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어던 - 국가라는 이름의 괴물 e시대의 절대사상 2
김용환 지음 / 살림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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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를 읽을 정도로 뛰어난 언어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은 번역판을 통해 다른 나라의 사상을 접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때론 번역하는 이의 역량에 따라 독자의 이해 정도가 달라지기도 하고, 때론 본래의 사상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으로 사상을 받아들이게도 된다. 번역판이 다양한다면 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양한 번역을 서로 비교하다보면 무엇이 옳고 또 무엇이 그른지 수렴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까지 풍요롭지 못하다. 홉스의 철학은 이러한 빈곤함의 한 가운데 놓여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저서라 할 수 있는 '리바이어던' 마저도 서점에서 찾아보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나마 출판되어 있는 경우도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어, 전체 4부 중 1, 2부만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과 국가, 이 두 화두는 홉스 철학의 중심 소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3, 4부에서 다루고 있는 종교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오히려 후자 쪽이 철학자 홉스를 이해하는데 더욱 많은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는 당대 교황권과 황제권의 대립 속에서 탄생한, 다분히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철학이니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된 철학에 대한 반기, 스토아 철학의 무용성에 대한 그의 목소리는 결코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이 책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한 해석을 충실한 완역과 함께 싣고 있다. 분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홉스 그리고 그의 사상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읽은 후 접하는 리바이어던은, 물론 여전히 난해하긴 했으나,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것이다.
오늘날은 홉스가 살았던 시대와는 또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황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된 지 오래다. 표면상으로 볼 때 우리 사회는 실로 평화로움 그 자체인 듯하다. 교육은 하나의 권리로서 일정 연령에 달한 사람들은 학교에 가게 된다. 국민들은 선거를 통하여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고, 인터넷의 발달은 이전에는 비밀스러움으로 존재하던 공간으로까지 우리를 이끈다. 하지만 표면은 표면일 뿐, 여전히 우리 사회는 혼란 그 자체이다. 강대국에 의한 폭력은 정당화되다 못해 선한 것으로 미화된다. 권리라 일컬어지는 교육은 자본없인 받을 수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으며, 국민에 의해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국민 아닌 정당 혹은 자기 자신의 이득을 위해 행동하기 마련이다. 갈등의 주체가 조금 변화했을 뿐, 그 양상에 있어서는 그다지 변화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아니, 조금 더 복잡해졌으면 복잡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홉스를 읽어야 하고 그의 사상을 이해해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그의 사상은 많은 부분 오해를 낳고 있다. 교회의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그는 강력한 절대 군주를 옹호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낳는다. 강력한 국가 그리고 통치자, 하지만 그의 사상이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다름 아닌 교황권에 대한 부정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황제와 교황의 대결구도, 하지만 이 두 세력이 벌이는 싸움에 승리자는 없다. 인간, 그 존엄성에 대한 전제 없이는 어느 누구도 승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사상은 민주주의와 맞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설정한 군주는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막무가내식 인물은 아니다. 그의 권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그가 모든 이들의 욕구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그들을 위해 행동하였을 경우에 한하여서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상은 대의제를 주장한 로크의 사상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로크 자신은 홉스의 영향을 받았음을 강력히 부인했지만...

잠들어 있던 홉스와 그의 철학과의 만남은 신나는 것이었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민주주의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진행형의 상태라는 점에서) 그의 철학은 분명 놀라운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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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강준만.김환표 지음 / 개마고원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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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태생인 나에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그저 평범하게만 느껴지는 곳이었다. 어떻게 말하면 ‘평온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곳. 역사를 알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전쟁이 있었다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 풍요와 번영으로 얼룩진 세상은 직접적인 아픔을 경험하지 않은 나에게 과거와의 연계를 허락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죽어갔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살기 위해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변해왔고 또 변했다. 비록 IMF 이후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곤 있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와 같은 세련되지 못한 억압 기제는 사라졌으니 말이다. 말 한 마디로 인해 소리 소문 없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그런 시대는 지나갔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사회가 완벽한 민주화를 이루었던가를 묻는다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긴 힘들 듯하다. 여전히 우리 안엔 우리 자신을 통제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과거로부터 닦여온, 너무도 세련된 그것에 대해 많은 이들은 부인한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분명 과거의 광기가 존재한다. 자신도 비정규직 노동자이면서 텔레비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투쟁 모습에 혀끝을 차는 그 모습이 지닌 아이러니에 대해 우리는 눈뜨지 못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빨갱이’, ‘공산당’ 등의 말을 쏟아내진 않지만, 우리의 적대적인 감정들은 여전한 것이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 적대감이 누구를 향한 것이며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묻다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시작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보다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이다. 끔찍하다 못해 어처구니없게까지 느껴지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고, 우리들의 삶 그 자체였다.


지난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적을 양산해 내도록 만들었다. 분단된 현실은 독재 권력에게 적지 않은 기회를 제공해주었으니, 안보를 부르짖으며 그들은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는 인사들을 제멋대로 요리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것은 단순히 경쟁자의 제거 차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정당치 못한 권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폭력이었다. 실체 없는 적을 수없이 양산함으로써 그들은 안팎으로 위기의식을 조성할 수 있었다. 지독히도 불안정한 상황, 제 아무리 독재일지라도, 아니 독재정권이라도 존재하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국가, 그렇기에 실제로 어떠한 사상을 가졌는지, 부역을 했는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영문도 모른 체 죽어간 이들이 불쌍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아무런 이유가 없을지라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은 우리 안에 자기 통제, 감시의 기제를 낳았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현실, 가장 친하다 여겼던 이가 고발자로 돌변할 수도 있는 상황, 의심받지 않기 위해선 보다 잔인해지는 것이 필요했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학생운동을 하는 자녀를 둔 이들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야만 했다. 자진해서 전쟁에 참여하고 내 이웃을 고발하고... 이것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쟁. 그렇게 우리 안의 광기가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냈고, 결코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월드컵은 대한민국 전역을 붉은 물결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몇몇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이라 말하기도 했던가. 하지만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 우리 안에는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는 것이 바로 좌파에 대한 것이고 통일에 대한 것이다. 물론 과거와 같이 정권에 의해 직접적으로 강제되진 않고 있지만 보수를 넘어선 극우를 정당화하는 기제는 수도 없이 많다. 현 정권을 좌파 정권이라 규정짓는 몇몇 언론의 태도 속에는 반공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선거철이면 항상 존재하는 색깔 논쟁과, 이에 대응하는 태도 속에도 변형된, 하지만 근본은 동일한 반공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하겠다.


이 상처를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에게 과거를 반복해선 안 됨을 가르치고 있다. 나와 타인을 가르고, 이를 통해 타인을 억압하는 일이 계속되는 속에서 결코 진정한 의미의 평화는 달성될 수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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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경제사 범우고전선 47
백남운 외 / 범우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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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대립으로 인해 우리 학계는 좌파 성향에 기반한 많은 연구를 잃어야만 했다. 백남운의 경우, 일제하에서 한국 고대사에 대한 가장 독보적인 연구를 행한 인물이지만 미군정 하에서 이루어진 극심한 사회주의자 탄압 정책으로 인하여 월북할 수 밖에 없었다. 동시에 그의 저서 <조선사회경제사> 우리에게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연구라는 간단한 수식어 외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우리 역사를 세계사적 보편성에 기초해 해석하려 들었으며, 마르크스주의는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우리나라의 아내, 남편 등 몇몇 단어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기원을 살펴보는 독특한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방식의 연구를 통해 그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원시 공산제 사회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고 장담한다. 혈연가족과 푸날루아 가족, 대우혼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있어서 고조선 사회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해 본다면 원시씨족사회였던 것이다. 계급과 사유재산제도의 발생에 있어서도 그의 분석의 독특함은 빛난다. 특히 농경사회의 도래와 함께 기존에는 살해하던 전쟁 포로를 노동력, 즉 재산으로 활용하게 된 것을 노예제도로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사회에 이르기까지 그의 분석은 읽는 이에게 낯선 감동으로 다가왔다. 기존 왕조, 지배층 중심의 역사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볼 순 없었지만, 국정 교과서를 통해 접했던 역사와는 또 다른 방식의 역사를 읽는 내내 나는 금지된 영역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쾌감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이는 역사 해석이 민족의 고대 국가 형성 과정을 자본제 사회의 형성을 위한 각기 다른 계급 간의, 특히 남성과 여성 간의 권력 투쟁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각의 독특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세계사적 보편성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우리 사회만의 독창성을 파악하는 데는 실패한 면모가 있지 않나 싶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는 현재 사회가 마르크스주의에 부합하는 길을 따라 걷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일종의 증거와도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백남운은 역사를 현재와의 대화, 더 나아가 현재를 정도(正道)로 이끄는 추동력으로 파악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역사관에 기반할 경우, 현 남/북한 사회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 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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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복수 - 자본주의의 부활과 국가사회주의의 죽음
메그나드 데사이 지음, 김종원 옮김 / 아침이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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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잘못이었던 것일까? 20세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인류에게 희망으로 불리우곤 했던 사회주의에 대한 불씨는 어느 순간 확 꺼져버리고 말았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이 여겨지던 마르크스의 예언은 더 이상 어떠한 가치도 지니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고 있으며, 자본주의라는 단 하나의 현존하는 체제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한 조치들이 자행되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극대화, 국경을 초월한 거대 자본의 출현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것 같다. 마르크스는 이미 죽었고, 죽은 이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만큼 경망스런 행위도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 역사 속에 출현했던 것이 정말 사회주의였을까? 마르크스가 이상적이라며 찬양해 마지 않던 그 사회가 그토록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는지. 언젠가부턴가 사람들은 이에 대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케인스의 유령이 더 이상 세계를 방황하지 않게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아마도 하이예크의 이름이 자본가들에 의해 칭송되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따라 인류의 역사 전 과정을 분석하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각각의 사회는 사회 안에 내재된 모순으로 인하여 무너질 수 밖에 없었고, 새로이 도래한 사회 역시 내재적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모든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이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구조적 틀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도 여지없이 이용되었다. 자본의 유무에 따른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구분. 이 모순의 극대화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해체를 가져올 것이며, 그로 인해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암시를 마르크스는 남겼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주의로 가는 것이 현 인류에게 가능한지, 더 나아가 사회주의가 도대체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새로이 도래할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현존하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더 나아가 그는 사회주의가 코 앞에 닥친 듯 이른 희망이 쩔어(-_-) 사는 이들을 향해 날카로운 비난을 던져댔다.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의 신으로 추앙되고야 말았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 마르크시즘은 그렇게 탄생했고, 너무도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의 이름을 걸고 엄청난 범죄들을 감행했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예언을 추종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그 내용을 확인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자본주의는 충분히 발달치 않았고 사회주의가 도래할 정도로 모순으로 가득 차지도 않았었건만, 마르크시즘에 도취한 이들은 무리해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현실화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권력은 중앙에 집중되었고, 순간적인 발전은 이룩했을지 모르겠으나 그 사회는 지독히도 경직된, 자유라곤 존재치 않는 형태를 띠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소련, 중국 모두 동일했다.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모택동주의 너무도 많은 -ism 이 난무했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배척되었다. 고인 물이 썩는 이치만큼이나 그 사회는 부패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랬기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토록 치를 떨어야만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애덤 스미스에서부터 시작하는 여행은 실로 대장정이었다. 마르크스가 인류의 역사 모두를 분석한 것에 비견할 정도로 저자는 경제학의 모든 순간을 분석하고 있었고, 그 여행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던 나는 수시로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느라 분주했다. 역사의 과정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경제학 이론 중 어느 것 하나 마르크스의 이론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은 없었던 것 같다. 개개인의 합리성이 전체 사회의 합리성으로 이어지리라는 애덤 스미스의 믿음에 마르크스는 반기를 들었다. 많은 마르크스의 추종자들에게 위기에 빠진 세계를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야기되어지던 케인스주의도 조차도 어떻게 보면 좌파 엘리트들의 학문에 불과했다. 마르크스의 뒤를 따르려던 어설픈 시도들은 모두 실패했다. 허망해하는 인류의 모습을 보며 마르크스는 지금쯤 어딘가에서 웃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고,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시도였음을.

지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이 효과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새로운 자본의 창출로 이어지진 못함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비해 현재의 인류는 많은 부분 진보를 이룩했다는 점에 대해 동의치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과거에 비해 분명 절대적 빈곤은 감소하였다. 하지만 부는 어느 한곳에 집중되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듯하다. 절대 강자인 것 같기만 한 자본주의는 서서히 균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균열이 현존하는 모든 질서의 붕괴로 이어지기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 우린 말할 수 없다. 어쩌면 마르크스가 볼 때 자본주의는 이제 새로이 시작하는 질서일지도 모른다. 사회주의를 꿈꾸기엔 어쩌면 너무도 이른 시점일지도 모른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회, 한 번의 실패 이후 상상하기 두려워지는 사회. 마르크스의 이름을 걸고 자행된 무시무시한 범죄 때문에 우리는 그 사회를 이야기하길 주저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에 대해 꿈꾸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지난 역사 속에서 우리가 만났던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위시한 하나의 전체주의였음을 우린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난 역사는 -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이 낳은 비극이었다. 정작 마르크스 자신은 마르크시스트가 아니었노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떤 면에서 우리는 지난 날을 살아간 이들에 비해 행운아이다. 우리에겐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야기하고 비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 말이다. 그 자유를 토대로 나는 어설프게나마 마르크스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마르크시스트가 아닌 한 명의 좌파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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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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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수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연장되고 있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과거에는 불치병 혹은 난치병으로 분류되던 몇몇 질병들이 오늘날 더 이상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다. 윤리성의 문제에 직면해 있긴 유전공학은 분명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 정도는 더욱 증대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기에 유전자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유전자로 환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다. 인간의 겉모습에서부터 시작하여 많은 부분을 유전자가 제어한다 할지라도, 나의 모든 것을 유전자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꺼려진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유전자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나의 생각은 지독히도 인간 중심적인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전자 속에 내재된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삶으로부터 의미를 찾는 것은 어려워질 듯 싶다. 게다가 우리의 저자는 이 모든 것을 유전자가 지닌 ‘이기적’ 성향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는 것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모두 이기적인 유전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해버릴 수 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실로 많은 예를 들고 있으며, 이는 그 발상만큼이나 흥미롭다. 그리고 그 생각은 흥미롭다 못해 다소 발칙하다 라는 느낌까지 든다. 진화론의 한계(?)를 굳이 논하자면, 최초의 변이에 대한 설명이 부재한다는 점이 아닌가 싶다. (즉, 우연히 출현한 종이 다른 종에 비해 환경에 적응함에 있어서 우위를 점할 경우, 이러한 우연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 진화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저자 역시 ‘우연’이라는 단어를 통해 변이를 이야기한다. (이는 아마도 나의 자연과학적 지식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박학다식 하지 못하며, 다분히 기형적인 지식 습득 과정을 거쳐 지금에 도달한 존재인지라…;;) 저자의 주장은 다분히 수학적이다. 어머니와 자녀, 같은 부모를 가진 형제 간의 유전자의 근친성 및 평균 여명을 통해 본 각각의 행위 내에 내재되어 있는 유전자의 이기성을 살펴보는 과정이 냉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 멜서스주의적(?)인 관점과, 나의 전공(사회복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까지 종종 엿볼 수 있었으니, 나로서는 당연히(?!) 거리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저자의 생각은 매력적이다. 인류, 어느 누구도 인간이라는 종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굳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을 고려하지 않더라도-우리 모두는 가족 구성원의 행복을 바라며 전혀 모르는 이보다는 나의 가족 구성원이 좀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길 바란다는 점에서-우리 모두는 이기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우리 사회에는 인간 개인의 유전자를 뛰어넘어 소위 ‘사회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물론, 이 모든 것도 개개인의 유전자가, 혹은 인간 종의 번영을 위해 인간 집단 전체가 발현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국가에 의한 가족계획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임신과 출산은 가정, 적게는 여성의 문제에 국한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은 인구를 억제 혹은 증가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는 분명 유전자에 의한 자가 조정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남녀간의 성행위가 자녀 출산의 목적을 띄고 행해지는 경우는 전체 성행위 중 몇 %나 될까? 이것 역시 ‘의도치 않은 임신’을 고려한 유전자의 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 만연해 있는 아들선호사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부모와의 유전자의 근친성을 통해 본다면 딸, 아들 모두 1/2로 동일하고, 평균 수명이 일반적으로 여성이 더 길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딸의 평균 여명이 아들의 그것보다 높은데도 왜 딸보다는 아들이 선호될까? 남성을 선호하는 것도 유전자의 이기적 성향 때문일까 등등. 물론 저자는 이에 대해 간단한 언급을 하긴 했다. 어미가 갖고 있는 자원을 아들에게 모두 투자하는 것이 보다 많은 개체수를 획득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딸에게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고 그는 봤다. (남성은 평생에 걸쳐 생식이 가능하며, 직접 임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는 모든 여성에게 자신의 정자를 퍼뜨릴 수 있는 존재이다.-_-)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분명 일부일처제 사회인걸 고려한다면 아들을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보다 많은 개체수에 전파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고려하고 난다면, 아들선호사상은 유전자보다는 문화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분명 유전자는 인간의 삶에 엄연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굳이 유전적인 질병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는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의 삶, 그 근원에 존재하는 이성, 타인을 사랑하는 그 마음까지 유전자의 행위로 설명하고 싶진 않은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어쩌면 이는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과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건널 수 없는 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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