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과 죄의식 -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
강준만.김환표 지음 / 개마고원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80년대 태생인 나에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그저 평범하게만 느껴지는 곳이었다. 어떻게 말하면 ‘평온하다’고도 할 수 있는 그런 곳. 역사를 알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전쟁이 있었다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일 뿐, 풍요와 번영으로 얼룩진 세상은 직접적인 아픔을 경험하지 않은 나에게 과거와의 연계를 허락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죽어갔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살기 위해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변해왔고 또 변했다. 비록 IMF 이후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곤 있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와 같은 세련되지 못한 억압 기제는 사라졌으니 말이다. 말 한 마디로 인해 소리 소문 없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그런 시대는 지나갔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사회가 완벽한 민주화를 이루었던가를 묻는다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긴 힘들 듯하다. 여전히 우리 안엔 우리 자신을 통제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과거로부터 닦여온, 너무도 세련된 그것에 대해 많은 이들은 부인한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분명 과거의 광기가 존재한다. 자신도 비정규직 노동자이면서 텔레비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투쟁 모습에 혀끝을 차는 그 모습이 지닌 아이러니에 대해 우리는 눈뜨지 못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빨갱이’, ‘공산당’ 등의 말을 쏟아내진 않지만, 우리의 적대적인 감정들은 여전한 것이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 적대감이 누구를 향한 것이며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묻다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시작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보다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이다. 끔찍하다 못해 어처구니없게까지 느껴지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고, 우리들의 삶 그 자체였다.


지난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적을 양산해 내도록 만들었다. 분단된 현실은 독재 권력에게 적지 않은 기회를 제공해주었으니, 안보를 부르짖으며 그들은 자신의 구미에 맞지 않는 인사들을 제멋대로 요리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것은 단순히 경쟁자의 제거 차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정당치 못한 권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폭력이었다. 실체 없는 적을 수없이 양산함으로써 그들은 안팎으로 위기의식을 조성할 수 있었다. 지독히도 불안정한 상황, 제 아무리 독재일지라도, 아니 독재정권이라도 존재하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국가, 그렇기에 실제로 어떠한 사상을 가졌는지, 부역을 했는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영문도 모른 체 죽어간 이들이 불쌍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라도, 아무런 이유가 없을지라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은 우리 안에 자기 통제, 감시의 기제를 낳았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는 현실, 가장 친하다 여겼던 이가 고발자로 돌변할 수도 있는 상황, 의심받지 않기 위해선 보다 잔인해지는 것이 필요했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학생운동을 하는 자녀를 둔 이들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야만 했다. 자진해서 전쟁에 참여하고 내 이웃을 고발하고... 이것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전쟁. 그렇게 우리 안의 광기가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냈고, 결코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월드컵은 대한민국 전역을 붉은 물결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몇몇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레드 콤플렉스의 극복이라 말하기도 했던가. 하지만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 우리 안에는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는 것이 바로 좌파에 대한 것이고 통일에 대한 것이다. 물론 과거와 같이 정권에 의해 직접적으로 강제되진 않고 있지만 보수를 넘어선 극우를 정당화하는 기제는 수도 없이 많다. 현 정권을 좌파 정권이라 규정짓는 몇몇 언론의 태도 속에는 반공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선거철이면 항상 존재하는 색깔 논쟁과, 이에 대응하는 태도 속에도 변형된, 하지만 근본은 동일한 반공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하겠다.


이 상처를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에게 과거를 반복해선 안 됨을 가르치고 있다. 나와 타인을 가르고, 이를 통해 타인을 억압하는 일이 계속되는 속에서 결코 진정한 의미의 평화는 달성될 수 없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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