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 작가의 단편을 읽다가 문득 라로슈푸코의 잠언을 떠올렸다.‘위선이란 악이 덕에 바치는 찬사다.‘그 단편에 가난한 여자를 능멸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나는거기서 작가의 경망을 읽었다. 그럴싸한 경구라도 만들어낸그 구절을 발설하며 즐거워하는. 내가 과민했던 것일까? 아무튼 내게는 그 구절이 주인공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작가의 삭히지 않은 평소 생각으로 읽혔던 것이다. 그건위악도 아니었다. 노악(露惡)이었다. ‘솔직‘ 이란 옷을 입고 저의 삿됨과 속됨과 추함과 비전함을발산할 것인가, 아니면 제 한 몸 솔직하기‘ 를 희생해서 인간정신의 아름다움과 고귀함과 의로움과 비범함에 봉사할 것인가. 라로슈푸코는 후자에 높은 점수를 준다. 나도 내 시가 최소한 세상에 악취를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 소극적바람이다. 적극적 바람은 즐겁게 시를 쓰는 것이다. 난 즐거움으로 달려요. 난 일로 달리기 싫어요" 라고 말하는 달음박질꾼처럼 즐거움으로 시를 쓰고 싶다. 매혹적인 시의 길이 영원까지뻗어 있었으면 좋겠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과거에도 동물이었고 지금도동물이다.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 먹고.이해 먹고 마시며, 성관계하며, 그를 통해 자녀를 갖고, 감각을 통해 바깥 세계를 지각하며 자신에게 좋은 것을 가려내서 욕망하고,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모든 활동은, 신체 기관들과 분리되어 일어나지 않느곳에서 신체의 활동이다. 하지만 인간은 진화의 어느 시점부터 이 가기"이상한 동물이 되었다. 인간이 동물적 존재로서 자신을 부정하기시작한 것이다.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고, 성관계와 출산을 거부하고, 감각의 세계를 거짓이라며 부정하고, 심지어 금욕적 삶을 욕망.하는 것이 호모사피엔스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반동물적인 동물이다. 인간의 양면성, 즉 자기 보존과 자기 파괴, 자기 긍정과 자기부정, 자기 확대와 자기 축소를 고려하지 않는 인간론은 인간의 로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반쪽짜리다. 이러한 인간론에 바탕을 둔 윤리나 정치에 대한 논의라면 "매미 소리"일 뿐이다.
이승에 미혹된 선지자, 생존 프로그램이 왜곡해서 전하는 감각을 순수한 진실이라고 믿는 타락한 자. 내가 이 타락을 향유하니, 나를 어디로든 이끌라. 그 또한 하나의 배움일 것이니.
내 인생에서 가장 잘못 산 책이 아닐까? 아이디어가 신선해서 샀더니 그냥 덕후의 헛소리 집합소였다. 진지하게 쓰란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