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복수 - 자본주의의 부활과 국가사회주의의 죽음
메그나드 데사이 지음, 김종원 옮김 / 아침이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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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의 잘못이었던 것일까? 20세기를 뜨겁게 달구었던, 인류에게 희망으로 불리우곤 했던 사회주의에 대한 불씨는 어느 순간 확 꺼져버리고 말았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이 여겨지던 마르크스의 예언은 더 이상 어떠한 가치도 지니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고 있으며, 자본주의라는 단 하나의 현존하는 체제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한 조치들이 자행되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극대화, 국경을 초월한 거대 자본의 출현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희망은 없는 것 같다. 마르크스는 이미 죽었고, 죽은 이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만큼 경망스런 행위도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 역사 속에 출현했던 것이 정말 사회주의였을까? 마르크스가 이상적이라며 찬양해 마지 않던 그 사회가 그토록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는지. 언젠가부턴가 사람들은 이에 대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케인스의 유령이 더 이상 세계를 방황하지 않게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아마도 하이예크의 이름이 자본가들에 의해 칭송되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따라 인류의 역사 전 과정을 분석하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각각의 사회는 사회 안에 내재된 모순으로 인하여 무너질 수 밖에 없었고, 새로이 도래한 사회 역시 내재적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모든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이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구조적 틀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도 여지없이 이용되었다. 자본의 유무에 따른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구분. 이 모순의 극대화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해체를 가져올 것이며, 그로 인해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암시를 마르크스는 남겼다.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를 넘어 사회주의로 가는 것이 현 인류에게 가능한지, 더 나아가 사회주의가 도대체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새로이 도래할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현존하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더 나아가 그는 사회주의가 코 앞에 닥친 듯 이른 희망이 쩔어(-_-) 사는 이들을 향해 날카로운 비난을 던져댔다. 하지만 그런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의 신으로 추앙되고야 말았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 마르크시즘은 그렇게 탄생했고, 너무도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의 이름을 걸고 엄청난 범죄들을 감행했다. 그들은 마르크스의 예언을 추종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그 내용을 확인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자본주의는 충분히 발달치 않았고 사회주의가 도래할 정도로 모순으로 가득 차지도 않았었건만, 마르크시즘에 도취한 이들은 무리해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현실화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탄생한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권력은 중앙에 집중되었고, 순간적인 발전은 이룩했을지 모르겠으나 그 사회는 지독히도 경직된, 자유라곤 존재치 않는 형태를 띠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소련, 중국 모두 동일했다.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모택동주의 너무도 많은 -ism 이 난무했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배척되었다. 고인 물이 썩는 이치만큼이나 그 사회는 부패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랬기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토록 치를 떨어야만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애덤 스미스에서부터 시작하는 여행은 실로 대장정이었다. 마르크스가 인류의 역사 모두를 분석한 것에 비견할 정도로 저자는 경제학의 모든 순간을 분석하고 있었고, 그 여행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던 나는 수시로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느라 분주했다. 역사의 과정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경제학 이론 중 어느 것 하나 마르크스의 이론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은 없었던 것 같다. 개개인의 합리성이 전체 사회의 합리성으로 이어지리라는 애덤 스미스의 믿음에 마르크스는 반기를 들었다. 많은 마르크스의 추종자들에게 위기에 빠진 세계를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야기되어지던 케인스주의도 조차도 어떻게 보면 좌파 엘리트들의 학문에 불과했다. 마르크스의 뒤를 따르려던 어설픈 시도들은 모두 실패했다. 허망해하는 인류의 모습을 보며 마르크스는 지금쯤 어딘가에서 웃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고,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시도였음을.

지난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이 효과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새로운 자본의 창출로 이어지진 못함을 우리는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비해 현재의 인류는 많은 부분 진보를 이룩했다는 점에 대해 동의치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과거에 비해 분명 절대적 빈곤은 감소하였다. 하지만 부는 어느 한곳에 집중되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듯하다. 절대 강자인 것 같기만 한 자본주의는 서서히 균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균열이 현존하는 모든 질서의 붕괴로 이어지기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 우린 말할 수 없다. 어쩌면 마르크스가 볼 때 자본주의는 이제 새로이 시작하는 질서일지도 모른다. 사회주의를 꿈꾸기엔 어쩌면 너무도 이른 시점일지도 모른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회, 한 번의 실패 이후 상상하기 두려워지는 사회. 마르크스의 이름을 걸고 자행된 무시무시한 범죄 때문에 우리는 그 사회를 이야기하길 주저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에 대해 꿈꾸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 지난 역사 속에서 우리가 만났던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위시한 하나의 전체주의였음을 우린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난 역사는 -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이 낳은 비극이었다. 정작 마르크스 자신은 마르크시스트가 아니었노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떤 면에서 우리는 지난 날을 살아간 이들에 비해 행운아이다. 우리에겐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야기하고 비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 말이다. 그 자유를 토대로 나는 어설프게나마 마르크스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마르크시스트가 아닌 한 명의 좌파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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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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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의 수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연장되고 있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이 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과거에는 불치병 혹은 난치병으로 분류되던 몇몇 질병들이 오늘날 더 이상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다. 윤리성의 문제에 직면해 있긴 유전공학은 분명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기여하고 있으며, 앞으로 그 정도는 더욱 증대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기에 유전자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유전자로 환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어렵다. 인간의 겉모습에서부터 시작하여 많은 부분을 유전자가 제어한다 할지라도, 나의 모든 것을 유전자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꺼려진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유전자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나의 생각은 지독히도 인간 중심적인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것이 유전자 속에 내재된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삶으로부터 의미를 찾는 것은 어려워질 듯 싶다. 게다가 우리의 저자는 이 모든 것을 유전자가 지닌 ‘이기적’ 성향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는 것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모두 이기적인 유전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해버릴 수 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실로 많은 예를 들고 있으며, 이는 그 발상만큼이나 흥미롭다. 그리고 그 생각은 흥미롭다 못해 다소 발칙하다 라는 느낌까지 든다. 진화론의 한계(?)를 굳이 논하자면, 최초의 변이에 대한 설명이 부재한다는 점이 아닌가 싶다. (즉, 우연히 출현한 종이 다른 종에 비해 환경에 적응함에 있어서 우위를 점할 경우, 이러한 우연이 다음 세대로 전달되어 진화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저자 역시 ‘우연’이라는 단어를 통해 변이를 이야기한다. (이는 아마도 나의 자연과학적 지식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박학다식 하지 못하며, 다분히 기형적인 지식 습득 과정을 거쳐 지금에 도달한 존재인지라…;;) 저자의 주장은 다분히 수학적이다. 어머니와 자녀, 같은 부모를 가진 형제 간의 유전자의 근친성 및 평균 여명을 통해 본 각각의 행위 내에 내재되어 있는 유전자의 이기성을 살펴보는 과정이 냉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 멜서스주의적(?)인 관점과, 나의 전공(사회복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까지 종종 엿볼 수 있었으니, 나로서는 당연히(?!) 거리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저자의 생각은 매력적이다. 인류, 어느 누구도 인간이라는 종이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굳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을 고려하지 않더라도-우리 모두는 가족 구성원의 행복을 바라며 전혀 모르는 이보다는 나의 가족 구성원이 좀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길 바란다는 점에서-우리 모두는 이기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우리 사회에는 인간 개인의 유전자를 뛰어넘어 소위 ‘사회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물론, 이 모든 것도 개개인의 유전자가, 혹은 인간 종의 번영을 위해 인간 집단 전체가 발현되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국가에 의한 가족계획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임신과 출산은 가정, 적게는 여성의 문제에 국한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은 인구를 억제 혹은 증가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는 분명 유전자에 의한 자가 조정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남녀간의 성행위가 자녀 출산의 목적을 띄고 행해지는 경우는 전체 성행위 중 몇 %나 될까? 이것 역시 ‘의도치 않은 임신’을 고려한 유전자의 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 만연해 있는 아들선호사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부모와의 유전자의 근친성을 통해 본다면 딸, 아들 모두 1/2로 동일하고, 평균 수명이 일반적으로 여성이 더 길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딸의 평균 여명이 아들의 그것보다 높은데도 왜 딸보다는 아들이 선호될까? 남성을 선호하는 것도 유전자의 이기적 성향 때문일까 등등. 물론 저자는 이에 대해 간단한 언급을 하긴 했다. 어미가 갖고 있는 자원을 아들에게 모두 투자하는 것이 보다 많은 개체수를 획득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딸에게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고 그는 봤다. (남성은 평생에 걸쳐 생식이 가능하며, 직접 임신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는 모든 여성에게 자신의 정자를 퍼뜨릴 수 있는 존재이다.-_-)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분명 일부일처제 사회인걸 고려한다면 아들을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보다 많은 개체수에 전파할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고려하고 난다면, 아들선호사상은 유전자보다는 문화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분명 유전자는 인간의 삶에 엄연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굳이 유전적인 질병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는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의 삶, 그 근원에 존재하는 이성, 타인을 사랑하는 그 마음까지 유전자의 행위로 설명하고 싶진 않은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어쩌면 이는 자연과학을 공부한 사람과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건널 수 없는 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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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힘 동문선 현대신서 147
장 보드리야르 지음, 배영달 옮김 / 동문선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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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제전이 될 것이라던 이번 올림픽은 숱한 편파 판정과 오심, 약물 복용 사건으로 얼룩졌으며, 무엇보다도 집시들, 외국인 노동자들을 강제 추방함으로써 얻은 기만적인 평화에 기초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고 있다. 하지만 몇몇 이들은 이를 전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테러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노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올림픽은 전 세계인의 축제 아닌 일부 선택 받은 이들만의 축제가 되어버렸으며, 그렇게 내쫓긴 이들은 테러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 분자로 끊임없는 감시와 처벌의 대상으로 전락했을 따름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테러의 위험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만 하였단 말인가. 과거 냉전이 한참 전개되던 시대에 숱하게 자행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테러들도 이토록 모든 이들을 불안에 휩싸이게 만들진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자유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대립하는 무언가가 사라진 지금, 우리의 불안감은 더욱 극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자유 민주주의 흐름, 그 선두에 서 있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공격 받았던 지난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아니-인정하고 싶진 않으나-전 세계의 경제, 문화적 중심지였던 뉴욕 한 복판에서 자행된 비행기 테러. 장 보드리야르는 이를 하나의 예술로 파악하고 있는 듯해 보인다. (오해는 마시라. 그렇다고 보드리야르가 테러를 극찬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니 말이다.) 그에 따르면 쌍둥이 빌딩은 세계 무역 센터라는 그 기능 못지 않게, 같은 건물이 2개 위치함으로써 지니는 상징적인 의미 역시 컸었다. 그것은 건물 하나로는 완성될 수 없는 전 세계 권력의 독점을 의미했으며, 건물 빼곡히 들어선 유리창에 반사된 빛은 미국적인 것의 위대함을 상징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건물들은 화려함만큼이나 취약한 체제의 중심을 의미했다. 건물이 공격 받았다는 사실은 미국에 대한 반미적인 세력의, 기독교에 대한 이슬람교의 저항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지만,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해석이 사건의 본질을 오히려 망각하게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노라고 평한다. 물론 테러 내에 이러한 요소들도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그에 따르면 이와 같은 테러는 완벽성으로 대표되는 상징의 붕괴를 의도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같은 모양의 건물 양쪽에 연이어 충돌한 비행기 두 대가 이러한 테러의 의도를 정확히 반영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파괴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기존에 완벽한 무언가가 들어서 있던 그곳은 이제 부재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 커다란 부재를 접할 때마다 사람들은 과거의 위대함 못지 않게 테러의 폭력성을 떠올리게 되며, 이는 그들 내에 잠재되어 있던 또 다른 폭력성을 자극하게 된다.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공격에 대해 미국인들이 보여준 무시무시한 지지도는 이러한 현상의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결코 테러를 박멸하는 태도로 옳지 못하다. 오히려 보드리야르는 테러가 자생적인 폭력 아닌, 강대국들에 의해 이식된, 강대국들이 지니고 있는 폭력성이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서양 세계는 분명 제국주의적 질서에 기초, 수많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들 식민지들로부터 갈취한 것들을 기반으로 발전을 이룩하였다. 가지지 못한 이들은 식민지 경험을 통해 지배자의 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 테러라는 형태로 표출되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는 세계화라는 흐름 속에서 어느 사회에서나 엿볼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강대국은 힘의 논리에 기초, 자국의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가치 정의했으며, 그 과정 속에서 약자의 것은 철저히 소외, 탄압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수많은 테러들은 이러한 기제 속에서, 즉, 지배하고자 하는 이의 강압성에 의해 양산되었다. 이렇듯 보드리야르는 강대국의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늘날 전 세계인을 불안으로 몰고 간 테러, 즉 지옥의 힘을 양산했음을 명쾌한 논리 하에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지옥의 힘이라는 단어는 강대국이기에 정당화될 수 있었던 숱한 국가 폭력 역시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합법적으로 성립한 정권을 붕괴시키고, 폭력적으로 자국적 질서를 이식시키는 그 행위 역시 수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더 나아가 테러를 야기시킬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끔찍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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