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시인이 그리고 쓴 느지감치 그림일기 - 2026 충남문화관광재단 선정작
김병호 지음 / 세종마루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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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익숙한 일에 머무르는 것이 편하고, 서툰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점점 부담스러워진다.

하지만 『동네 시인이 그리고 쓴 느지감치 그림일기』를 읽다 보면 늦었다는 말이 꼭 포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더 오래 즐길 수 있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50대 중반을 지나던 글쟁이가 코로나 시기에 동네 문화강좌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탄생한 그림 에세이다. 저자는 그림일기를 매일 성실하게 쓰겠다고 다짐하지 않는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핑계 삼아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고,

일기라는 이름을 붙여두면 그림을 조금 덜 미루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을 뿐이다.


그림을 배우게 된 계기도 거창하지 않다. 팬데믹으로 수강생이 줄어든 화가 친구의 문화강좌에 “나라도 나가지, 뭐” 하는 마음으로 등록한다. 두 달 동안 4B연필을 쥐고 씨름한 뒤에야 수채화로 넘어가고, 어렵게 완성한 첫 그림을 바라보며 혼자 뿌듯해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도화지 한 장을 꽉 채워보는 일도 좋은 경험”이라는 짧은 말을 남긴다.

정성을 쏟아 완성한 그림인데 그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인지, 저자는 속으로 아쉬워한다.


이 책은 자신의 어설픈 순간을 숨기지 않는다.

혼자 애써 그리던 그림을 선생님이 고쳐주기도 하고, 머릿속으로 생각한 모습과 실제 그림이 달라 속상해하기도 한다. 저자는 자신의 부족함까지 농담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은 그림 실력이 빠르게 늘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서툴러도 계속 그리면서 조금씩 자기 그림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그림을 시작한 뒤 저자는 동네를 더 자주 걷는다.

무거운 카메라를 메고 골목과 논길을 돌아다니며 그림의 소재를 찾는다.

사진을 그대로 옮기기보다 불필요한 것은 지우고, 없던 것은 더하고, 색도 마음대로 바꾼다.

동네 고등학생들이 다니는 논길을 그리면서는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고, 그 길에서 학창 시절의 흡연과 폭력적인 학교문화까지 떠올린다.

그림 한 장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자꾸 옆길로 새지만, 그 옆길이야말로 이 책의 진짜 재미다.

굴다리를 그리다가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동네 풍경을 그리다가 설날 아침에 마주친 육상선수를 생각하며, 힘겹게 운동하는 자신을 손오공과 팔계, 대왕달팽이에 빗댄다.

저자의 시선은 조금 삐딱하고 능청스럽지만 그 안에는 지나온 시간과 주변 사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따뜻함이 있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선생님이 그림의 어두운 부분을 손보자 밝은 색이 더 선명해지는 장면이었다. 저자는 어둠을 잘 다뤄야 밝은 부분이 더 밝아지듯, 현실에서도 어두운 부분을 잘 만져야 삶의 명도가 높아질지 모른다고 말한다. 삶의 어둠은 무조건 지워야 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바라보고 다룰 때 오히려 밝은 순간을 더 또렷하게 만들어주는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 도시〉에 담긴 이야기도 인상 깊었다.

저자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인간의 아주 오래된 본능이라고 말한다.

언어가 생기기 전부터 사람들은 동굴 벽화에 소와 말, 고래와 사람, 별을 그렸다.

그 안에는 먹고사는 일과 사랑, 두려움과 꿈이 담겨 있었다.

그림은 자신의 삶을 남기고 다른 사람과 이어지기 위한 오래된 소통 방식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특히 그림 속 ‘상징’에 주목한다. 동그라미 하나도 숫자 0이 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연인의 얼굴이고, 밥그릇이며, 보름달일 수 있다. 같은 모양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떠올리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상징은 정답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보는 사람의 기억과 감정이 더해질수록 의미가 계속 달라진다.


비 오는 날의 도시도 마찬가지다. 빗방울을 통과한 풍경은 휘어지고, 색은 번지고, 도시의 불빛은 평소보다 더 강하고 낯설게 보인다. 저자는 이를 칸딘스키적인 미학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하면서도, 사실은 아마추어로서 부족한 부분을 감추기 위한 꼼수일 수도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 솔직함이 오히려 재미있다.

하지만 나는 이 그림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도 비 오는 창밖 풍경과 비슷하지 않을까?

같은 장면을 보고도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어느 순간 흐려지고 휘어진다.

결국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통과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예술은 현실을 정확히 복사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보인 세계를 자기 방식으로 다시 보여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저자가 말하는 예술은 경건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술은 노는 일이며, 말려도 하고 싶은 일이고,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그 안에서 마음껏 움직이는 일이다.

그림도 시도 음악도 잠시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놀이이며, 슬픔조차 그 안에서는 표현의 한 부분이 된다. 그래서 거실 벽을 보수하라는 아내의 잔소리에 잔머리를 굴리다가 벽 전체를 하나의 그림처럼 바꾸어버리는 엉뚱한 장면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작품은 〈바람의 고향을 주제로 한 변주곡〉이었다.

시인 주우1이 등단 30년을 기념해 기획한 전시에서 시는 시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영상은 영상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하나의 시를 표현하는 자리였다.

저자는 그 가운데 시 「바람의 고향」을 주제로 그림 한 점을 맡는다.

시 내용을 그대로 옮긴 삽화가 아니라 시를 자신의 시선으로 다시 해석한 작품이었다.


그림 왼쪽에는 한 사람이 힘겹게 똥을 싸고 있다.

이를 본 아내는 남의 중요한 행사에 걸 그림에 왜 똥을 그리느냐며 타박하지만,

저자는 “예술은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며 그림을 지킨다.

작품 속 인물은 오랫동안 묵힌 것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꺼낸다.

그렇게 나온 똥은 책이 되고, 책은 바람을 만든다.

오른쪽의 위아래가 뒤집힌 세상에서는 그 바람에 놀란 존재들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뒤돌아본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며 ‘바람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서 똥은 단순한 배설물이 아니라 작가 안에 오랫동안 쌓여 있던 생각과 경험, 고민과 감정, 그리고 창작의 시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을 힘겹게 밖으로 꺼내면 책이 되고 그림이 되고 한 편의 작품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작품은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고 익숙하게 보던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바람이 된다.

뒤집힌 세계와 뒤돌아보는 존재들은 예술이 익숙한 현실을 낯설게 보여주는 힘을 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순간, 바람은 비로소 마음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림 속에 숨겨진 마릴린 먼로 역시 오래 바라볼수록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는 예술의 성질을 보여주는 것 같다. 왼쪽 아래의 ‘670달러, 가격 흥정 없음’이라는 문구에는 창작에 들인 시간과 마음은 쉽게 흥정할 수 없다는 유쾌한 자존심도 담겨 있는 듯하다.


물론 이런 해석이 작가가 정해둔 하나의 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묘한 매력이다. 처음에는 장난스럽고 조금 삐딱하게 보이는 그림이지만,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지 생각하다 보면 의외로 깊은 이야기와 만나게 된다. 저자의 엉뚱한 시선을 따라 웃으며 걷다가 어느 순간 멈춰 서서 삶과 창작, 나이 듦과 새로운 시작을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동네 시인이 그리고 쓴 느지감치 그림일기』는 그림을 통해 평범한 하루를 다시 보고, 오래된 기억과 감정을 꺼내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늦게 시작했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서툴더라도 계속 바라보고, 그리고, 기록하는 동안 평범했던 하루는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예술의 시작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자기 눈으로 다시 바라보고 마음속에 오래 묵혀둔 것을 용기 내어 꺼내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완벽하게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지금이라도 느지감치 시작해 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기존의 책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묘한 책이다.


'세종마루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어둠을 다스려야 밝은 부분이 더 밟아지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어두운 부분을 잘 만져야 사는 일의 명도가 더 올라갈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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