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사생아들 : 레프 톨스토이 x 오귀스트 르누아르 세계문화전집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홍선기 엮음 / 모티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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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가나 화가의 작품을 좋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삶까지 궁금해진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던 톨스토이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을 따뜻한 색으로 그려낸 르누아르

작품만 놓고 보면 두 사람 모두 인간을 깊이 바라보고 사랑했던 예술가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거장의 사생아들』을 읽으면서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작품으로 알고 있던 ‘거장’의 모습과 실제 삶을 살았던 한 인간의 모습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간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에게는 젊은 시절 농민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아들 티모페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아들을 자신의 가족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티모페이는 훗날 톨스토이의 적자들을 태우는 마부로 살아갔다.

르누아르에게도 젊은 시절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리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잔이 있었다.

르누아르는 딸에게 생활비를 보내고 편지를 전했지만 공개적으로 자신의 딸이라고 밝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평생 수많은 여성과 아이들을 그렸던 그의 그림 속에서도 정작 잔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도덕을 이야기했던 톨스토이는 자기 아들을 온전히 품지 못했고,

행복한 가족과 아이들을 누구보다 아름답게 그렸던 르누아르는 자신의 딸을 화폭 밖에 두었다.

두 사람의 작품 속 세계와 실제 삶을 나란히 놓고 보니,

예술가가 작품에서 이야기한 가치와 그 사람이 현실에서 살아낸 삶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거장의 숨겨진 사생활을 들려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작품을 통해 만들어온 거장의 이미지 너머로 모순과 결핍을 안고 살아간 한 인간의 모습을 함께 바라보게 한다.

작품을 사랑하는 것과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좋은 작품을 만든 사람은 반드시 좋은 사람이어야 할까?

예술가의 삶과 작품은 어디까지 함께 바라봐야 할까?

책을 읽다 보니 톨스토이와 르누아르에게는 분명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평생 사람을 바라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바라보는 방향이 완전히 달랐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마음속으로 계속 들어갔다.

사람이 왜 욕망에 흔들리는지, 무엇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지,

돈과 신분은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지, 죽음을 앞두면 무엇이 남는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반대로 르누아르는 눈앞에 펼쳐진 삶을 바라봤다.

햇빛 아래 앉아 있는 사람, 춤추는 연인, 아이들의 발그레한 얼굴, 함께 식사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같은 인간을 바라보면서도 톨스토이는 사람의 내면으로 향했고, 르누아르는 사람을 둘러싼 삶의 순간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두 사람이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됐다.

내게 톨스토이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르누아르는 ‘창문’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거울은 나를 보여준다. 보고 싶은 모습뿐 아니라 감추고 싶은 모습까지 보여준다.

반면 창문은 나의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준다. 내 마음속에만 갇혀 있던 시선을 햇빛과 사람, 풍경과 일상으로 옮겨준다.

톨스토이는 거울을 통해 인간이 외면하고 싶은 모습을 들여다봤고, 르누아르는 창문을 통해 인간이 놓치기 쉬운 아름다운 순간을 바라봤다.

한 사람은 인간의 어둠을 오래 바라봤고, 한 사람은 인간의 밝음을 오래 바라봤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이 평생 바라본 대상은 같았다.

인간이었다.

이 차이는 책에 실린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주인과 일꾼』에는 부유한 상인 바실리 안드레이치와 그의 일꾼 니키타가 등장한다.

바실리는 좋은 조건으로 땅을 사기 위해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에도 길을 나선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다 두 사람은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죽음의 위기에 놓인다.

처음의 바실리는 자신부터 살아남으려고 한다.

니키타를 남겨두고 혼자 빠져나가지만 눈보라 속에서 계속 길을 헤매다 결국 다시 그가 있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죽어가는 니키타를 발견한다.

그 순간 바실리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한다.

자신의 몸으로 니키타를 덮어 체온을 나눠준다.

평생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

나는 이 장면이 오래 남았다.

죽음 앞에서는 돈도, 소유도, 주인과 일꾼이라는 위치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결국 남는 것은 한 인간과 또 다른 인간이다.

평생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던 바실리가 마지막 순간에 경험하는 것은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자신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다.

어쩌면 톨스토이가 말하고 싶었던 구원도 거창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만 살면 된다’는 마음에서 벗어나는 순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톨스토이 자신의 삶이 떠오른다.

작품에서는 사랑과 희생을 이야기했지만 현실에서는 자신의 아들을 품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 모순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람은 자신이 완벽하게 해낸 것만 글로 쓰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지 못했던 것, 후회했던 것,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끝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글 속에서 반복해서 묻기도 한다.

사람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답보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질문에 더 오래 매달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톨스토이의 작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사랑과 구원, 욕망과 절제에 대한 질문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가 누구보다 도덕적으로 완벽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 역시 그렇게 살아내기 어려웠기 때문에 평생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또 물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의 문학은 완성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답을 찾지 못한 한 인간이 평생 써 내려간 질문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악마』에서는 그런 톨스토이의 내면이 훨씬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젊은 지주 예브게니는 결혼 전에 한 농촌 여성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다.

결혼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뒤에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그 여자를 보는 순간 과거의 욕망이 되살아난다.

자신에게 좋은 아내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잘못된 선택 하나가 현재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것과 욕망을 통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 부분은 생각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많은 잘못은 무엇이 옳은지를 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옳고 그름을 아는 것과 실제로 옳은 선택을 하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긴 거리가 있다.

그래서 읽다 보니 제목의 ‘악마’가 바깥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계속 그쪽으로 마음이 끌리는 것. 인간 안에서 스스로도 통제하기 힘든 욕망 자체가 악마처럼 느껴졌다.

톨스토이 역시 젊은 시절 자신의 욕망과 성적 경험, 그로 인한 죄책감을 오랫동안 기록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악마』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멀리서 관찰하며 쓴 작품이라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꺼내놓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그래서 다시 ‘거울’이라는 생각으로 돌아오게 된다.

거울은 우리가 원하는 모습만 보여주지 않는다. 외면하고 싶은 모습도 그대로 비춘다.

톨스토이에게 글쓰기는 자신을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가능하면 외면하고 싶은 자기 모습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는 욕망이 질투로 이어진다.

아내가 한 바이올리니스트와 베토벤의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함께 연주한 뒤 남편의 의심과 질투는 점점 커지고 결국 비극으로 향한다.

이 작품을 읽으며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톨스토이와 음악의 관계였다.

그는 음악을 무척 사랑했다.

차이콥스키의 《현악 사중주 1번》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쇼팽을 들을 때면 자신이 직접 그 음악을 작곡한 것처럼 느낀다고 할 만큼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면서도 음악이 인간의 감정을 순식간에 움직이는 힘을 두려워했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음악 한 곡을 듣다가 오래전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았던 마음이 갑자기 흔들리기도 한다.

음악은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음을 움직인다.

톨스토이가 두려워했던 것도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아니었을까.

이성이 준비되기도 전에 감정이 먼저 움직여버리는 순간 말이다.

그래서 책 앞부분에 소개된 클래식 여덟 곡도 흥미로웠다.

쿠프랭,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구노, 차이콥스키, 바그너.

단순히 책을 읽을 때 틀어놓는 배경음악이 아니라 실제 두 거장의 삶과 연결된 음악들이다.

르누아르 역시 어린 시절 노래에 재능이 있어 작곡가 샤를 구노와 인연을 맺었고,

조금만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화가가 아닌 음악가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특히 바그너를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정말 재미있다.

르누아르는 바그너를 동경해 직접 찾아가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반면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바그너의 예술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같은 음악가 앞에서 한 사람은 붓을 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펜을 들었다.

짧은 일화지만 두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르누아르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오래 바라보고 남기려 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끝까지 질문했다.

그리고 책에 실린 르누아르의 그림을 넘기다 보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으며 한참 인간의 욕망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만나면 정말 창문 하나를 활짝 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발그레한 볼, 부드러운 피부, 아이와 여성, 꽃과 햇빛.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욕망과 죄책감, 죽음 같은 무거운 문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웃고, 햇볕을 쬐고,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는 평범한 행복도 존재한다.

톨스토이가 ‘인간은 왜 이렇게 괴로운가’를 묻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면,

르누아르는 ‘그래도 삶에는 이런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딸 잔의 존재를 알고 난 뒤 그의 그림을 다시 보면 그 밝음마저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톨스토이가 자기 삶의 어두운 부분까지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면,

르누아르는 어쩌면 자신의 어두운 부분은 화면 밖에 두고 자신이 사랑하고 싶었던 세계를 오래 그렸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어느 쪽이 더 솔직하고 어느 쪽이 더 옳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두 가지 방식으로 살아간다.

힘든 일이 생기면 그것을 끝까지 들여다보며 해결하려고 할 때도 있고,

어떤 날에는 잠시 그 문제에서 눈을 돌려 산책을 하거나 좋은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사람이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모두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톨스토이의 거울과 르누아르의 창문이라는 이미지가 더 마음에 남는다.

거울만 보고 있으면 자기 안에 갇힐 수 있고, 창밖만 바라보면 자신의 문제를 외면할 수도 있다.

때로는 거울 앞에 서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솔직하게 바라봐야 하고, 때로는 창문을 열어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세상의 좋은 것들을 다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묘하게도 톨스토이의 아들 티모페이와 르누아르의 딸 잔은 같은 해인 1934년 세상을 떠났다.

거장들의 이름은 지금도 수없이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두 사람의 삶은 오랫동안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강렬한 제목이라고만 생각했던 『거장의 사생아들』이라는 말도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조금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톨스토이를 덜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하게 된 것도 아니고, 르누아르의 그림이 덜 아름답게 느껴진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그들도 우리처럼 욕망하고 실수하고 모순을 안고 살아간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작품을 이전보다 조금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거장의 작품을 보면 그 결과물만 보았다면,

이제는 그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질문과 모순을 품고 살아갔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위대한 작품은 완벽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끝내 해결하지 못한 질문을 오래 붙들고 살아간 사람이 남긴 흔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예술의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완벽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자신의 부족함과 모순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이해하려 했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 흔적을 수십 년, 수백 년 뒤의 우리가 다시 읽고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의 삶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래서 좋은 예술은 정답을 남기기보다 오래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을 남기는지도 모르겠다~!

톨스토이는 거울을 보며 인간의 안쪽을 들여다봤고, 르누아르는 창문을 열어 삶의 아름다운 순간을 바라봤다.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둘 다 필요하다.

내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할 때도 있고, 너무 내 안에만 갇혀 있지 말고 고개를 들어 바깥을 바라봐야 할 때도 있다.

문학과 미술, 음악을 함께 따라간 책인데 마지막에는 이상하게도 두 거장보다 내 삶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나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지금 내 곁을 지나가고 있는 좋은 순간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어둠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밝은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잘 살아간다는 것은 그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거울을 들여다봐야 할 때와 창문을 열어야 할 때를 아는 것.

『거장의 사생아들』을 읽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생각이었다.

'단단한맘킴히 서평단'을 통해 '모티브 출판사'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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