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동양신화 중국편 - 신화학자 정재서 교수가 들려주는
정재서 지음 / 김영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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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물건들이 정말 많다. 가장 원초적으로는 먹을 것, 입을 것, 지낼 곳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으로 여러 가지 바라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러한 욕구들 중에는 아마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또 듣고 싶어하는 욕구도 있나보다. 흔히 주변 어른들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 등장하는 단골 장면이 바로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옛날 이야기를 말씀해주시는 장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세상에 넘쳐나는 게 이야기이다. 인터넷 상의 각종 게시판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이제 열풍이라고 하기엔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트위터, 페이스북 등 최신 SNS도 결국 이야기가 오고가는 장으로 자리잡아가는 모양새다. (정보의 바다라는 별명처럼, 인터넷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여전히 정보전달이긴 하지만.)  

아마 사정은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이 살던 시절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옛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전해지다 보면 소문이 되고, 민담이 되고, 설화가 되고,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옛날에도 전 세계 곳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테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도 정말 많았을텐데, 우리 주변에는 왜 이다지도 서양 신화들만 살아있는 것처럼 보일까? 서양 신화라기보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이런 현상에 관해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이 독후감에서 다룰 내용은 아니니 넘어가자.  

이 책. 『이야기 동양신화 중국편』은 바로 이러한 우리 상황에서 출판된 보물같은 책이다. 맨 뒤 '이야기를 마치며'에서 밝히듯이, 글쓴이는 서양의 신화와 마법담만 넘쳐나고 동양의 상상력은 적막하기 그지없는 우리 현실에서 상상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이 책을 썼다.  

그런 마음을 먹고 쓴 책이라그런지, 동양신화의 다양한 모습들이 다양한 삽화와 함께 흥미진진하게 소개되어있다. 혼돈의 시기를 거쳐 거인 반고가 쓰러져 이 세상이 이루어지는 시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인간과 만물을 만들어낸 여와 등 여신들의 이야기와 온 세상의 통치자 황제 등 남신의 이야기를 거쳐 세상만사 온갖 사물들을 관장하는 신들의 이야기, 그리고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까지를 소개해준다. 거기에 더해, 옛 사람들의 상상력의 무한함을 느낄 수 있는 이방인들에 대한 기록, 신기하고 별난 사물들, 하늘 위 낙원과 땅 밑 지하세계까지 이 책에서 모두 만날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 한 단락도 빠지지 않고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니, 동양의 옛 사람들이 생각했던 세계를 한 바퀴 쭉 관람하고 온 느낌이 들었다. 때때로는 기존에 알고 있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내용들과 놀랍도록 흡사한 내용들에 놀라움을 느끼기도 했고, 그쪽 신화가 보여주지 못하는 자연친화적이며 순수한 마음씨를 만날 때마다 즐거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다니, 또 역시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무슨 책을 읽든 이렇게 무거운 주제로 연결시키니 이것도 병이다. (본문에 나오는 굴굴이라는 동물이라도 기를 수 있다면 좋겠다. 너구리같이 생기고 흰 꼬리에 말갈기가 있다는데, 기르면 어느 순간에 근심이 없어진다고 하니까^^.........)  

사실 작년에 사기를 읽을 때 든 생각인데, 은 주왕과 주 무왕의 왕권교체기를 다룬 부분을 읽을 때, 만화 봉신연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중학생일 때 그 만화를 봤으니 적어도 8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은주역성혁명 시기를 접할 때면 그 만화를 떠올린다. 만화 속 캐릭터들의 모습이 이런 신화 책 속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떠오르는데, 이럴 때마다 일본 문화산업의 강력함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심지어 작년에는 「중국 고전을 원작으로 각색한 아니메(Anime)의 개작 메카니즘 연구」라는 석사논문까지 나왔다.(바로가기

우리나라에서도 문화 산업의 육성과 경쟁력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조성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사실 과거 몇몇 드라마의 수출과 현재 아이돌 가수들의 해외진출을 빼면 이렇다할 '내용과 이야기'를 갖춘 문화는 없어보인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좋은 출발점으로 바로 이 책을 선택하는 것은 어떨까? 동양의 전설과 이야기는 우리가 얼핏 생각하는 것처럼 구닥다리도 아니며, 서양 신화보다 격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훨씬 광대한 영역을 아우르는 거대한 몸짐의 이야기 보따리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국적인 것이 꼭 세계적인 것은 아니며, 동양적인 것도 물론 꼭 세계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문화와 이야기가 여러 방면에서 중시되고 있는 요즘 세상에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와 동떨어져 있는 서양 이야기에서만 해법을 찾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잘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바로 우리 곁에 살아숨쉬고 있는 동양 신화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나보자. 출발점은 물론 이 책으로 삼으면 좋을 것이다.

* 작은 오류 지적 하나만 덧붙이겠다. 427쪽에서 틱장애가 '눈을 자주 깜빡거리는 증세'라고 설명되어있는데, 잘못된 섦여이다. 틱장애는 눈 깜빡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체부위에서 나타나며, 특정한 말이나 소리를 반복적으로 내뱉는 음성 틱장애도 있다.(더 자세한 설명은 네이버에서)

읽은 기간 : 2011 01 03 ~ 2011 01 08

정리 날짜 : 2011 0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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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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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년, 각 분야별로 베스트셀러는 나오게 마련이다. 2010년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를 꼽는다면, 5월 출판 이후부터 계속해서 화제가 되었던 책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 책 『정의란 무엇인가』. 2010년 대한민국에서 사회과학서적이 종합 1위를 하는 현상을 보여준 '신기한' 책이다. 사람들은 왜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했을까? 그리고 어떤 정의를 바라는 것일까? 

전체 10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정의에 관한 세 가지 입장을 소개하고 각각의 정의론들이 서로 싸우도록 유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행복'이 정의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첫 번째 입장은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이 대표하는 공리주의 진영이다. 두 번째로 개개인의 '자유'가 정의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영은 칸트와 롤스가 대표하는 자유주의 진영이다. 마지막으로 '도덕'을 기반으로 사회적 정의를 찾아나가야 한다는 세 번째 진영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이끈다.   

저자가 생각하는 답은 정해져있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보자.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핵심적인 두 문장으로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리고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행복, 즉 공리의 질적 차등성을 무시한 벤담의 무차별적이며 계량에만 의존하는 공리주의와, 행복(공리)들 사이의 질적 차등성을 인정하며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밀의 공리주의.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밀은 공리주의를 끝까지 지켜내려고 했다. 그러나 밀이 공리주의의 천박함을 옹호하기 위해 꺼내든 카드였던 '질적 차등성의 인정'은, 되려 공리주의의 기반을 흔드는 꼴이 되어버렸다. 지나가는 사람 100 명을 세워놓고, 'MBC 음악중심' 방청권과 예술의전당에서 현재 공연중인 '강남심포니 2011 신년음악회' 입장권 중 무엇이 갖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은 음악중심 방청권을 받겠다고 할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욕구는 더이상 무엇이 고상하고 무엇이 저급인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못 된다. 그 기준은 우리의 바람이나 욕구와는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이나 이상적 판단으로 옮겨간다. 밀은 어떻게든 공리주의의 천박함이라는 혐의를 벗기려 애썼지만, 되려 공리와는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이나 개성이라는 도덕적 이상을 강조한 꼴이 되어버렸다. 

다음으로 칸트와 롤스의 자유주의적 입장은 어떨까. 얼핏 생각해보면 칸트의 철학과 롤스의 정의론을 한 데 모아서 서술하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동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공통점은 있다. 바로 도덕적 행위자를 특정한 목적이나 애착에 구속되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칸트의 도덕법을 따르거나 롤스의 정의의 원칙을 선택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하고 지금의 우리를 만든 역할이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느 누구의 강요도 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내리는 도덕적 정언 명령을 따르라는 칸트의 윤리학은, '강요 없는 완벽한 자율'이라는 점에서 자유주의에 맞닿는다. 또한 사회적 체제의 원리와 특성은 물론 신체적 특징이나 성격 등 자기 자신의 상태까지 아무 것도 모른다고 가정하는 무지의 장막 실험을 기반으로 하는 롤스의 정의론은, '지금', 그리고 '여기'의 정의를 말하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고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현대의 매킨타이어와 동행한다. 정부가 특정한 가치에 대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진영에 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의무 중 하나인 교육을 '시민교육'의 차원으로 설명하는 주장을 펼친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삶에 개입해 올바른 것에 대해 논의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기에서 매킨타이어의 '서사적 인간' 개념이 등장한다. 

   
 
(311쪽)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312쪽) 자아를 서사적으로 보는 관점과 명확히 대조되는 입장이다. 내 삶의 이야기는 언제나 내 정체성이 형성된 공동체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를 안고 태어나는데,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변형하려는 시도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것들을 만나며 성장한다. 가장 원초적으로 우리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당연히 부모의 경제적 배경도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태어난 지역을 선택할 수도 없다. 따라서 경제와 복지, 주변 시설을 선택할 수 없다. 이렇듯 수많은 것들을 안고 태어나는 우리가, 정의관을 구축할 때 과연 전적으로 순수하게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공동체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공동체의 자산과 부채를 동시에 받고 태어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부정한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꼴이 되어버릴 뿐이다. 

마지막에 다다르면, 저자는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고 명확하게 밝힌다.   

   
 
(361쪽) 나는 세 번째 방식을 좋아한다. (...)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만들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으레 생기기 마련인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다수의 행복을 중시하는 공리주의는 정의와 권리를 원칙이 아닌 계산의 문제로 만들어버리고 인간 행위의 다양한 가치를 무시한다. 자유에 기초한 이론들은 공리주의의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만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개인들의 취향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그것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정의론은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적 가치, 삶의 의미와 중요성, 삶에 대한 신념 등을 포함하지 못한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무릇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 같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사회여야 할 것이다.

 

글을 처음 쓰면서는 간단한 감상문을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전체적인 내용 요약이 되어버렸다. 내가 글을 쓰지 않더라도, 이 책은 이미 베스트셀러라는 명성을 획득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읽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더 많은 사람들을 정의에 관한 토론 현장으로 안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자기 본위에 기반하는 개인주의도 확보하지 못한 우리 사회는 자유주의의 탈을 쓴 이기주의자들이 넘쳐난다. 공동선을 말하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나 힘든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그들의 생각 변화를 유도한다면, 공동선을 향한 정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언젠가는 다수의 목소리가 될 날도 올 것이다.

 


읽은기간 : 2010 12 30 ~ 2011 01 02

1차 독후감 : 2011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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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 책방 풀무질 일꾼 은종복이 바라본 세상 이야기
은종복 지음 / 이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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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수험생시절 문과생이었던 나는 사회탐구 과목으로 윤리, 사회문화, 세계사, 한국지리를 공부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단지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이기에 선택했고, 나와 잘 맞는 내용이기에 1년간 열심히 공부했었다. 특히 윤리와 사상을 공부하며 철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사회문화를 공부하면서 우리 사회에 대한 관심을 키울 수 있었다.  

수능 후 대학교를 알아보고 원서를 내는 기간동안, 대학에 가면 복수전공으로라도 꼭 사회학을 공부하고, 운동에도 참여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다짐으로만 끝나버렸다. 3월의 캠퍼스는 그 자체로 싱그러웠으며 항상 즐거운 얘기를 같이 할 수 있는 동기들이 있었다. 동기들 뿐이겠는가, 돈이 부족할 때면 약간 미안한 마음은 있지만 밥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마실 수 있었던 선배들까지 있었다. 우리 사회를 탐구하며, 낮은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행동을 하겠다는 다짐은 3월의 막바지 추위가 물러가며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네 학기를 다녔다.  

휴학을 하고 공익근무요원이 되면서, 우리동네 도서관과 근무지 도서실에서 책을 빌리거나 인터넷서점에서 책을 주문해 독서생활을 시작했다. 2년여 간의 근무기간이 이제 한 달 남짓 남았다. 한동안 책이 손에 안잡히던 슬럼프를 극복하고 다시 책을 잡기 시작한 게 지난 달인데, 도서관에서 바로 이 책을 발견했다. 『풀무질, 세상을 벼리다』

학교를 다니면서, 항상 그 앞을 지나쳤지만 전공서적을 싸게 살 수 있을까해서 들어가봤던 딱 한 번을 빼고는 풀무질에 들어가본 적이 없다. 서울에, 아니 전국적으로도 몇 남지 않은 인문사회과학 책방인데 너무 무심했던 내 모습이 후회스럽다. 책을 읽다보니, 다행히 내 기억속에도 지금 자리로 옮기기 전의 풀무질이 남아있었다. 아마 지금은 카페가 있는 자리인걸로 기억하는데 확실하지 않아서 안타깝다. 그저 '여기 있던 서점이 저기로 이사갔네?' 정도의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다. 2007년 6월 풀무질은 지금의 자리로 이사했는데, 그당시 나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풀무질이라는 공간을 통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은종복님의 이야기가 가장 많다.(나는 형님이라고 부를 친분이 없기에 아직은 은종복님이라고 쓰는게 편하다.)  

돈에 눈먼 사람들이,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사는 삶을 파괴하는 모습에 슬퍼하며, 파리나 모기처럼 하찮아보일지라도 생명을 존중하며,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세상이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라 믿는 풀무질의 일꾼이 말해주는 이야기다. 5부로 나뉘어진 은종복님의 이야기 사이사이에는 풀무질과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짤막짤막한 이야기들이지만, 부록이 아니라 공동저작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다른 이야기들과 잘 어울리는 이야기들이다. 

또 하나의 장점이 있다. 여는 글에서 직접 말하신 부분이지만,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서 글을 쓰신다. 항상 언어 문제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환영할만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 삶의 스승, 이용석」에 나온 '하나님'이라는 표현이다. 얼마 전에 읽은 고종석님의 『국어의 풍경들』에 따르면, '하나님'과 '하느님'중 올바른 표현은 '하느님'이라고 한다. '아래 아'가 소실되는 과정에서 잘못 옮겨진 표현이 '하나님'이라고 하니 개정판에선 고쳐지길 바란다.(개신교도들이 읽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쉬운 부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말하고 싶다. 가끔은 너무 순진하고 선하기만 한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워지는 말들이 있다. 은종복님의 마음은 잘 전달되지만, 213쪽의 도둑과 칼 비유나 313쪽의 '한민족은 가진 것 없이 오로지 착한 마음 하나로 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내용은 선뜻 고개를 끄덕거리기 힘들게 하는 말들이다.  

쓰다보니 아쉬운 부분에 대한 말이 길어졌다. 싫어서 하는 비판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널리 읽히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니 혹시 서운해하실 분들은 이해해주길 바란다.  

끝까지 읽고 나니, 우리 동네에 있는 작은 서점에 찾아가고 싶어진다. 잠시 후 저녁에 고등학교 1학년때 같은반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다. 조금 여유를 내서 그 서점에 들렀다 가야겠다. 인터넷 서점으로 사고 싶었던 책들 중 한 권을 사야지. 그리고 조만간 명륜동을 간다면 꼭 풀무질에도 들러야겠다.

읽은 기간 : 2010 12 29 ~ 2010 12 30 

정리 날짜 : 2010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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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 이제 무엇으로 희망을 말할 것인가 - '88만원 세대'를 넘어 한국사회의 희망 찾기
우석훈.지승호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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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적으로 불친절한 책이다. 질문자와 대답자의 말이 불성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각자의 말을 둘러싼 상황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가 과연 임기동안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잘 알고있지 않다면 끝까지 읽어가는 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전체적으로 우석훈씨가 주로 비판하는 대상은 참여정부의 정책들이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지만,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과 '천천히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동안 참여정부 자체와 유시민에 대해 항상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해왔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작과 유시민의 저작을 통해서만 참여정부의 입장을 들어왔다. 그렇기에 항상 '우리편'의 심정으로 참여정부의 정책들을 받아들여왔고,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비판'이 아니라 '반성'에 가까운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집을 읽으면서 시각을 교정할 기회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지 : 경제학자로서, 노무현 정권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우 : 케인즈 우파, 악질 케인즈주의자들이죠. 케인즈를 제일 악랄하게 해석한 경우입니다. 


지 : 사람들이 남의 얘기를 잘 안듣는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구요 (노무현 정부에 대해)
우 : 대화가 어렵더라구요. 하여간 아주 대화하기 힘든 상대였습니다. 말을 안 들어요. 도무지 듣지를 않아요. 명색이 듣고 반박하고 하는 게 토론 과정인데 들어야 할 거 아녜요. 듣지를 않는데, 뭐 얘기할 길이 없죠 


지: 노무현 대통령을 정치력, 조직 관리 측면에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치 9단'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었는데, 지금 봐서는 그렇지도 못한 것 같구요.  

우: 자기중심에서의 세계관이 뚜렷한 사람이죠. 사람은 누구나 잘못 생각할 수도 있고, 판단을 잘못 내릴 수도 있거든요.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중심성이 강한 것 같아요. 그래서 대화하고 토론하는 과정 자체가 너무 생략 되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패턴 자체를 보면 밀실 정치였던 것 같은데, 그래서 통치술 같은 것을 많이 고민했던 것 같고, 대중을 조작이나 선동의 대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국민을 사랑했느냐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기를 많이 바랐던 것 같아요. 그런식의 밀실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우리로서도 어려운 숙제고, 사실 선진국도 잘 못하는 부분이거든요. 하여간 밀실정치, 밀실 행정이 5년동안의 특징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아직도 참여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김대중 정부로부터 시작하여 참여정부까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많은 비용들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참여정부는 굉장히 성공한 정부"라고 주장하는데요. 

우: 그건 외치에 관한 얘기구요. 정부라는 건 내치도 해야죠. 그렇게 치면 외치를 위해서 내치를 너무 안 한 거 아녜요? 평화에 대한 대가가 꼭 강화된 신자유주의여야만 하느냐면 그렇지도 않거든요. 그런 논리대로 한다면 "외치만 있었던 10년 정권 아니냐? 그 동안 한국 민중이 어떻게 됐는지 아느냐?"고 묻고 싶어요. 평화에 대한 대가가 신자유주의나 거의 방임주의에 가까운 형태로 나타났거든요. 그건 그 사람들이 선택한 거고, 전 그게 잘못된 거라고 보는 거죠. 

 

대학교 1학년때 경제학 원론을 대충대충 수강했던 것 빼고는 경제를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케인즈주의를 가장 악랄하게 해석했다는 진단을 100%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보인다. 시각 교정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기점으로 참여정부에 대해 비판하는 '새로운' 글을 이제는 찾기가 힘든데, 우석훈씨의 이전 저작들을 잘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32쪽) 새만금 아니더라도 갯벌을 10년 내내 죽여놓고서 "갯벌이 큰 일"이라고 얘기하는 게 웃기는 거죠. 석유 같은 것은 위험해 보여도 중장기적으로는 분해가 되거든요. 카드뮴이나 중금속 오염에 비해서는 훨씬 부드러운 겁니다. 저건 그냥 내버려두고,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10년 동안 거기 있는 거 안 먹으면 되거든요. 그런데 중금속 오염 등으로 갯벌 죽는 것은 10년이 아니라 100년이 가도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영원히 죽는 거잖아요. 지금 자원봉사 할 정성을 다른 곳에 쏟았으면 새만금을 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천천히 죽는 것들에 대해서는 누가 울어주느냐는 거죠.

평소 나의 인생관, 세계관과 딱 부합하는 부분이다. 평소에는 다른 데서 '지랄' 해 놓고서는 눈에 띄는 사건 하나가 터져야 그제서야 호들갑 떨며 그전에는 잘했다는 듯이 위해주는 척 행동하는 우리 모습이 나는 역겹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역겨움에 대상에는 나도 당연히 포함된다. 

왜 우리는 평소에 정말 중요한 것들에 대해 관심을 쏟지 못할까? 삶이 너무나 팍팍해서 그렇게까지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는걸까? 그렇다고 삶을 돌아보면 또 그렇게 엄청 바쁘지도 않은데.... 올바르게 살기는 참 어려운 것이다. 흔히 말하듯 현실은 시궁창인데, 오염물질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그 와중에 아름다운 장면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잔뜩 쌓인 곳이 바로 우리가 생활하는 지금 이곳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평소에 조금씩 관심을 가진다면 차근차근 해결하고, 또 나쁜 사건이 다시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데 우리는 그걸 못한다. 그러다가 정말 눈에 띄는 큰 사건이 한 번 일어나야 그제서야 그곳에 온통 관심을 쏟는다.

 

다 읽고나니, 우석훈을 새롭게 만난 느낌이다. 나는 분명 88만원 세대를 읽은 독자인데, 이번 인터뷰집을 거치고 나니 우석훈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아는 것이 너무 없던 시절에 88만원 세대를 읽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우석훈의 저작들을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읽은 기간: 2010 12 22 ~ 2010 12 29

정리 날짜 : 2010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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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년을 맞아 봉하마을에 다녀왔다. 그때부터 이 자서전을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야 읽게 되다니 왠지모르게 마음이 불편하다.  

마지막 정리는 비록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쳤지만, 노무현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들을 바탕으로 한 정본  '자서전'이다. 본문 내용은 진보의 미래, 성공과 좌절, 여보 나좀 도와줘 등의 책들과 많이 겹친다. 그렇지만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노무현 본인이 자신의 인생을 톺아보며 적어내린 그 기록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이 나에게 던져준 생각은 이것이다. "비주류가 성공해서 정상에 올라서는 일을 불가능한 일일까?" 부림사건 변호를 맡으며 사회문제에 눈을 뜬 '82학번'노무현은 정치인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철저히 비주류였다. 비록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취임 직후부터 야당의 정치공세와 보수언론의 공격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것도 모자라 퇴임 후 검찰과 집권여당과 보수언론의 공격을 계속해서 받았고, 급기야 안타까운 마지막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혼란스러웠다. 돈도 권력도 학벌도 가지지 못한 시골 출신 변호사가 '그들만의 리그'에 뛰어들었던 것이 애시당초 잘못이었던걸까? 노무현 본인의 말대로 기울어진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축구경기인 셈인데, 경사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공을 차는 진보진영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 골 넣기가 너무나도 힘들다. 그런 축구경기에서 최전방 공격수였던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마지막까지 본인이 다듬은 자서전이 아니기에 분량도 조금 아쉽고, 또 마지막 날 아침의 묘사는 정말 본인이 쓴 부분이 아니라는 생각에 읽으면서 약간 불편함을 느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손길이 닿은 자서전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아쉬운 점을 크게 부각해 이 책의 가치를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사건이었고, 또 이 자서전을 읽으며 다시금 그 고민들을 하게 되었다. 비록 노무현을 알게 되면서 머리속이 복잡해졌고, 인생이 조금은 고달파졌지만, 이 힘듦을 기꺼이 짊어지고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비록 기울어진 경기장이지만, 세상이 원래 이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뛰어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읽은 기간 : 2010년 12월 25일 ~ 2010년 12월 26일
정리 날짜 : 2010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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