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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9 - 박경리 대하소설, 5부 4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평점 :

광복을 불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일제강점기 말기,
일본의 패색은 짙어지고 있지만 조선 사람들의 삶은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학병과 징용, 식량난과 사상 탄압이 일상이 된 시대다.
자유는 물론이고 내일을 기대할 마음마저 빼앗긴 사람들은 살아 있다는 느낌조차 잃어간다.
이 책에서 가장 무섭게 다가온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젊은이들이 거리와 일터, 집 마당에서 끌려가고, 가족은 기약 없는 이별을 맞는다.
그럼에도 울음과 한숨은 점차 들리지 않는다.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반복된 나머지 고통에 반응할 힘마저 없어진 것이다.
“체념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의식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다.”
체념은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고 있을 때 가능한 감정이다.
그러나 폭력이 일상이 되고 굶주림과 이별이 풍경처럼 반복되면 사람은 생각하는 일부터 멈추게 된다.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원인과 결과를 따질 힘도 없이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린다.
억압의 가장 무서운 결과는 사람을 굴복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있다.
사람들이 침묵하는 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평온한 사회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너무 많은 사람이 말할 힘을 잃고, 서로의 고통을 돌아볼 여유마저 빼앗긴 사회일 수 있다. 거리의 고요함이 평화를 뜻하지 않듯, 국민의 침묵 역시 동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 침묵은 두려움이고 체념이며,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닫아버린 결과다.
식량난을 그린 장면에서도 전쟁의 참혹함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밥 한 술과 술 한 잔을 나눌 여유가 사라지고, 냉수 한 그릇을 떠놓고 혼례를 치르는 일이 예사가 된다.
장례식에서도 조문객을 대접할 수 없고, 징용으로 끌려가는 아들과 남편에게 주먹밥을 싸주고 나면 남은 가족은 푸성귀가 든 죽으로 끼니를 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내일 닥칠 불행보다 오늘 먹을 한 끼를 먼저 걱정한다.
배급받은 식량의 절반을 팔아 다음 배급을 받을 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은 가난이 단순히 먹을 것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난은 사람에게 미래를 생각할 여유를 빼앗는다. 생존에 모든 힘을 써야 하는 사람에게 정의와 희망,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일은 사치처럼 느껴질 수 있다.
결국 전쟁은 사람의 목숨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인심과 마음의 여백까지 말려버린다.
먹을 것이 없으니 밥을 나누기 어렵고,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타인의 슬픔을 오래 들여다볼 수도 없다.
극심한 가난이 무서운 까닭은 사람을 굶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서로를 돌볼 힘까지 빼앗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누군가에게 한 술의 밥을 건네고, 아픈 사람을 보살피는 행위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다.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저항이다.
서희의 삶에도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있다. 길상은 형무소에 갇혀 있고, 출옥할 날짜조차 알 수 없다.
예전에는 정해진 형기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일본의 패배가 가까워지는 것은 희망이지만, 궁지에 몰린 권력이 어떤 잔혹한 선택을 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또 다른 공포가 된다.
전쟁에서 패배해가는 권력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키운다.
희망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그 희망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은 사람을 더욱 지치게 한다.
기다림은 끝을 알 때보다 끝을 전혀 알 수 없을 때 훨씬 잔인하다.
둘째 아들 윤국마저 학병으로 떠나면서 서희 곁의 사람들은 하나씩 사라진다.
환국 역시 아버지와 동생, 양현이 모두 곁을 떠난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자신의 두려움을 털어놓지 못한다.
가족이 있어도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면 인간은 고립될 수밖에 없다.
『토지 19』는 가족을 단순히 혈연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서로의 불안을 알아보고 마음을 받아주는 관계가 있을 때 비로소 가족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집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서로의 마음을 아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사이라도 고통을 말하지 못하면 사람은 고립된다.
반대로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상대의 두려움을 알아보고 곁을 지켜준다면 그 관계는 가족보다 더 깊어질 수 있다.
성환이 학병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성환할매가 눈이 멀어버리는 장면도 가슴을 무겁게 한다.
“자식이란 무엇일꼬? 애간장을 녹이는 것이 자식이다.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부모 자식은 맺어진 걸까?”
자식은 부모에게 기쁨인 동시에 평생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존재다.
아무렇게나 굴러도 좋으니 목숨만 길게 이어가라는 어머니의 마음 앞에서는 성공도 명예도 중요하지 않다.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마음, 그것이 전쟁을 견뎌야 했던 수많은 부모의 유일한 기도였을 것이다.
전쟁은 군복을 입고 떠나는 한 사람만 희생시키지 않는다.
그를 기다리는 부모와 형제, 아내와 자식의 시간까지 함께 빼앗는다.
전쟁터에 끌려간 사람은 몸으로 전쟁을 겪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끝없는 상상과 기다림으로 또 다른 전쟁을 치른다.
“원수는 세월이 갚고 남이 갚아준다”는 말도 오래 남는다.
이 말은 무조건 참고 살라는 뜻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의 지혜였을 것이다.
당장 맞서 싸울 힘이 없을 때 분노에 자신을 모두 태워버리는 대신 살아남아 시간을 견디는 것, 그것 역시 하나의 저항일 수 있다.
다만 세월이 모든 잘못을 저절로 바로잡아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기억하고 말하며 기록해야 비로소 시간은 심판의 힘을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토지』라는 작품 자체가 한 시대의 폭력을 잊지 않게 만드는 거대한 기억이라 할 수 있겠다.
역사는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은 고통은 쉽게 지워지고, 말하지 않은 진실은 힘 있는 자의 이야기로 대체되기 쉽다.
박경리가 수많은 사람의 삶과 사투리, 굶주림과 이별을 문장으로 남긴 것은 사라질 뻔한 사람들의 시간을 되찾아주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는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말이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어느새 사실처럼 굳어지는 모습도 나온다.
처음에는 추측에 불과했던 이야기가 반복될수록 진실의 얼굴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소문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사람의 평판과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
특히 불안이 가득한 시대에는 사람들이 사실을 차분히 확인하기보다 자신의 두려움에 맞는 이야기를 더 쉽게 믿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낙인은 때로 총칼보다 오래 남는다.
박경리는 국가의 폭력뿐 아니라 일상 속 언어가 만들어내는 폭력도 놓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무심코 옮긴 말이 다른 사람의 삶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양현과 영광의 사랑은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인간의 마음이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하지만, 사랑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잃을 것에 대한 불안도 커진다.
“진정 크나큰 환희는 슬픔인지 모른다.”
행복이 클수록 그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함께 자란다.
사랑은 삶을 완성해주는 감정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가장 연약하게 만드는 감정이다.
전쟁 한가운데서도 함께 있다면 헤어져 서로를 찾는 것보다는 행복할 것이라는 두 사람의 대화는 사랑의 본질을 단순하면서도 절실하게 보여준다.
고난 자체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 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이다.
양현과 영광의 관계에는 출생과 신분, 가족의 역사도 얽혀 있다.
양현은 영광의 따뜻함을 알아가지만, 동시에 그 행복을 잃게 될까 두려워한다. 영광 역시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두 사람의 사랑이 애틋한 이유는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랑하는 순간에도 자신의 과거와 신분, 가족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상대가 짊어진 상처와 삶의 무게까지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묻는다.
영광이 어린 시절 모아두었던 책과 습작 노트를 다시 발견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는 책을 한 권씩 사 모으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 품었던 오기가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반드시 거창한 신념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의 꿈, 누군가 건넨 작은 돈, 어렵게 사 모은 책 한 권처럼 사소해 보이는 기억이 한 사람을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주기도 한다.
삶이 흔들릴 때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이유를 미래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했는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잊고 있던 노트와 책은 영광에게 과거의 물건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였을 것이다.
오가타와 쇼지, 조찬하의 여행은 혈연과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쇼지는 오가타와 유인실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조찬하 부부의 사랑 속에서 자란다.
생물학적 아버지인 오가타는 쇼지가 찬하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며 그를 부러워한다.
아이에게 진짜 부모는 단지 피를 물려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곁을 지켜주고 안심할 수 있는 세계가 되어준 사람일지도 모른다.
오가타에게 쇼지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들이지만, 쇼지의 삶에서 아버지의 자리를 만들어온 사람은 찬하다.
이 장면은 피가 관계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어도, 관계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함께 보낸 시간과 책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출생의 진실만이 아니라 자신이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벽은 사람을 가두어 두는 억압적 존재이기도 하고 사람을 보호하고 의지하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도 벽과 비슷하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족을 이루는 일은 때로 책임과 의무라는 울타리 안에 자신을 가두는 일이 된다.
그러나 바로 그 울타리 덕분에 우리는 차가운 세상에서 몸을 녹이고 안심할 수 있다.
인간은 완전한 자유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을 조금 구속하더라도 기꺼이 돌아가고 싶은 벽, 즉 관계와 공동체가 필요하다.
벽이 전혀 없는 집은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라 머물 수 없는 공간이다.
사람에게도 자신을 지켜주는 일정한 경계와 책임, 돌아갈 관계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벽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 벽이 사람을 가두는 벽인지 지켜주는 벽인지에 있다.
일본인 오가타와 유키코를 통해서는 한 국가의 잘못과 개인의 양심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도 보여준다.
오가타는 남경학살과 조선 여성들에게 가해진 참상을 떠올리며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분노한다.
유키코 역시 전쟁을 일으키고 진실을 감춘 일본 군부를 비판한다.
일본 정부는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축소해 발표하고, 비판적인 언론인과 지식인을 탄압하며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국민의 부엌과 쓰레기통까지 살피면서 절약을 요구하지만, 정작 전쟁을 일으킨 책임과 잘못된 판단은 감춘다.
사소한 생활을 통제하는 모습은 국가가 국민을 얼마나 세밀하게 감시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권력은 자신이 만든 실패를 인정하는 대신 국민의 절약과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책임을 돌린다.
국가가 진실을 감추고 비판하는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 전쟁은 바깥의 적과 싸우는 일을 넘어 내부의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박경리는 모든 일본인을 하나의 얼굴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국가가 광기에 빠졌을 때에도 자신의 나라가 저지른 잘못을 직시하며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이는 개인에게 조국을 무조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책임을 묻는다.
진정한 애국은 국가의 잘못을 감추고 두둔하는 태도가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국가를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태도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의 집단이 저지른 폭력을 외면하지 않는 양심은 그 시대에도, 지금도 귀하다.
자신이 속한 나라와 집단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배신이 아니다. 오히려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막는 가장 책임 있는 태도일 수 있다.
국가와 국민을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일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작품 속 예술인과 지식인들의 모습도 많은 생각을 남긴다.
권오송은 한때 주변 사람들에게 변절자라는 의심을 받았지만, 정작 전쟁을 찬양하고 징병을 독려하는 극본을 쓰라는 요구를 거부해 감옥에 갇힌다.
반대로 그를 손가락질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세가 험악해지자 일본 권력에 협력한다.
어제의 애국자가 오늘의 변절자가 되고, 변절자로 몰렸던 사람이 끝내 신념을 지키는 모순된 현실이다.
인간의 진실은 평온할 때의 말보다 위기 앞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통해 드러난다.
누군가를 평가할 때 한때의 소문과 겉모습만으로 쉽게 결론 내려서는 안 되는 이유다.
시대가 혼란스러울수록 사람은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더 쉽게 낙인을 찍기도 한다.
음악가 나일성의 태도를 통해서는 예술과 현실의 관계도 드러난다.
그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살며 자신이 가진 음악적 재능과 자신이 하는 음악까지 경멸한다.
그러나 악기와 목소리 자체에는 죄가 없다. 문제는 예술이 어떤 권력과 목적을 위해 사용되느냐에 있다.
전쟁을 찬양하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선전에 이용될 때 예술은 폭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말할 수 없는 시대의 슬픔을 기록하고 인간의 마음을 지켜낼 때 예술은 저항과 위로가 된다.
『토지』 역시 역사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시대에 짓눌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문학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는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자유가 저당 잡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집도 가족도 없는 거지는 자유인이라는 주장에 다른 인물은 실제로 그런 처지가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반박한다.
이 대화는 자유를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경계하게 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는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일 수 있지만, 동시에 선택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빈곤일 수도 있다.
자유는 단순히 가진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굶주린 사람에게 내일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말은 자유가 아니라 막막함일 수 있다.
가진 것이 많아 생기는 구속도 있지만, 가진 것이 없어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구속도 있다.
진정한 자유는 모든 관계와 책임을 버리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이 감당할 관계와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데 있다.
배설자의 죽음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도 단순한 복수의 통쾌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배설자는 일본 경찰에 협력하며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와 공포를 남긴 인물이다.
그런 그가 소나무에 묶인 채 죽음을 맞지만, 누가 왜 그를 죽였는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강선혜는 배설자로 인해 오랫동안 불안과 고통을 겪었고, 그의 죽음 이후에도 마음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여옥은 자신 역시 누군가를 미워하며 벌을 바랐지만, 어느 순간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벌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가해자의 죽음이 피해자의 상처를 곧바로 낫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복수는 사건을 끝낼 수 있어도 기억과 공포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토지 19』는 악인이 벌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면서도 그것만으로 정의가 완성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죄를 기억하고 책임을 묻는 일은 필요하지만, 증오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질문을 남긴다.
홍과 보연의 딸 상의가 학교에서 부당한 대우에 맞서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평소 조용히 지내던 상의는 학생들을 함부로 대하는 교사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밝힌다.
전쟁과 식민지 교육은 학생들에게 질문하지 말고 명령에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신사참배와 군사훈련, 근로 동원은 학교를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국가가 원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바꾸어놓는다.
그 안에서 상의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행위는 작아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힘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일상의 부당함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연습에서 시작된다.
상의의 용기는 어른들이 체념한 시대에도 다음 세대의 정신까지 완전히 길들일 수는 없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어두운 시대에도 학생들은 웃고 장난치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들의 해맑음은 현실을 모르는 철없음이 아니라 폭력적인 시대가 끝내 빼앗지 못한 생명력처럼 느껴진다.
『토지 19』에서 광복은 가까워지고 있지만 인물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독자는 곧 역사의 전환점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이들의 절망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가장 어두운 순간을 지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새벽 가까이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그래서 희망은 언제나 확신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희망을 믿을 힘조차 없을 때에도 오늘을 견디고, 아이를 돌보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책 한 권을 다시 펼치는 행동 속에 희망은 이미 존재한다.
누군가는 미래가 없으니 오직 오늘만 생각하며 살면 마음이 편하다고 말한다.
그 말에는 체념과 생존의 지혜가 함께 담겨 있다. 미래를 계획할 수 없는 시대에는 하루를 버티는 일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된다.
그러나 오늘만을 살아야 하는 삶이 진정으로 홀가분한 것은 아니다.
내일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는 인간에게서 꿈과 선택의 가능성을 빼앗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늘의 밥으로 목숨을 이어가지만,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 삶을 계속할 수 있다.
“사람이 어찌 무병으로 살 수 있겠소? 아플 때도 있고, 고개를 넘어 또 넘어도 사람 사는 것이 안 그렇소.”
삶은 하나의 고개를 넘으면 끝나는 길이 아니다. 고개를 넘은 뒤 또 다른 고개가 나타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픈 이를 돌보고, 떠난 이를 기다리며 서로에게 밥 한 술과 마음 한 조각을 내어준다.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일이 아니라, 아픔이 찾아올 때마다 서로를 돌보며 다시 고개를 넘는 일인지도 모른다.
『토지 19』는 거대한 역사를 기록하면서도 역사의 진짜 얼굴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은 멀리 떨어진 전쟁터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헤어지게 하며 평범한 가족의 끼니마저 빼앗는 일이다.
또한 학교의 수업을 바꾸고, 예술가의 문장을 검열하며 사람들 사이에 의심과 소문을 퍼뜨린다.
전쟁은 전선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생각과 언어, 관계와 기억을 차지하려는 순간 일상 전체가 전쟁터가 된다.
그런 세상에서도 인간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마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살아간다는 작품 속 문장처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 나를 사람답게 바라봐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인간을 끝까지 살아 있게 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그 사람만 살리는 것이 아니다. 돌보는 사람 자신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게 한다.
폭력적인 시대가 사람들을 서로 의심하고 외면하게 만들 때 타인의 곁을 지키는 행동은 시대의 명령을 거스르는 일이 된다.
『토지 19』가 전하는 가장 깊은 메시지는 결국 이것이라 생각한다.
역사가 인간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갈 수는 있어도 서로를 기억하고 지키려는 마음까지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절망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는 일이 아니다.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며 사랑과 양심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일이다.
광복을 한 권 앞둔 이 책은 희망을 크게 외치지 않는다.
대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밥을 짓고, 자식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나서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소문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사람, 잘못된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 자신의 조국이 저지른 죄를 부끄러워하는 사람, 교사의 부당함 앞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하는 학생도 보여준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반드시 거대한 영웅만이 아니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역사의 방향을 조금씩 바꾼다.
어쩌면 희망은 밝은 미래를 확신하는 마음이 아니라 미래를 믿지 못하면서도 오늘 해야 할 일을 계속하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새벽이 온다고 장담해주지 않는 밤에도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고, 사랑하며,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토지 19』가 보여주는 가장 끈질긴 생명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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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살아간다는 작품 속 문장처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도감, 나를 사람답게 바라봐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인간을 끝까지 살아 있게 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그 사람만 살리는 것이 아니다. 돌보는 사람 자신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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