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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 이후 - 빅터 프랭클이 남긴 인생 강의
빅터 프랭클 지음, 유영미 옮김 / 북하우스 / 2026년 6월
평점 :

요즘은 분명 예전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사는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자주 텅 비는 순간이 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왜 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는데 밤이 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SNS를 보면 다들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고, 열심히 일해도 불안은 줄어들지 않고, 쉬는 날이 와도 제대로 쉬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사람들과 계속 연결되어 있는데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혼자인 것 같고, 무언가를 사고 먹고 보고 즐겨도 잠깐뿐, 다시 원래의 허전함으로 돌아오는 날도 있다.
나는 이 책이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아주 크게 무너진 사람뿐 아니라, 겉으로는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속으로는
“나는 지금 뭘 위해 살고 있지?”라고 묻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이상하게 힘든데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든 것 같기도 하고, 돈이 부족해서 불안한 것 같기도 하고, 관계 때문에 지친 것 같기도 한데,
막상 하나씩 들여다보면 그보다 더 깊은 곳에 “내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숨어 있을 때가 있다.
프랭클이 말하는 ‘의미의 상실’은 바로 그런 마음의 상태에 가까웠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마음이 굶주린 느낌. 쉬고 있는데도 쉬어지지 않고, 웃고 있는데도 마음이 따라오지 않는 느낌.
이 책은 그 공허함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인간에게는 의미가 필요하다고 아주 진지하게 말해준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 이후』는 단순히 강제수용소의 고통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삶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면, 『죽음의 수용소 이후』는 그 이후의 질문을 던진다.
살아남은 뒤에도 사람은 다시 살아갈 이유가 필요하다.
하루하루는 계속되지만, 마음속에서 “왜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삶은 쉽게 버거워진다.
나는 이 부분이 참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보통 힘든 일을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고통은 지나간 뒤에 더 크게 남기도 한다.
사건은 끝났는데 마음은 아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가 있고, 겉으로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속으로는 삶의 이유를 다시 찾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버티는 일이 아니라, 버틴 이후에 내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서문에서 손자 알렉산더 베셀프랭클은 할아버지를 쾌활하고 사랑이 많았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손주들과 놀이공원에 가고,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고, 화를 내더라도 금방 사과할 줄 아는 사람.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다정한 할아버지처럼 보였지만, 그는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 튀르크하임을 지나온 사람이었다.
가족을 잃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짓밟히고,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으로만 남지 않았다.
이 부분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큰 고통을 겪은 사람이 반드시 차갑고 날카로운 사람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라는 것.
상처가 없어서 다정한 것이 아니라, 상처를 통과했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고 깊어진 사람도 있다는 것.
프랭클의 삶은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다. 아픔을 겪었다고 해서 반드시 원망만 남는 것은 아니다.
물론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인간에게는 고통 이후에도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조용한 위로처럼 다가왔다.
나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밝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산산이 부서지고도 원망에만 잠식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프랭클이 전쟁 후 빈으로 돌아왔을 때 더 힘들었던 것은, 오히려 강제수용소에서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수용소 안에서는 목표가 분명했다.
살아남아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만나는 것.
그러나 돌아왔을 때 가족은 더 이상 없었다.
삶을 지탱하던 희망이 사라진 것이다.
사람은 고통 자체보다, 그 고통을 견뎌야 할 이유가 사라졌을 때 더 깊이 무너지는 것 같다.
아무리 힘든 시간도 “이걸 지나면 만나게 될 사람”, “이걸 견디면 해내고 싶은 일”, “아직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사라지면, 삶은 갑자기 방향을 잃는다.
프랭클이 겪은 절망은 감히 쉽게 상상할 수 없지만, 그가 다시 붙든 것이 ‘나를 위한 이유’가 아니라 ‘누군가를 돕는 일’이었다는 점이 깊게 다가왔다. 자기 삶이 무너진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의 삶을 붙드는 쪽으로 걸어갔다는 것. 그 자체가 이 책의 가장 큰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프랭클은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에게 남은 하나의 과제를 붙들었다.
의사로서, 작가로서, 자신과 비슷하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말처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느냐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였다.
이 문장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삶의 의미는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이 내게 던지는 질문 앞에서 내가 어떤 태도로 응답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생긴다.
나는 이 문장이 단순한 명언처럼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아프게 다가왔다. 우리는 자주 삶에게 묻는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냐고, 왜 나는 이렇게 힘드냐고, 왜 원하는 만큼 얻지 못했냐고.
그런데 프랭클은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지금 이 상황에서 삶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나는 여기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쉬운 위로는 아니지만, 사람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삶의 의미는 생각만 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깊게 다가온다.
취업에 실패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사람, 매일 바쁘게 살지만 마음속은 텅 빈 사람, 남들처럼 소비하고 과시하려 애쓰지만 정작 왜 사는지 모르는 사람. 번아웃에 빠져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 사람, 주말이 오히려 더 외롭게 느껴지는 사람, 사랑하는 이를 잃고 앞으로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사람.
프랭클은 이런 상태를 단순한 우울이나 나약함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그 안에 실존적 공허가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 안에 있는 의미를 향한 욕구가 채워지지 못했을 때 생기는 깊은 허기다.
이 표현이 참 정확하다고 느꼈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인정도 필요하고, 사랑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은 그 이유를 잃어버리기 쉬운 시대인 것 같다.
계속 비교하게 되고, 계속 증명해야 하고, 계속 더 나아져야 할 것 같은 압박 속에서 정작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놓치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이 텅 빈다. 아무것도 안 한 것도 아닌데, 열심히 안 산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내 삶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프랭클은 그 공허를 인간의 중요한 신호로 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신호가 아니라, 내 삶이 의미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신호로 말이다.
프랭클은 현대인이 더 빠르게 달리는 이유도 이 공허와 관련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일이 많아서만 지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멈추면 자신 안의 공허가 드러날까 봐 더 바쁘게 움직인다.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보여주고, 더 빨리 달리지만, 정작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목표가 없을수록 속도만 빨라진다는 말은 오늘의 삶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이 부분을 읽으며 요즘 사람들의 삶이 많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계속 보고, 사고, 올리고, 확인하고, 계획하고, 일정을 채우지만 정작 혼자 조용히 앉아 있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바쁘게 살면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멈췄을 때 마주하게 될 허전함이 두려워서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방향 없는 성실함일지 모른다.
매일 열심히 살고 있는데 마음이 비어 있다면, 그건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이 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일 수 있다.
이 책이 말하는 구원은 거창하지 않다.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실현하는 길을 크게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성취하는 일이다.
둘째,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다.
셋째, 피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는 태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을 일부러 찾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면, 그 고통 앞에서도 인간은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세 가지가 좋았던 이유는 너무 멀리 있는 답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삶은 꼭 대단한 성공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내가 맡은 일을 조금 더 성실하게 해내는 것,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슬픔 앞에서도 나 자신을 함부로 망가뜨리지 않는 것. 그런 일들 속에도 의미는 있었다.
결국 의미는 나만 바라볼 때보다 내가 기여할 일과 사랑할 사람과 지키고 싶은 태도를 가질 때 더 선명해지는 것 같다.
특히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아우슈비츠가 있다”는 말은 오래 남는다.
이 말은 고통을 똑같이 보자는 뜻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실직이, 누군가에게는 이별이, 누군가에게는 질병이,
누군가에게는 죄책감이, 누군가에게는 아무도 몰라주는 외로움이 자기 삶에서 가장 큰 고통일 수 있다는 뜻이다.
고통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갈 것인가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고통을 비교한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많아”, “그걸로 힘들어하면 안 되지” 같은 말로 누군가의 아픔을 작게 만든다. 하지만 고통은 등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일처럼 보이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삶 전체를 흔드는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누군가에게 “내가 힘들어해도 되는구나”라는 작은 위로처럼 다가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힘든 것도 진짜라고,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프랭클은 인간을 완전히 선하거나 완전히 악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둘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유를 말하면서 반드시 책임을 함께 말한다.
자유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취할 태도를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지는 것이다.
군중 속에 숨고, 시대 탓을 하고, 운명 탓을 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반대로 소수일지라도 품위 있는 사람의 편에 서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는 프랭클의 위로가 가볍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힘든 사람에게 그저 괜찮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그럼에도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이 질문이 조금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을 믿는 말처럼 느껴졌다.
상황에 휩쓸리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작은 선택이라도 할 수 있는 존재로 우리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는 조금씩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들이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만들어간다.
책 후반부에서 프랭클은 덧없음에 대해서도 인상적인 설명을 남긴다.
사람들은 언젠가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프랭클은 덧없음이야말로 가능성이자 기회라고 말한다.
우리가 한 일, 우리가 한 사랑, 우리가 견딘 고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라는 창고 안에 보관된다.
한 번 실현된 것은 아무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
나는 이 생각이 참 좋았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자주 잃어버린 것처럼 생각한다.
끝난 관계, 실패한 시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젊음,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떠올리며 아쉬워한다.
그런데 프랭클은 과거가 사라진 곳이 아니라 가장 안전하게 보관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시간, 최선을 다해 견딘 시간, 누군가를 위해 애쓴 시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내 삶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것이고, 누구도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 이 말이 이상하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이 부분에서 말하는 의미의 형태도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쉽게 생각하면 이런 뜻인 것 같다. 삶의 의미는 처음부터 완성된 답처럼 보이지 않는다.
흩어진 점처럼 보이는 경험들, 실패, 사랑, 일, 상실, 고통이 어느 순간 하나의 그림처럼 연결될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아, 이 일이 내 삶에서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조금씩 알게 된다.
프랭클이 말하는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정답이 아니라, 각자의 삶 안에서 발견되는 구체적인 모양에 가깝다.
같은 사건도 누구에게는 절망으로 끝나지만, 누구에게는 사람을 더 깊게 이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바로 그 모양을 알아보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해서, 내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의미는 지나고 나서야 보인다.
당시에는 실패처럼 보였던 일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당시에는 상실처럼 보였던 시간이 나에게 사랑의 깊이를 가르치기도 한다.
삶은 매 순간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내고, 사랑하고, 견디는 동안 흩어진 조각들은 조금씩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간다.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완벽한 답을 손에 넣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조각들이 어떤 그림을 이루고 있는지 천천히 알아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죽음의 수용소 이후』는 고통을 없애주는 책이 아니다.
대신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끝내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삶이 무너졌다고 느낄 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느낄 때,
이 책은 내게 아직 삶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사랑할 사람이 있으며, 끝까지 견뎌내야 할 태도도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이 나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이 있었다.
우리가 완전히 절망하는 순간은 고통이 찾아왔을 때만이 아닌 것 같다.
그 고통 속에서 더 이상 아무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사람은 정말 무너진다.
프랭클은 바로 그 순간에 인간의 마지막 자유를 이야기한다.
상황을 바꿀 수 없을 때조차, 나는 그 상황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이 선택은 작아 보여도 결코 작지 않다.
그 태도 하나가, 고통 속에서도 내가 나를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게 붙들어주는 마지막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프랭클이 말하는 삶의 의미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피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도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 작은 응답들이 쌓여 내 삶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낸 것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과거라는 가장 안전한 곳에 보관되어, 끝내 우리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삶의 의미란 대단한 성공이나 특별한 사명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프랭클이 말하는 의미는 멀리 있는 답이 아니라, 지금 내 삶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더 가까웠다.
무너진 날에도 다시 일어나는 것, 외로운 사람의 손을 잡는 것,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감당하는 것.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타인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도 나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것.
그런 작고 조용한 선택들이 한 사람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
삶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지 않고,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순간에도 인간에게는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태도가 남아 있다고 말해준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견디고,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책임을 붙들 것인지.
결국 그 응답들이 모여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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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하우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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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연구의 창시자인 몬트리올의 한스 셀리에조차도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스트레스는 삶의 소금이며, 인간에게는 긴장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조금 더 신중하게, 인간에게는 건강한 정도의 긴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너무 큰 긴장도, 너무 적은 긴장도 아닌 적정 수준, 즉 건강한 정도의 긴장이 필요하다고 말이죠. 그런 긴장은 양극을 가진 자기장에서 생겨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한쪽 극에는 인간이 있고, 다른 쪽 극에는 의미가, 오직 그가 실현해주기를 기다리는 고유하고 구체적인 ‘의미’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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