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수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연장되고 있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과거에는 불치병 혹은 난치병으로 분류되던 몇몇 질병들이 오늘날 더 이상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다. 윤리성의 문제에 직면해 있긴 유전공학은 분명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 정도는 더욱 증대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기에 유전자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유전자로 환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다. 인간의 겉모습에서부터 시작하여 많은 부분을 유전자가 제어한다 할지라도, 나의 모든 것을 유전자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꺼려진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유전자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나의 생각은 지독히도 인간 중심적인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전자 속에 내재된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삶으로부터 의미를 찾는 것은 어려워질 듯 싶다. 게다가 우리의 저자는 이 모든 것을 유전자가 지닌 ‘이기적’ 성향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는 것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모두 이기적인 유전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해버릴 수 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실로 많은 예를 들고 있으며, 이는 그 발상만큼이나 흥미롭다. 그리고 그 생각은 흥미롭다 못해 다소 발칙하다 라는 느낌까지 든다. 진화론의 한계(?)를 굳이 논하자면, 최초의 변이에 대한 설명이 부재한다는 점이 아닌가 싶다. (즉, 우연히 출현한 종이 다른 종에 비해 환경에 적응함에 있어서 우위를 점할 경우, 이러한 우연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 진화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저자 역시 ‘우연’이라는 단어를 통해 변이를 이야기한다. (이는 아마도 나의 자연과학적 지식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박학다식 하지 못하며, 다분히 기형적인 지식 습득 과정을 거쳐 지금에 도달한 존재인지라…;;) 저자의 주장은 다분히 수학적이다. 어머니와 자녀, 같은 부모를 가진 형제 간의 유전자의 근친성 및 평균 여명을 통해 본 각각의 행위 내에 내재되어 있는 유전자의 이기성을 살펴보는 과정이 냉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 멜서스주의적(?)인 관점과, 나의 전공(사회복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까지 종종 엿볼 수 있었으니, 나로서는 당연히(?!) 거리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저자의 생각은 매력적이다. 인류, 어느 누구도 인간이라는 종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굳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을 고려하지 않더라도-우리 모두는 가족 구성원의 행복을 바라며 전혀 모르는 이보다는 나의 가족 구성원이 좀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길 바란다는 점에서-우리 모두는 이기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우리 사회에는 인간 개인의 유전자를 뛰어넘어 소위 ‘사회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물론, 이 모든 것도 개개인의 유전자가, 혹은 인간 종의 번영을 위해 인간 집단 전체가 발현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국가에 의한 가족계획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임신과 출산은 가정, 적게는 여성의 문제에 국한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은 인구를 억제 혹은 증가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는 분명 유전자에 의한 자가 조정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남녀간의 성행위가 자녀 출산의 목적을 띄고 행해지는 경우는 전체 성행위 중 몇 %나 될까? 이것 역시 ‘의도치 않은 임신’을 고려한 유전자의 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 만연해 있는 아들선호사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부모와의 유전자의 근친성을 통해 본다면 딸, 아들 모두 1/2로 동일하고, 평균 수명이 일반적으로 여성이 더 길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딸의 평균 여명이 아들의 그것보다 높은데도 왜 딸보다는 아들이 선호될까? 남성을 선호하는 것도 유전자의 이기적 성향 때문일까 등등. 물론 저자는 이에 대해 간단한 언급을 하긴 했다. 어미가 갖고 있는 자원을 아들에게 모두 투자하는 것이 보다 많은 개체수를 획득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딸에게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고 그는 봤다. (남성은 평생에 걸쳐 생식이 가능하며, 직접 임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는 모든 여성에게 자신의 정자를 퍼뜨릴 수 있는 존재이다.-_-)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분명 일부일처제 사회인걸 고려한다면 아들을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보다 많은 개체수에 전파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고려하고 난다면, 아들선호사상은 유전자보다는 문화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분명 유전자는 인간의 삶에 엄연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굳이 유전적인 질병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는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의 삶, 그 근원에 존재하는 이성, 타인을 사랑하는 그 마음까지 유전자의 행위로 설명하고 싶진 않은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어쩌면 이는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과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건널 수 없는 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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