 늘 이모와 엄마가 함께 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셋은 다시 서로를 의지한다. 그 중에서 엄마와 민아 이모는 서로의 삶을 통째로 의지하는 혈육보다, 결혼이라는 제도보다 끈끈한 가족이다.
- 살아낼 수 있는 데까진 살아낼 거야. 물론 끝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다시 무너지고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될지 모르지.
그러면 또 다시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어두운 희망을
꿈꿀지도 몰라. 그런데 나라야.
그전까지 내겐 시간이 있어. 그러니까 너도 네 마음이 이끄는 걸 끊임없이 찾고 좇으렴.
... ...
너는 너의 삶을 살아야 해. 두려워하지 말고 부딪혀야지.
젊음의 나라 12월 중에서
민아 이모는 나라와 엄마 모두에게 희망이었던 것 같다. 팍팍한 세상에서 정답은 거기가 아니라 너에게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혼란이 가득한 세상에서 잠시 마법의 힘을 불러 오는 알리콘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이모와 엄마가 모두 결국 죽음에 가까워지는 노인이라는 현실은 과연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소설 속 증오와 혐오는 모두 노인에게 향하는 몫이었다. 노인은 청년들의 현재와 미래를 모두 목조르는 존재들로만 그려졌다. 그렇지만 민아 이모와 엄마를 통해 본 삶은 결코 시카모어 섬과 다르지 않았다. 함께 하는 것 만으로도 지상 낙원이었다.
주인공의 1월은 허탈과 설렘
2월은 억울함과 혐오
3월은 가족에 대한 고찰
4월은 현실 자각
5월은 미움과 증오에 대한 깨달음
6월.7월은 두려움과 재회
그리고 12월은 젊음의 나라 라고 정리하고 싶다.
출처 입력
민아 이모가 나라에게 했던 말이 마지막에 나라의 말로 채워져서 좋았다.

나의 새로운 무늬를 채우겠다는 말이 좋았다. 젊음을 가진 유나라니까.
젊디 젊으니까. 나도 용기가 생겼다.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한 열망과 도전.
책 속 나라가 열망하던 시카모어 섬 같은 나의 시카모어 섬.
어린 시절 부르던 '파란 나라' 라는 동요가 떠오른다.
노래 말미에 우리 손으로 만들자 하고 우리가 함께 하자 한다.
그리고 "우리 손으로 지어요. 어린이 손에 주세요. 손" 하고 끝난다. 이제 젊음의 나라에게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결론,
불편하지만 설레고, 불안하지만 따숩다.
너는 너의 삶을 살아야 한다. 라는 민아 이모들이 세상에 여전히 있음을, 젊음의 나라로 살 기회가 내게도 아직 있음을
기쁨으로 여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