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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
앨런 레비 지음, 노지양 옮김 / 오팬하우스 / 2026년 7월
평점 :

앨런 레비의 장편소설 『테오』는 미국 남부의 작은 도시 골든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신사 테오가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봄이 막 피어나기 시작한 골든은 층층나무와 철쭉꽃이 만개하고, 강물 위로 옅은 안개가 리본처럼 드리워지는 곳이다.
테오는 이 도시에서 꼭 1년을 살아간다. 길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가 자신만의 조류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을 그 안으로 끌어들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테오는 어린 시절 도루강 옆에서 뛰어놀았고,
젊은 시절에는 센강에서 추억을 만들었으며 은퇴한 뒤에는 허드슨강을 걸었다.
골든에 도착해서도 자연스럽게 옥스보우강 근처에 머문다. 강은 이 소설에서 테오의 삶을 닮은 상징처럼 다가온다.
수많은 굽이를 지나면서도 끝내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처럼, 테오는 깊은 상실을 안고서도 삶을 멈추지 않는다.
골든에서 온전히 하루를 보내는 첫날, 테오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오래된 건물의 장식과 역사 안내판을 읽고, 작은 새에게 말을 걸며, 길에 떨어진 빈 병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는다.
주머니에서 루페를 꺼내 철쭉꽃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무엇이든 쉽게 지나치지 않고 자세히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훗날 그가 골든 사람들의 얼굴뿐 아니라 그 얼굴 안에 담긴 삶까지 들여다보게 되는 출발점이 된다.
테오는 카페 첼리스에서 벽을 가득 채운 92점의 연필 초상화를 발견한다.
연령과 인종, 표정이 모두 다른 얼굴들이다. 화가 애셔 글리슨은 “모든 얼굴은 이야기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이 그림들을 그렸다.
그러나 훌륭한 작품인데도 대부분 팔리지 않은 채 카페 벽에 걸려 있다.
테오는 그림을 감상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초상화는 그 얼굴의 주인이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한 점씩 구입해 실제 주인에게 선물하기 시작한다.
첫 번째 초상화의 주인인 미넷 프렌티스에게 테오가 편지를 보내는 장면은 특히 기억에 남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노인이 자신의 초상화를 선물하겠다며 만나자고 한다면 누구라도 의심부터 할 것이다.
미넷과 남편 데릭 역시 편지의 의도와 발신인의 정체를 여러 방향으로 추측한다.
스토커일 수도 있고 장난일 수도 있으며, 위험한 목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상에서 좀처럼 겪기 어려운 사건이 생겼다는 사실에 호기심과 설렘도 느낀다.
부부가 편지를 함께 읽고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그 자체로 소중해 보였다.
이 장면을 읽으며 중학생 때 잡지의 펜팔 코너에 신청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잡지를 구독하던 또래 친구들에게 편지를 받고,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며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작은 선물을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며 답장을 기다리던 설렘과,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대화를 오래 이어가고 싶었던 순수한 마음이 테오의 편지를 통해 되살아났다.
테오의 편지는 정중하고 세심하다.
낯선 사람의 연락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음을 먼저 사과하고,
자신을 수상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도록 나이와 옷차림, 만날 장소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자신을 “선한 의도만 있는 이빨 빠진 사자”라고 소개하는 대목에는 위트도 있다. 상대가 느낄 불안까지 미리 헤아린 문장이다.
SNS와 짧은 메시지로 소통하는 일이 익숙해지면서 손으로 편지를 쓸 기회가 거의 사라졌지만,
자신의 필체로 천천히 적은 편지에는 말만으로는 전하기 어려운 사람의 온도와 태도가 담기는 것 같다.
테오의 편지는 정중한 편지가 어떻게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현대에는 사람에게 상처받은 경험 때문에 마음에 높은 경계를 세우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누군가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면 고마워하기 전에 목적부터 의심한다.
그것은 지나친 냉소라기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익힌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서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이야기를 꾸밈없이 털어놓고, 판단받지 않은 채 들어주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까운 가족이라고 해서 언제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지 않은 사람, 세대 차이가 날 만큼 나이가 다른 사람과도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오히려 이해관계가 적은 낯선 사람에게 오래 묻어둔 이야기를 고백하며 마음을 치유받기도 한다.
이런 힘은 혼자서는 얻기 어렵다. 나를 제대로 바라봐 주는 타인을 통해서만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테오는 질문을 잘하고 그보다 더 잘 듣는 사람이다.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재촉하지 않고, 위트와 예의를 잃지 않으며 사소한 표정의 변화까지 알아차린다.
무엇보다 그의 관심은 상대에게 진심으로 전달된다.
진심 어린 칭찬 한마디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누군가가 발견해 준 좋은 점을 통해 비로소 자기 안의 가치를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칭찬은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칭찬받은 사람은 다시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진심 어린 칭찬은 또 다른 칭찬을 남긴다.
테오의 다정함이 단순히 타고난 낙천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설은 더 깊어진다.
그는 음주 운전 사고로 사랑하는 딸과 아내를 모두 잃었다.
아내가 운전한 차에서 딸과 아내가 함께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죄책감과 후회를 남겼다.
그는 그 슬픔에 빠져 익사하지 않기 위해 걸었다. 가만히 있으면 자신을 덮칠 생각들이 두려워 매일 혼자 걷고 또 걸었다.
초라하고 분노한 채, 위로받을 수 없는 상태로 절박하게 걸었다.
그러나 가장 암울한 순간에도 자연은 계속 아름다웠다.
프랑스의 어느 4월 저녁, 해가 지기 직전부터 황혼의 첫 별이 떠오르기까지의 짧은 시간에 테오는 “세상은 참 아름답구나”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산산이 부서진 영혼의 치유가 그때부터 아주 조금씩 시작된다.
치유는 완전한 회복도, 슬픔의 삭제도 아니었다. 앞으로도 전진과 후퇴를 반복할 것이며 슬픔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따라올 것이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이 부분에서 테오의 다정함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슬픔을 모르는 사람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친절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어도 한 번은 누군가를 온 존재로 사랑했고, 그 사랑을 잃은 뒤 무너져 본 사람이었기에 타인의 슬픔을 알아볼 수 있었다.
상처가 언제나 사람을 다정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상처를 오래 들여다본 사람은 다른 이의 아픔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테오는 상대를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 앉아 듣고, 그 사람의 슬픔이 존재해도 괜찮다고 알려준다.
초상화는 그러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다. 그림의 가치가 뛰어난 묘사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초상화 속 얼굴 뒤에는 살아온 시간과 사랑, 후회, 상실, 말하지 못한 사연이 있다.
테오는 그림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그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볼 기회를 돌려준다.
예술은 현실을 잊게 하는 장식이 아니라 잊고 있던 자신과 타인을 기억하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한 사람의 초상화는 결국 “당신은 자세히 바라볼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메시지가 된다.
작은 도시 골든도 이 소설의 중요한 주인공이다.
첼리스 카페와 분수대 옆 벤치, 강변 산책로와 서점에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주민들이 모인다.
테오가 한 사람씩 만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개인의 변화는 관계의 변화로 이어지고, 관계의 변화는 공동체 전체에 잔잔한 파문을 만든다.
강물의 작은 흐름들이 하나로 모여 바다로 향하듯 테오의 작은 친절도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반드시 거창한 선언이나 영웅적인 행동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고 한 사람에게 필요한 초상화를 돌려주며 눈앞의 존재를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작가 앨런 레비의 실제 삶을 살펴보면 테오와 겹쳐 보이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는 미국 조지아주 콜럼버스에서 성장해 조지아대학교에서 영문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변호사로 일하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스코틀랜드 문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다시 법률가로 활동하다가 1996년부터 전업 싱어송라이터이자 이야기꾼의 길을 걸었다.
20장이 넘는 음반을 발표했고, 판사로 일한 경력도 있다. 또한 2012년 세상을 떠난 동생 게리와의 우정을 기록한 회고록도 출간했다.
『테오』의 직접적인 출발점 역시 작가의 실제 경험이었다.
앨런 레비는 고향의 한 카페에서 벽에 걸린 92점의 초상화를 보다가 “누군가 이 그림을 모두 사서 주인에게 돌려주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
그는 실제로 그날 초상화 네 점을 구입했고, 집에서 그림 속 인물의 사연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다만 소설 속 테오의 행적 전체가 실화인 것은 아니다.
작가는 처음부터 특정 인물을 모델로 삼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써갈수록 사람을 사랑하고 충만하게 살았던 동생 게리가 테오 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작가와 테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천천히 바라보고, 걷고, 이야기를 듣고, 작은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앨런 레비는 가족의 땅을 돌보며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없는 숲속 작업실까지 걸어가 손으로 글을 쓴다.
그는 테오가 완성된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테오처럼 살고 싶어 이 인물을 썼다고 설명했다.
사회의 큰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려 하기보다 각자가 이름 없이 행하는 작고 지속적인 친절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작품에 담겨 있다.
음악가로 오래 살아온 경력도 소설의 문체에 스며 있다.
장면은 계절과 빛, 강물과 새, 사람들의 목소리를 따라 음악처럼 완급을 조절한다.
작가는 집필할 때 수백 곡의 영화음악을 들었고, 장면과 음악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테오』는 사건을 빠르게 밀어붙이기보다 여러 인물의 사연을 하나씩 쌓아 올리고,
후반부에 이르러 흩어진 음들이 하나의 선율이 되는 듯한 울림을 만든다.
앨런 레비는 이 작품을 3년 반 동안 쓰면서도 출간할 생각이 없었다.
완성된 원고를 서랍에 넣어두려 했지만 대학 시절 친구들이 읽은 뒤 반드시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고 권했다.
그는 거의 일흔이라는 나이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조카와 함께 2023년 자비 출판을 선택했다.
목표는 천 부 정도를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고보다 독자의 추천과 북클럽의 입소문을 통해 판매량이 늘었고,
2025년 ‘하얀 책’이라 불리며 출판계의 예상 밖 화제작이 되었다.
2026년 6월에는 누적 판매량이 250만 부를 넘어섰다.
이 데뷔 과정 역시 소설의 메시지와 닮았다.
테오의 친절이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며 골든을 변화시킨 것처럼,
『테오』라는 책도 한 독자가 다른 독자에게 건네면서 세계로 퍼져나갔다.
작가가 거의 일흔에 시작한 첫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시작에 정해진 나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법과 음악, 가족의 상실과 돌봄, 지역사회에서의 관계를 경험한 시간이 있었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테오』를 읽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화려한 사건이나 반전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바라보는 테오의 태도였다.
우리는 매일 많은 얼굴을 보지만, 그 얼굴 안에 한 사람의 진짜 삶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테오는 초상화 앞에서 멈추었고, 그 사람을 궁금해했으며,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그 사람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에서 테오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큰 행운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사람을 기다리는 데서 멈추지 말고, 내가 누군가에게 테오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도 묻는다.
누군가의 말을 조금 더 오래 들어주는 것, 진심으로 좋은 점을 발견해 말해주는 것,
가까운 사람의 얼굴을 익숙하다는 이유로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고작 1년이었다. 하지만 테오는 골든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의 조류를 만들었다.
그 물에 떠가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함께 노를 저었고, 마침내 하나의 물살이 되어 바다를 향했다.
『테오』는 한 사람의 진심이 다른 사람의 삶에 얼마나 오래 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슬픔을 없애주지는 못하더라도 함께 살아갈 힘을 건네는 사람,
상처 입은 얼굴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
대가 없이 친절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책을 읽고 나면 테오의 이름이 한 인물의 이름을 넘어 우리가 닮고 싶은 마음의 이름처럼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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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다서평단 @ekida_library’을 통해,
'오팬하우스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아니요. 슬픔은 여러 모습일 수 있지만, 슬픔이 한심한 경우는 드뭅니다. 좋은 슬픔은 언제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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