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 작가의 단편을 읽다가 문득 라로슈푸코의 잠언을 떠올렸다.
‘위선이란 악이 덕에 바치는 찬사다.‘
그 단편에 가난한 여자를 능멸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나는거기서 작가의 경망을 읽었다. 그럴싸한 경구라도 만들어낸그 구절을 발설하며 즐거워하는. 내가 과민했던 것일까? 아무튼 내게는 그 구절이 주인공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작가의 삭히지 않은 평소 생각으로 읽혔던 것이다. 그건위악도 아니었다. 노악(露惡)이었다.
 ‘솔직‘ 이란 옷을 입고 저의 삿됨과 속됨과 추함과 비전함을발산할 것인가, 아니면 제 한 몸 솔직하기‘ 를 희생해서 인간정신의 아름다움과 고귀함과 의로움과 비범함에 봉사할 것인가. 라로슈푸코는 후자에 높은 점수를 준다. 나도 내 시가 최소한 세상에 악취를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 소극적바람이다. 적극적 바람은 즐겁게 시를 쓰는 것이다. 난 즐거움으로 달려요. 난 일로 달리기 싫어요" 라고 말하는 달음박질꾼처럼 즐거움으로 시를 쓰고 싶다. 매혹적인 시의 길이 영원까지뻗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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