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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17 - 박경리 대하소설, 5부 2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평점 :

『토지 17』은 해방을 앞둔 시기의 조선 사람들을 다룬다.
하지만 이 책 속 인물들은 아직 해방이 올 줄 모른다.
독자는 곧 일본이 패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작품 속 사람들은 여전히 전쟁과 공출, 징용, 감시와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래서 이 권은 더 먹먹하게 다가온다.
끝이 가까워졌다고 해서 고통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질수록 세상은 더 거칠어지고, 사람들의 삶은 더 깊이 흔들린다.
이번 권에서는 친일에 기대어 세력을 얻으려는 사람들, 전쟁 속에서 무너져가는 사람들, 사랑과 조국 사이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그리고 끝까지 마음속 불씨를 지키는 민초들의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말단 말직, 실속 없는 명예직이라도 하나 얻어 걸치고 보면 세력의 판도는 여지없이 뒤집히는 현실”이라는 문장은 당시 사회의 뒤틀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허울뿐인 자리 하나에도 사람의 태도가 바뀌고, 권력의 끄트머리에라도 매달리려는 모습은 씁쓸하게 다가왔다.
친일은 거창한 신념이 아니라, 때로는 욕심과 비겁함에서 시작되기도 했다.
환국과 순철의 대화도 오래 남았다.
“바보처럼 웃고 살자. 광대가 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이 말에는 웃음조차 생존의 방법이 되어버린 시대의 슬픔이 담겨 있다.
진심으로 웃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웃어야 하는 시대.
그 뒤에는 공포와 허무, 무력감이 가득했다.
전쟁을 바라보는 환국의 시선은 특히 날카롭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가 만들어낸 집단의 광기를 비판한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단결이라 부르지만, 그 방향이 파괴를 향할 때 그것은 가장 무서운 폭력이 된다.
“창조 없는 곳에선 파괴뿐이고 사람이 짐승으로 전락하지.”
이 문장을 읽으며 전쟁이 왜 인간을 망가뜨리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음이 빠진 질서는 결국 모두를 무너뜨릴 뿐이다.
이번 권에서 가장 마음이 쓰였던 인물은 홍이였다.
송관수의 죽음 이후 홍이는 깊은 외로움과 의욕 상실을 느낀다.
주변 사람들은 흩어지고, 생사조차 알 수 없다.
만주도 조선도 온전히 그의 자리가 되어주지 못한다.
그런 홍이가 보연의 금 문제에 얽혀 조선으로 압송되는 과정은 더욱 안타깝다.
전시하에서는 개인이 금을 소유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국가가 금을 회수하고, 모든 것이 전쟁을 위해 동원되는 시대였다.
한 사람의 작은 판단도 전쟁이라는 거대한 압박 속에서는 큰 사건이 되어버린다.
보연의 물정 모름은 결국 홍이의 삶까지 흔들어놓는다.
홍이, 영광, 영호, 휘가 함께하는 장면도 인상 깊었다.
용이의 아들 홍이, 관수의 아들 영광, 한복의 아들 영호, 강쇠의 아들 휘.
이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부모 세대의 상처와 시대의 비극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토지』를 읽다 보면 한 사람의 인생은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삶은 가족의 역사와 이어지고, 가족의 역사는 다시 시대의 역사와 맞물린다.
유인실과 오가타 지로의 만남은 이번 권에서 가장 아프게 남은 장면이었다.
인실은 일본인 오가타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마음껏 선택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그녀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조선인이라는 정체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책임, 일본인을 사랑했다는 죄의식이 모두 뒤엉켜 있었다.
“인실 씨는 사람을 사랑한 것뿐입니다.”
이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인실은 사람을 사랑했을 뿐인데, 그 사랑은 시대 속에서 배신과 죄책감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사랑조차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대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오가타 역시 단순히 일본인이라는 이름으로만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인실을 사랑했지만 조선인에게도, 일본인에게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의 절망은 식민지 현실 속에서 개인의 진심이 얼마나 쉽게 짓밟힐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정의라는 이름으로도 사람이 비인간화될 수 있는가.
작품은 쉽게 답을 주지 않고, 그 질문을 독자에게 남긴다.
환국의 내면도 눈에 들어왔다.
그는 시대를 날카롭게 바라보고 창조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의 사랑 앞에서는 망설이고 두려워한다.
해숙을 향한 연민, 소림과의 엇갈림을 보며 환국 역시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랑의 시작일 수 있지만, 그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결국 또 다른 외로움이 된다.
『토지 17』은 거대한 역사만 보여주지 않는다.
병든 귀남을 다독이는 말, 김두만을 향한 영팔노인의 분노, 해도사와 연학의 대화처럼 작은 장면들 속에서도 삶의 결이 살아 있다.
“사람이란 살다 보면 병도 나고 험한 꼴도 보고, 그기이 사는 거 아니겠나.”
이 투박한 말 한마디가 오히려 큰 위로처럼 다가왔다.
사는 일은 늘 반듯하지 않고, 때로는 아프고 험하지만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는 뜻처럼 들렸다.
범석의 말은 『토지』라는 제목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겉으로는 조용해 보여도 민중의 마음속에는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다.
복종하는 듯 보여도 결코 섬기지 않고, 두려워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모멸하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조선의 대지이며 생명이라는 말이 깊게 남았다.
『토지』에서 땅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고, 빼앗겨도 마음속에서 끝내 놓지 않은 조국이며, 이름 없는 사람들이 지켜낸 생명이다.
이동진이 떠올린 고향도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척박한 땅이었다.
그 땅 위에 사람들이 있었기에 산천은 조국이 되고, 조국은 다시 민족의 삶이 된다.
『토지 17』은 아프지만 단단한 권이었다.
전쟁은 사람의 삶을 동강내고, 권력은 진실을 허구로 덮으려 하며, 시대는 개인의 사랑과 선택마저 짓밟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무너지고 흔들리면서도 다시 살아가고, 기억하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버틴다.
이 권을 읽고 나니 결국 삶이란 무엇을 지키며 버티는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국은 진실과 창조를 말했고, 송관수는 배고프고 핍박받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으며, 인실은 사랑과 조국 사이에서 자신을 찢어야 했다.
홍이는 돌아갈 곳 없는 외로움 속에서도 다시 길을 걸어야 했고, 민초들은 복종하는 듯 보이면서도 마음속 등불을 꺼뜨리지 않았다.
그래서 『토지』는 오래전 역사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묻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나는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가.
내가 딛고 선 땅은 무엇인가.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도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할 인간다운 마음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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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손독 을 통해 #도서협찬 받았습니다.
@chae_seon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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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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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간에 두만이 그놈 멀잖을 기구마. 자식 놈이 그 꼬라진데 무신 장로(장래)가 있을 기고. 말짱 헛공부 시킨 기라. 그 불쌍한 어미를 떠다밀고 논문서를 강탈해가질 않나 삼촌을 들고 패질 않나 하는 짓이란 주색잡기, 살림이 빠질라 카믄 하루아침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 캐도 물이 높은 곳으로 흐르는 법은 없인께. 지은 죄가 어디로 가노? 조존구 그놈을 봐라. 최참판댁에서 뺏은 그 많은 재산, 동전 한 푼 건사하지 못하고 알거지가 돼서 버린 자식 집에 기어들어왔다 안 카나? 하기사 그놈이 벌을 받을라 카믄, 어림없제. 멀었다, 멀었고 말고. 개과천선을 해도 그 죄를 못다 갚을 긴데 머라? 자식한테 호통을 치믄서 수발을 받는다꼬? 불로초를 구해오라 하면서 지랄발광을 한다고?"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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