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지 않은 쌍둥이 - 프란츠 카프카 x 에곤 실레 세계문화전집 2
프란츠 카프카.에곤 실레 지음, 홍선기 엮음 / 모티브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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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는 소설가이고, 에곤 실레는 화가다. 한 사람은 글을 썼고, 한 사람은 그림을 그렸다. 언뜻 보면 두 사람 사이에는 뚜렷한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만났다는 기록도 없다. 그런데 왜 이 책은 두 사람을 ‘만나지 않은 쌍둥이’라고 부를까?


처음에는 이 표현이 조금 낯설었다. 카프카와 실레가 쌍둥이라니.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비슷한 질문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왜 나로 살기 어려운가? 내 몸은 정말 내 것인가?


특히 ‘내 몸은 정말 내 것인가?’라는 문장은 처음 봤을 때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면 누구의 것이라는 말일까 싶었다. 그런데 카프카와 실레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이 문장이 꼭 몸 자체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분명 내 몸인데, 가족의 기대와 사회의 기준, 해야만 하는 일들에 맞춰 움직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마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게 된다. 아파도 쉬지 못하고, 싫어도 괜찮은 척하고, 나답게 살고 싶지만 역할에 맞춰 나를 눌러야 하는 순간들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내 몸은 정말 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그런 상태를 묻는 말처럼 느껴졌다. 카프카는 이 질문을 문장으로 썼고, 실레는 그림으로 그렸다.


1912년, 프라하의 한 보험회사 직원이 밤새 글을 쓴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벌레가 되어 있던 남자의 이야기, 『변신』이다. 같은 해, 기차로 네 시간 거리인 빈에서는 스물한 살의 화가 에곤 실레가 감옥에 갇힌다. 미성년자가 볼 수 있는 장소에 외설적인 그림을 두었다는 이유였고, 재판정에서 판사는 그의 그림 한 점을 촛불에 태워버린다. 한쪽에서는 사람이 벌레가 되는 이야기가 쓰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의 몸을 너무 솔직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그림이 불탔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두 사람을 함께 바라본다. 카프카의 문장을 읽다가 실레의 그림을 보면, 카프카가 말한 불안이 머리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진다. 반대로 실레의 뒤틀린 몸을 보다가 카프카의 글로 돌아오면, 그 몸 안에 어떤 외로움과 두려움이 담겨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진다.


두 사람을 가장 깊이 흔든 것은 아버지의 존재였다.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살아 있는 권위였다. 거구의 사업가이자 가부장적인 헤르만 카프카 앞에서 카프카는 평생 작아졌다. 어린 시절 물을 달라고 칭얼댔다는 이유로 잠옷 차림으로 발코니에 세워졌던 밤은 그의 안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에게 그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 이 문장은 단지 한 아들의 고백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 앞에서 내가 너무 작고 하찮게 느껴졌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실레에게 아버지는 죽은 뒤에도 계속 남아 있는 공포였다. 매독으로 정신이 무너져가던 아버지, 가족의 재산을 불태우고 죽어간 아버지, 그 장면을 지켜본 어린 실레. 그의 그림 속에 자주 나타나는 죽음, 뒤틀린 몸, 태아, 임산부, 텅 빈 눈빛은 이런 가족사와 떨어져 있지 않다. 카프카가 아버지의 말과 권위 앞에서 자기 존재를 의심했다면, 실레는 아버지가 남긴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자기 몸을 계속 바라보았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예술이 꼭 아름다운 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떤 사람에게 예술은 살아가기 위해 겨우 붙잡는 숨구멍이 되기도 한다. 카프카에게는 글쓰기가 그랬고, 실레에게는 그림이 그랬다.


카프카에게 글쓰기는 아버지의 기준이 닿지 않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아버지가 중요하게 여긴 사업, 체력, 사교성, 결혼의 세계에서 카프카는 늘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글쓰기만큼은 달랐다. 아버지가 그의 책을 무시하고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글쓰기의 세계는 아버지의 평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물론 완전한 자유는 아니었다. 카프카는 글을 통해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려 했지만, 동시에 평생 아버지에게 하지 못한 말을 계속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레에게 그림은 거울 앞에서 시작된 고백에 가까웠다. 그는 자기 몸을 100점 넘게 그렸다. 뼈가 드러나고, 관절이 꺾이고, 살갗은 푸르고, 손은 갈라지고, 눈은 텅 비어 있는 몸. 실레는 자신을 보기 좋게 꾸며 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부분을 오히려 드러냈다. 스승 클림트가 여인을 금빛 장식과 아름다운 무늬로 감쌌다면, 실레는 장식을 걷어내고 몸의 불안과 욕망, 수치와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실레가 남긴 “Selbstsein! 자기 자신이 되어라!”라는 문장도 더 오래 남았다. 여기서 자기 자신이 된다는 말은 단순히 멋있게 나답게 살자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다. 보기 싫은 나, 부족한 나, 불안하고 흔들리는 나까지 외면하지 않는 일에 가깝다. 남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만 골라서 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추고 싶었던 모습까지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카프카와 실레는 각자 다른 예술을 했지만, 둘 다 ‘내가 나로 살지 못하는 느낌’을 알고 있었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다. 가족을 위해 일했지만, 쓸모가 없어지자 방 안에 갇히고 점점 지워진다. 실레의 자화상 속 몸도 비슷하다. 몸은 분명 자기 것인데 어딘가 낯설고 불편하다. 자기 몸인데도 자기 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가끔 그런 순간을 겪는다. 월요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은 순간, 만원 지하철 안에서 몸만 회사로 향하고 마음은 따라가지 못하는 순간, 해야 할 일과 역할에 밀려 내가 나로 살고 있는지 모르겠는 순간이 있다.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된 아침은 아주 이상한 소설 속 장면이지만,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본 아침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도 중요하다. 1900년 전후의 빈과 프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심이었지만, 동시에 흔들리고 무너져가던 세계였다. 여러 민족과 언어, 종교와 계급이 뒤섞인 그곳에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그 혼란 속에서 카프카는 벌레가 된 직장인을 썼고, 실레는 뒤틀린 자기 몸을 그렸다.


『만나지 않은 쌍둥이』는 전시를 보듯 읽는 책이다. 문장을 읽다가 그림 앞에 멈추고, 그림을 보다가 다시 문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카프카를 어렵게 느꼈던 사람도 실레의 그림을 통해 그의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고, 실레의 그림이 낯설었던 사람도 카프카의 문장을 통해 그 불안을 이해할 수 있다.


읽고 나면 조용히 생각이 많아지는 책이다. 교양서처럼 지식을 정리해주는 책이라기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묻게 만드는 책에 가깝다. 카프카와 실레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도 좋지만, 요즘 나 자신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에게 더 깊게 다가갈 책이다.


프란츠 카프카와 에곤 실레. 한 사람은 문장으로, 한 사람은 그림으로 말했다. 둘은 만나지 않았지만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그 질문은 우리에게도 도착한다.


나는 정말 나의 삶을 살고 있는가?


Selbstsein.

자기 자신이 되어라.


‘단단한맘수련 서평단’을 통해,

'모티브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11. 아무리 해도 틀리는 세계

어떤 일로 인해 행복해질 때면, 그 기분에 가득 차서, 집에 돌아와 말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반응은 비꼬는 한숨, 고개 젓기, 테이블 위에서 손가락 두드리기였습니다. "나도 더 멋진 것 봤어.", "네 걱정이나 해.", "난 그렇게 한가한 머리가 아니라서.", "그딴 걸 사서 뭐 해!",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물론 아버지가 걱정과 고생 속에 사는 동안 어린 자식의 모든 사소한 일에 열광할 수는 없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아버지가 자신의 대립적인 본성 때문에 아이에게 그런 실망을 늘, 일관되게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대립이 재료 축적으로 끊임없이 강화되어, 아버지가 우연히 저와 같은 의견일 때조차 습관적으로 발동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의 이 실망들이 그저 삶 속의 평범한 실망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의 척도인 아버지가 관련되었으므로, 그것은 핵심을 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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