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사 - 창의적인 수용과 융합의 2천년사
소병국 지음 / 책과함께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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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 관한 조사 중에 이 책을 발견했다. 싱가포르 역사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 내용까지 알수있어 좋음. 주말에 좀더 읽고 리뷰 추가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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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dohyosae > 두려움의 실체
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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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형벌은 신체형이 일반적이었다. 신체형은 사형.자유형.재산형으로 구분된다. 사형은 말 그대로 목숨을 빼앗는 것이고 자유형은 강제노동을 수반하는 노역형이며, 재산형은 벌금형이다. 이것은 서양의 경우에도 거의 차이가 없었다. 이것은 범죄자를 일반인들과 격리하는 근대 이후의 구금형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푸코는 신체형에서 구금형으로 변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푸코는 그의 저서인 '광기의 역사'에서도 국가의 개입에 의해 소외자들이 어떻게 격리되어가는 가를 고찰하면서 이 격리는 사회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을 증명하였다. 우리는 공산체제하의 구소련에서 반체제인사들이 강제수용소보다는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고통을 받았던 많은 사례를 알고 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감옥과 병원의 예를 들면서 그 구조상의 특성이 유사함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에서 레취드 간호사의 위치를 알고 있다. 그녀는 항상 환자들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환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완벽하게 보인다. 그러나 환자들은 그녀를 볼 수 없다. 다만 그들의 위치에 따라 그녀를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감시당하는 쪽에서는 언제나 긴장감을 유지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병원과 감옥은 국가기관의 완벽한 통제를 과시하는 하나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이런 시설물 안에서 재교육을 통해 인체를 순종적으로 길들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파블로프의 조건반사의 법칙이 이용된다. 조건반사의 법칙은 쉽게 말하면 세뇌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국가가 개인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갖추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푸코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곳-예를 들면 시간표-에서 감시와 처벌의 흔적을 발견해 낸다. 학교라는 장소 또는 기숙사라는 장소에서 시간표와 획일화된 규칙은 순종적인 인간을 양산해내는 공장으로 본 것이다. 이것이 국가 전체로 확대되어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푸코의 책을 읽으며 항상 느끼는 것은 그 하나의 부분적 사실을 읽다 문득 그 뒤에 숨어있는 거대한 하나의 실체를 볼 때 경악하게 되는 모습이다.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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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koosk > 세상을 읽는 법, 그리고 세상을 사는 법
book+ing 책과 만나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지음 / 그린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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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만나다> 이 책과 만나게 된 건, 순전히 나의 지적 콤플렉스 때문이다. 이것저것 책을 읽어대면서도 여전히 누군가의 '독서일기'를 기웃거리게 된다. 아마, 내가 잘 읽고 있는 건가? 아니면 '좀' 유명한 사람들은 어떤 책들을 읽나? 이런 궁금증 때문이리라. 책은 항상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도대체 어디쯤에서 끝을 볼 수 있을까? 끝을 보기는 볼 수 있는 건가? 이런 의문들, 지적인 호기심과 막막함, 책 앞에서의 왜소함 들이 다른 사람의 독서일기를 훔쳐보게 한다. 그런데 그런 일기들의 공통점이란, 책읽기란 개인의 취향이라는 사실과, 역시 '난 사람'들은 '난 책'들을 읽어댄다는 사실이다. '난' 책? 그건 내가 읽어서는 일기를 쓴 사람의 취향이나 공감, 감동이 전혀 전달되지 않는 책들을 말한다. '난' 사람들은 열렬히 상찬(賞讚)하는 책에서 난해함만을 느낄 때의 좌절과 슬픔…. 물론 간혹 '나와 같음'에 전율하게도 되지만…. 이 책 역시 그런 우려와 약간의 기대로 집어들었다.

<다양한, 이질적인 맞선> 이 책의 미덕은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원저자를 만날 수 있고, 그 원저를 해석하는 또 다른 저자들을 만날 수 있다. 18명의 저자들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울림을 주었던 100여권의 책들과의 만남을 주선해준다. 이 책은 책과의 맞선인 셈이다. 이런 점이 한 사람에 의해 쓰여진 독서일기를 접할 때보다는 실패와 당혹감을 최소화시켜 준다. 18명 중에 내 취향에 맞는 맞선을 주도하는 플래너(planner)를 만날 수도 있고, 내 취향의 그(책)를 만날 수도 있기에. 게다가 읽다보면, 만나다보면, 평소 취향이 아니었던 그들과도 소통해보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기도 한다. 독서목록이 늘어난 셈!

<세상을 읽는 법> 결국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제대로? 혹은 여러 각도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100여권의 책 중에 내가 읽은 건, 16권뿐이었다(제대로 읽지 않고, 팽개쳐버린 것까지 포함해서). 다시 작아지는 왜소함! 그것은 18이란 숫자로도 극복가능하기도 하거니와, 프롤로그를 통해서도 위안 삼을 수 있다. 그들은 책이란 단지 세상을 읽기 위한 '기계'일 뿐이라 얘기하고 있다. 그들이 세상을 읽는 기계와 내가 세상을 읽었던 기계가 다를 수 있고, 다를 수밖에 없다. 얼마나 큰 위안인가!

<세상을 사는 법> 왜 이런 책을 선정했는지, 어떻게 목차를 구성했는지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이 책에서 만나볼 수 없다.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제대로 보는 법을, 세상을 읽는 법을 배웠다면, 그랬다면 세상을 똑바로 살라는 것이다. 세상을 사는 법, 그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했던 삶의 모습은 일상으로부터의 벗어나기, 탈주를 꿈꾸라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 진정한 아웃사이더, 자유인으로 살라는 메시지, 내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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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ing 책과 만나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지음 / 그린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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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거대한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던 나에게 아담한 크기의 동네 도서관이 마음에 들리는 없었다. 시무룩한 마음으로 대출증을 만들었고, 그렇게 처음으로 대출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몇 명이나 이 책을 읽었던 것일까. 아무런 안전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데, 책은 참으로 깨끗했다. 확실히 인문, 사회과학 서적들이 죽어가나 보다. 시름시름 앓는 그 소리를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이 한 권의 책을 만나기 위해 내 마음은 그토록 떨려야만 했나 보다. 한 권의 책 속에서 펼쳐지는 너무도 많은 책 이야기는 내게 축복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서평을 읽음으로써 그 책을 다 읽은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듯, 난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너무도 많은 책을 읽어버린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호흡이 가빠왔고, 배가 불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 쪽 구석이 사늘하니 아려왔다.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난 부족함 그 자체였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서로 다른 책을 골라 읽고, 또 서로 다른 것들을 느낀다. 나는 책이 좋았고, 책을 읽는 순간에도, 읽고 나서도 그저 좋아 앓아댈 뿐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책이 좋다 못해 그 책을 무기로 사용하겠단다. 미움을 불러 일으키는 이들을 향해 던지는 책이라니, 물론 운이 나빠 모서리에 맞아 죽는 경우도 생길 수도 있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무기 치곤 너무 부실하지 않은가 싶은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그들에게 책은 핵폭탄 보다 더 무서운 무기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책은 그저 개별적인 문자의 집합이 만들어낸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었고, 일상을 분해하는 날카로움이었다. 그 날카로움에 잠시 찔려 아픔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 아픔은 실로 에로틱했다. 갑자기 왠 야시시한 분위기냐고? 타인의 속을 훔쳐보는 것만큼 야릇한 경험도 없지 않은가? 책 속에 갇혀버린 책들은 저마다 제각기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살려달라는, 나를 여기서 꺼내 달라는 그 목소리가 참으로 짓궂게 들려왔다. 그들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유치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나 잡아 봐라를 외치면서 나를 약올리고 있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화를 주체하지 못한 난 그렇게 그들이 벌려 놓은 축제의 한 가운데까지 걸어 들어가고 말았다.

그 축제는 실로 화려함의 극치였다. 언젠가 읽으려고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너무 어렵다며 어디론가 던져버렸던 불청객들이 쏟아내는 소리는 실로 왁자지껄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소리들은 모두 세상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전혀 다른 언어, 전혀 다른 관점에서 그려진 부분들을 조금씩 퍼즐 조각 맞추듯 맞추어 나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은 책의 첫 페이지를 펼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읽고 싶다 혹은 읽어야만 되겠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내 목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켁.. 숨 막힌단 말이지, 그만 나 좀 놓아주는 게 어때?

니 삶은 모순 덩어리였어. 넌 좀 더 당해야해.

악독하기 그지없는 녀석들과 한바탕 뒹굴었고, 그러면서 그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읽는 그 순간에도 아침형 인간이 되기 위해 애썼던 내 부조화스러운 모습이라니. 그래, 난 너무도 부족했을 따름이었다. 장자도 아닌 것이 , 이번 생은 포기한다. 다음 생에 다시 승부하련다. 라면서 막무가내로 살고 있는 내 모습이란 실로 코미디였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무의식적으로 지하철에서 내렸다. 수유. 젠장 수유연구실 이라는 단어를 하도 열심히 읇어댔더니 이런 실수를 그래, 책과 만나려면 이 정도야 투덜 투덜

북적 북적.. 머릿속에서 책 달라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글 쓰고 싶다며 마구마구 움직이기 시작했다. 멋대로 움직이는 몸들을 향해 난 외치고 있었다. 이봐! 난 천재가 아니란 말이지 천천히 기다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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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더많은 도모유키를 위하여
도모유키 - 제1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조두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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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빛에 알맞게 익은 남해의 바다는 여름철보다 더 파랗다.산녘의 단풍이 서로의 붉음을 질투한다면 바다의 단풍(?)은 푸름을 경쟁한다.나는 늘 관찰자로서만 그 바다를 바라본다.남해의 바다는 수많은 어촌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다.흰 점처럼 알알이 박혀 있는 양식장의 부표들,베를 가르듯 푸른 물결을 가르며 섬과 섬 사이를 달리는 통통배,어구를 손질하는 아낙네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련하다.멀리 죽방렴도 보인다.사릿대를 얽은 죽방렴은 남해에만 있는 전통 멸치잡이 어구이다.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작은 섬처럼 석양을 받은 죽방렴의 모습이 고즈넉하다.

거제-통영-남해....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바다가 아름답다고 일컫어지는 곳이다.하지만 지금 바다는 수백년전 붉은 피의 기억을 우리에게 전해주진 않는다.그저 아름답고 아름다울 뿐이다.혹시 모른다.바닷가를 걸으며 들을 수 있는 썰물의 소리,자갈들이 굴러가는 소리가 오래전 그들의 울음을 바다밑에서 끌어올리고 있는지도...  현실의 우리에게 수백년전의 칼소리를 기억나게 해주는 것은 남해일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승첩비들이다.이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치 고속버스 휴게소 처럼 관광버스가 몇대 정차해 있는 곳들이 있다.대개 그곳이 이순신장군의 임진왜란 승전비가 있는 곳이다.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장군과 관련된 어떠한 흔적이라도 있는 곳이다.나는 대개 그런 곳들을 그냥 지나친다.그저 지나가면서 '아...이 곳이 노량이구나' '아...이 곳이 명량이구나' 한다.

<도모유키>를 읽었던 시점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막을 내린 때였다. 막대한 물량과 화려한 전투씬,예전 이순신 드라마에서 보지 못했던 성웅의 인간적 고뇌등이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제작 초기에 드라마의 역사성을 가지고 왈가왈부 말이 많았다.역사 드라마가 어쩔 수 없이 가지고 가야하는 딜레마였다.드라마를 드라마로 보지 않고 역사에 더 큰 비중을 두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어처구니 없는 왜곡이고 분개할 일이었을 것이다.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 일뿐이다.굳이 드라마를 가지고 역사성에 깊이 천착하려들면 아마 대부분의 역사드라마는 TV정치 뉴스처럼 되어 버릴 것이다.그리고 역사성을 운운하며 비판하던 사람들 역시 지루하다며 고개를 돌려버릴 것이다.

<도모유키>의 배경은 드라마의 끝부분에 닿아 있다.조선 수군의 봉쇄와 육군의 선전으로 재침입한 일본군은 순천성에 고립된다.주인공 도모유키는 고립된 일본군의 군막장 중 하나이다.그는 침략군 군인이나 또한 하나의 개인이다. 우리는 대개 어떤 사건을 인식할 때  조직이나 국가 단위로 큰 범주화 시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사실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또한 그 안에 오류가 있다 손 치더라고 범주의 광범위함이 가진 작은 예외정도로 치부해 버리면 되기 때문에 빠져나가기도 좋다.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대범주가 가진 섬세함의 부족에 대해선 끝도 없는 예가 있다. '일본놈들은 하여간 약다니까' '미국 놈들은 지들이 제일 잘난지 알지''한국놈들은 하여간 맞아야돼'' 전라도 놈들은 으뭉해서 절대 믿으면 안돼'...등등등

이러한 일상언어의 개인에 대한 부정과 몰이해는 뜻밖의 편견을 가져다 준다.내가 아는 어떤 전라도 친구는 진짜 으뭉스럽다.또 어떤 전라도 친구는 오히려 쿨하다.내가 아는 어떤 일본인은 약다기보다 예의바르고 깔끔하고 어떤 미국인은 누구보다 부시에 반대하며 미국의 반성을 촉구한다. 일상 언어가 가진 폭력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개인의 소멸'이다.특히 전쟁이란 상황에 놓여 모든게 극과 극으로 구분된 때라며 이 개인을 향한 폭력은 물리적 형태를 동반하여 의식 기반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전쟁 상황이 되면 적 아니면 아군이다.그러다 보니까 묻혀버려야하는 기억들이 있다.개인의 역사이고 그들이 가진 모든 질곡들이다.

주인공 도모유키를 통해 나는 드라마 이순신을 보며 거북선에 부딪혀 바다로 떨어지는 일본군 스턴트맨을 생각했다.실제 스턴트맨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얼굴한번 보이지 않지만 위험천만한 연기를 묵묵히해내야 하는 스턴트맨들.그들은 거기서 받은 수당으로 소주 한잔을 기울이고 또 작은 아들 자전거를 한대 사주었을 것이다.다음으로 그 스턴트맨이 연기한 수백년전 거북선에 받혀 떨어진 진짜 일본군에 대해 생각한다.주인공 도모유키처럼 여동생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소망을 가진 병사였을 수 도 있다.아니면 늙은 노모와 부인을 두고 끌려와서 어쨋든 살아돌아가고픈 마음 밖에 없는 병사였을 수도 있다.그보다 더 파란만장한 개인사의 질곡을 담고 있는 일본군 병사-왜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돌아가지 못했고 그들의 역사는 아무도 기억하거나 기록하지 않는다.성웅 이순신의 영웅적 행동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고 조선 침략 선봉장 가토기요마사와 고니시유키나가의 이름 역시 그 가문의 명예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조선 수군 돌이,봉이,먹쇠,일본 육군 도모유키,기요시,나가타 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한번 당파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지도자의 뛰어남이 결코 무시되어서는 않된다.하지만 나와 같은 민중은 결국 역사를 움직이는 잡초들에게 더욱 애정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고 당파적 목소리를 높여야만 한다.박정희가 근대화에 어느정도 기여했고 그의 카리스마 역시 개발드라이브에 힘을 실었다는 것을 인정한다.하지만 나처럼 고위층에서 먼 사람은 그들의 공로보다 동일방직 여공과 YH여공과 동대문시장 피혁노조원들이 경제개발을 만들어 냈다고 믿어야 한다.그리고 그렇게 믿는다.

또한 집단 속에 묻혀버리는 개인의 삶에 대해 당파적 애정을 보낼 수 밖에 없다.대학 다닐때 많이 들었던 '더 큰 적과 싸우기 위해서 개인은 접어라' 라는 뉘앙스의 말이 비록 정치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나의 당파성은  개인들이 가진 수많은 사연들에 대한 배려쪽으로 기울수 밖에 없다.언젠가 지리산 산청에 가서 어느 촌로와 한참을 이야기한적이 있다.그 동네는 지리산 대원사 밑자락 동네로  한국전쟁당시 아침에 국군,저녁에 빨치산 하던 곳이다.그 촌로의 일가친척,친구들이 죽고 살고 당하고 모면한 이야기들을 들으면 전부 다 소설이다.어떻게 살아서 나랑 이야기하나 싶은 정도다.그 촌로가 내가 싫어하는 '한나라당'에 투표했다고 그를 의식없는 노인네라고 할 수 있을까? 설령 그가 박정희 예찬론자라 하더라고 나는 쉽사리 그를 욕할 수 는 없었을 것이다.설령 정치적으로 그것이 옳지 않다고 믿을 지라도

도모유키는 국가와 민족을 떠난 개인이다.낭만적 개인이며 인간적인 개인이다.전쟁이란 상황에선 이런 가치가 자신의 목숨을 앞당길 수도 있다.어떤 맹목적인 개인은 그래서 위에서 시키면 명령이라고 다 한다.민간인 학살같은 것도 전쟁시 명령이었으므로 난 책임없다고 당당하다.일개 병사가 무슨 큰 죄가 있겠냐만은 개인에게 살아 있어야만 하는 인류의 양심이란 잣대에 기대어 보면 결코 당당할 수 없을 것이다.우리는 흔히들 '친일청산 식민잔재 청산'을 말한다. 비록 늦었지만 친일인사 명단도 공개돼었다.하자만 여전히 우리는 일본에 대해 '우월감'과 '피해의식'이라는 두가지 감정 상태에 혼란을 겪고 있다.매일 TV에서는 일본문화가 우리나라에서 전파되었다고 떠벌이며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또 한편에선 과격한 민족주의로 '피해의식'의 발로를 애국이라 믿고 있는 세력도 많다.일본어투를 사용하지 않고 일본상품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을 배워 이기는 것만이 친일청산일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이 우리사회에 남긴 '전체주의''집단주의'를 하나씩 걷어내는 것이 진정한 청산이 아닐까 한다.개인의 선택과 개인의 개성,역사가 말살되어 집단으로 귀속되는 한국사회의 특성 역시 그 근대적 시원은 일본 제국주의에 있다. 수많은 도모유키가 살아나야 한다.수많은 봉자,말숙이 살아나야 하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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