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
라비니야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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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마음속에 쌓인 감정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순간이 찾아온다.

서운했지만 괜찮은 척 넘긴 일, 상처받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견딘 시간,

이미 지나갔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쪽에 남아 있는 슬픔까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마음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라비니야의 『쓰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는 그런 마음을 글로 천천히 꺼내보도록 이끄는 책이다.

이 책에서 글쓰기는 멋진 문장을 완성하거나 책을 출간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흔들리는 삶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기록이며, 보이지 않는 내면을 돌보는 생활의 한 방식이다.


저자 역시 한동안 자신을 위한 글쓰기를 잊고 살았다.

마감에 맞춘 글, 돈이 되는 글, 책으로 묶일 글은 썼지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록은 사라졌다.

글쓰기가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변하자 즐거움보다 피로와 불안이 커졌다.

좋아해서 시작한 일이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노동이 되면, 사람은 그 일을 계속하면서도 시작한 이유를 잊게 된다.

문제는 목표가 아니라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시간까지 실패로 여기는 데 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한 문장이라도 그날의 나를 지켜냈다면 이미 충분한 글이다.


이번 책을 준비하며 저자는 자신이 처음 글을 썼던 이유를 다시 기억한다.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알고, 내면을 지나는 감정의 결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우울과 불안에 가라앉지 않으려고 두서없는 문장이라도 적었다.

삶을 회복시키는 것은 정돈된 문장보다 정직한 문장이다.

‘나는 괜찮지 않다’, ‘그 말이 오래 아팠다’는 고백은 마음을 현실로 불러낸다.

내가 슬픔 자체가 아니라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임을 아는 것, 그것이 회복의 시작이다.


글쓰기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만의 일이 아니다.

맛없는 샌드위치, 무심코 들은 말, 퇴근길의 흐릿한 야경도 충분히 글이 된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삶이 아니라 평범한 삶을 세심하게 바라보는 태도다.

기록은 없던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바쁘다는 이유로 지나쳤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다.

같은 하루처럼 보여도 그날의 빛과 표정, 마음의 온도는 모두 다르다.


저자는 자신을 이해하려면 ‘자기 추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적다 보면 희미했던 자신의 윤곽이 드러난다.

기록은 답을 대신 내려주지는 않지만, 무엇을 두려워하고 어떤 삶을 원하는지는 보여준다.

우리는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이면서도 놀랄 만큼 자신을 모른 채 살아간다.

매일의 문장을 이어보면 반복되는 감정과 선택의 무늬가 보이고, 그때 비로소 다른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남편의 사고 이후 가장이 되어 괜찮은 척 살아온 한 수강생의 이야기도 인상적이다.

그는 다른 이들의 상처가 담긴 글을 읽으며 자신 역시 오래 지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슬픔을 견디는 데 익숙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도 늦게 알아차린다.

기록은 마음의 균열을 바로 메우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금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는 것은 책임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라 삶을 오래 감당하기 위한 정직한 점검이다.


이 책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긍정으로 서둘러 덮는 것도 아니다.

흙탕물이 맑아지려면 계속 휘젓기보다 가만히 기다려야 하듯, 마음에도 가라앉는 시간이 필요하다.

잠시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허락하는 태도는 무책임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성숙함이다.


저자는 거창한 목표보다 오늘의 몫을 꾸준히 써나가는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

과거에 좋은 글을 썼다는 사실보다 지금도 계속 쓰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삶을 바꾸는 것은 화려한 결심보다 지루할 만큼 반복되는 작은 습관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따르지 않는 날에도 소중한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이는 일에 가깝다.


독서 역시 쓰기와 연결될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다.

좋은 문장을 읽고 감탄하는 것만으로는 타인의 생각을 잠시 빌려온 데 그칠 수 있다.

‘나는 정말 동의하는가’, ‘내 경험과 무엇이 다른가’를 적어볼 때 생각은 자기 언어로 바뀐다.

읽기와 쓰기는 서로 경쟁하는 활동이 아니라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과 같다.


필사도 좋은 문장을 베끼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왜 첫 문장이 시선을 붙잡는지, 어떤 단어와 리듬이 마음을 움직이는지 살펴야 한다.

필사는 문장을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그 문장이 만들어진 사고의 과정을 배우는 일이다.


기록은 사진과 링크를 많이 저장하는 일과도 다르다.

인간은 데이터를 쌓는 존재가 아니라 경험을 해석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존재다.

짧은 한 줄이라도 왜 이 장면을 남기고 싶은지 고민하며 쓴 기록에는 그날의 감정과 가치관이 담긴다.

기록의 가치는 얼마나 많이 남겼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의미를 부여했는가에 있다.


『쓰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는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오래 괜찮은 척 살아온 사람,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 기록을 성취의 수단으로만 여겨 지친 사람에게 필요한 책이다.

매일 스트레칭으로 굳은 몸을 풀어주듯 마음에도 빗질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글을 쓰는 시간은 생산하지 못한 시간이 아니라 무너진 내면을 다시 정돈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어른이 되지 않는다.

쓰다가 멈추고 다시 돌아와 문장을 잇는 동안 조금씩 자란다.

성장이란 덜 흔들리는 상태가 아니라 흔들릴 때 돌아올 자리를 자신 안에 마련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글은 그 자리로 되돌아가는 길을 표시해준다.


이 책은 기록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자기계발이 아니라 오늘의 나를 버리지 않기 위한 약속이라고 말한다.

잘 쓰지 않아도 괜찮고 대단한 이야기가 없어도 괜찮다.

오늘의 마음을 정직하게 한 줄 적는 순간, 우리는 삶을 다시 살아갈 힘을 마련한다.

쓰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된다는 것은 완벽해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지난날의 자신을 함부로 미워하지 않게 되는 일이다.


'단단한맘수련 서평단'을 통해,

'모티브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한때 이동진 평론가가 이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좋은 감독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영화를 만들어낸 그 순간에 그가 좋은 감독이 되며, 이후에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글을 쓰는 일도 다르지 않다. 과거에 어떤 글을 썼는지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쓰고 있다는 점과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잘 쓴 글 하나가 나를 영원히 설명해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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