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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상희 지음 / 엘리 / 2023년 9월
평점 :

교통사고로 오랜 기간 병원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은 남편을 돌봄 하는 과정을 에세이로 써 내려간 책이다. 병원의 중환자실을 떠나지 못하는 저자의 마음이 전해지고, 동의서를 받아서 싸인할 때마다 그 선택의 무게에 짓눌렸던 그 아픔이 되살아났다.
척추결핵으로 병석에 오랫동안 누워있었던 엄마를 나는 지금도 떠나 보낼 수가 없다. 병든 엄마를 두고 결혼을 한 것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오빠와 여동생이 주돌봄자로 힘든 시간을 보냈기에 그때의 죄책감이 나를 누르고 있다. 형제 중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데도 그렇다.
삶을 살아가면서 상실이라는 것 앞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의 크기는 본인만 안다. 상실로 가는 길에 서 있었던 나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의식적으로 기억을 차단했다. 슬픔을 조각내어 여기저기 묻어두고 꺼내보지 않으려 꽁꽁 닫아두었다. 이 책은 그 문을 열고 조각난 내 슬픔을 꺼내어 바라보게 한다. 저자의 말들이 유리처럼 날카롭게 날아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서 슬픔을 받아들이고 슬픔에 잠긴 나로도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음을 배워 본다. 오랜만에 동생과 두런두런 엄마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저자가 혼자 감당했을 그 두려움을 감히 헤아려 본다. 그 두려움마저도 사랑이라는 말로 감싸 안는 모습에서 결국 눈물이 났다. 이 얇은 책은 쉽게 읽어지지 않는다. 읽다가 덮어두고 또다시 읽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글을 읽고 또 곱씹어 보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나를 잃지 않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을 책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이다.
내가 지키고자 애썼던 모든 것들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부서진 유리 피편처럼 나뒹굴었다. (p.17)
중환자실 앞은 그런 곳이니까. 머뭇거리게 되는 곳. 다섯 걸음을 갔다 여섯 걸음을 되돌아오는 곳. (p.22)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다가오는 중이었다. 삶이 이어지는 일, 삶이 끊어지는 일, 삶이 어찌 될지 몰라 마냥 기다려야 하는 일이 모두 한순간에 존재했다. (p.29)
삶에게 좀 더 웃어줘야 했다. 그리고 알았다. 나와 가장 가까운 당신을, 나는 나를 대하듯 해왔다는 것을. 조금만 더 참으라고, 다음번에 해주겠다고, 이번만 견디라고. 그런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왔다. 그게 너무 미안했다. 당신이 살아난다면, 나는 꼭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p.40)
모든 걸 다 삼키고 나서야 슬픔은 멎는다. 아니, 슬픔은 기꺼이 그 모든 것들을 녹여내 삶의 이야기를 담은 뭔가를 만들어낸다. 우리 가슴속에만 사는 어떤 것, 그 실체를 다 알 수 없는 어떤 것, 기다릴 수만 있다면 슬픔은 멈추거나 사라지지 않으면서 슬픔에 잠긴 이들을 살려낸다. 아, 슬픔은 영혼을 만든다. (p.62)
병원에 있는 동안 나는 돌보는 사람이 완전히 ‘소진’되어야만 돌봄이 완성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그 분위기에 휩쓸려 내가 좀 더 노력해야 한다, 내가 좀 더 희생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도 했다. (p.112)
만약 ‘인간이 소중한 것을 잃고 어떻게 살아가느냐’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이 ‘적응’이나 ‘극복’일 수는 없다는 걸 우리는 매일 배워가는 중이다. (p.170)
우리는 자주, 무탈한 삶을 바라고, 아무데도 부딪히지 않는 순탄한 인생을 기대한다. 뭐든 잘 해결되기를, 아무 장애물 없이 해나갈 수 있기를. 나는 나의 삶을 되돌아본다. 정말 그런가.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어떤 장애물도 없는 삶이 정말 좋을까. (중략)
부딪히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p.201)
보호하며 지켜보는 일, 놓아주며 지켜보는 일. 어쩌면 그게 돌봄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건 마치 사랑하는 일 같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가장 마지막 모습은 끝내 상대를 자유롭게 해주는 일일 거라고 생각한 날이 있었다. 그가 그의 뜻대로 행복하기를. 그가 그의 방식대로 살아가기를. 나 역시 나의 뜻대로 행복하고 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상대에게 ‘깨진 그대로 와서 편하게 있어요’하고 말해줄 수 있기를. (p.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