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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산문 2025.겨울
시와산문사 편집부 지음 / 시와산문사 / 2025년 12월
평점 :

📖 천천히 읽을수록 깊어지는 겨울의 문장들
한 권의 문예지가 품을 수 있는 감정의 깊이는 어디까지일까?
『시와산문』 통권 128호 겨울호는 이 질문에 담담하면서도 깊은 울림으로 답한다.
이번 호는 신작시, 시인 특집, 에세이, 평론, 단편소설까지 균형 있게 구성되며,
지금 한국 문학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먼저 ‘신작시’ 코너에는 공광규, 김명원, 김명은, 김은지, 김정성, 김준현, 마선숙, 문영숙, 박민서, 박이정, 방혜선, 송승훈, 안영선, 안이숲, 임영석, 정미, 정상조, 조광자, 주영란 등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 시들은 일상과 노동, 관계와 고독, 기술과 인간, 상실과 회복을 각자의 언어로 풀어내며 동시대의 감정을 기록한다. 특히 삶의 균열과 흔들림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태도는, 이번 호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와도 맞닿아 있다. 완벽하지 않기에 더 진실한 언어들이 독자의 시간을 천천히 흔든다.
ㅡ 먼저 이 가운데 특히, 공광규 시인은 1986년 월간 <동서문학> 등단 이후 오랜 활동을 이어온 대표적인 현대 시인으로, 삶의 소소한 순간과 자연을 섬세한 감성으로 포착해온 작가다.
시집 『대학일기』, 『담장을 허물다』 등으로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해왔으며, 생명과 일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이 특징이다. 이번 호에는 「인심 장부」와 「담장 허물다」가 실려 있는데, 「인심 장부」는 사람 사이의 정과 관계의 빚을 ‘장부’에 비유하며 인간적인 온기를 되짚는 작품이고, 「담장을 허물다」는 담장을 없애며 자연과 세계를 삶 안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경계를 넘어 더 넓게 살아가는 태도를 그린 시다. 소유보다 공존을, 닫힘보다 열림을 선택하는 화자의 시선이 인상적으로 남는다. 이러한 작품들은 공광규 특유의 따뜻하고 절제된 언어를 잘 보여주며, 신작시 코너 전체의 깊이를 한층 끌어올린다.
이중우문학상 수상자인 심강우 시인의 작품도 눈에 띈다.
「사랑의 습관」, 「단추」, 「파본」 등은 사랑과 상실, 기억의 반복과 관계의 균열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낸 시들이다. 특히 ‘습관’과 ‘단추’ 같은 사물 이미지는 감정의 지속과 관계의 연결·단절을 형상화하며, 평범한 언어 속에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심강우의 시는 화려함 대신 삶의 미세한 결과 균열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힘을 보여준다.
시인 특집에는 정승화를 비롯한 다양한 세대의 시인들이 참여해 현대 시의 폭을 넓힌다.
특히 정승화의 「두 발로 걷지 않는다」는 상처 입은 존재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삶을 견뎌내는 모습을 그려내며, 연대와 위로의 언어를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이번 호가 지향하는 ‘흔들리면서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에세이 특집에는 안규철과 김가영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안규철의 「일곱 개의 단상」은 미술과 철학을 넘나들며 사유의 깊이를 보여준다. 김가영의 「타인을 위한 의자」는 한 낡은 의자와 휠체어를 중심으로 돌봄과 가족, 존엄의 문제를 섬세하게 풀어낸다. 누군가를 위해 남겨진 자리는 곧 사랑과 인내의 기록이며, 이 글은 문학이 지닐 수 있는 윤리적 깊이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단편소설 코너에는 박규숙의 「눈의 두께」가 실려 있다.
차분한 문체로 인간의 감정과 관계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시와 산문 사이의 균형을 잡는다.
서사 속 인물들은 조용히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며, 겨울호 특유의 정서를 더욱 깊게 만든다.
‘에세이 한 편’에는 라문숙, 손유미, 이계섭, 조재선, 최동영, 허봉조의 글이 실려 있다. 신발장 앞에서의 깨달음, 극장에서 떠오른 기억, 나무 서랍과 침대에 담긴 추억, 자라보며 느끼는 인생의 무게 등, 이 글들은 거창하지 않은 일상의 순간을 통해 삶의 본질에 다가간다. 담담한 문장은 오히려 마음에 오래 머물게 한다.
‘이 계절, 이 시집’과 ‘사회와 문화’ 코너는 동시대 문학과 사회를 연결하며, 문학이 현실과 어떻게 호흡하는지를 보여준다. 문학은 여기서 고립된 예술이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질문을 던지는 언어로 기능한다.
이번 호에서 개인적으로 좋았던 건, ‘지난 호, 좋은 시 다시 읽기’ 부분이었다.
이전 호를 못 읽은 사람이거나 이전 내용 중에 좋았던 시 부분을 다시 복기할 수 있는 시간을 될 수 있는 파트였다고 생각한다. 이번호에 소개 된 지난호의 좋은 시는 이현호의 「끝을 마주하는 세 가지 방식」이었다. 이 글은 세 편의 시를 따라가며 ‘끝’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끝은 늘 하나의 결론처럼 보이지만, 시 안에서 끝은 매번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먼저 반려견의 죽음을 다룬 시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그저 상실로만 두지 않는다.
떠나보낸 존재를 기억 속에서 다시 만나고, “안녕”을 작별이면서도 재회의 인사로 바꾸며 끝을 초월의 언어로 바라본다.
「혼자서도 멀리」는 보이저호를 매개로 관계의 단절과 고독을 비춘다.
신호를 보내도 닿지 않는 거리, ‘발신만 있고 수신이 닿지 않는’ 상태를 통해 끝에 붙잡힌 마음, 끝에서 떠나지 못하는 인간의 심리를 보여준다.
「늦어도 괜찮은 말」에서는 끝을 삶의 흐름 속으로 가져온다.
끝을 비극으로 단정하기보다, 순환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그래”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긍정을 제시한다.
이현호가 강조하는 핵심은, 끝은 단순한 종결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건이 우리를 끝내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끝의 의미를 바꾼다.
끝을 부정하거나 피하려 하기보다, 끝에 말을 걸고 해석하고, 자기만의 의미를 붙여보려는 순간 끝은 조금씩 다른 형태가 된다. 그래서 이 평론은 좋은 시가 한 번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순간마다 새로 읽히며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문학을 ‘소비’가 아닌 ‘반복의 경험’으로 되돌려 놓는 지점이다. 바로 그 지점이 이 글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부록에는 2026년 제11회 『시와산문』 신인문학상 공모 안내도 수록되어 있어,
등단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읽는 즐거움과 쓰는 꿈을 동시에 품은 구성이다.
『시와산문』 128호 겨울호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사색의 시간을 제공하고, 밀도 높은 문학의 기록쯤이 되겠다. 이 책은 자극적이지도 유행을 너무 좇지도 않는다. 대신 삶을 오래 바라본 사람들의 문장을 차곡차곡 모았다. 사랑의 흔들림, 상실의 아픔, 나이 듦, 관계의 균열, 노동과 일상, 기억의 무게가 시와 산문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솔직히 빠르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천천히 음미하고 사색하며 읽을수록 마음에 남는 문장들이 쌓이는 책이다. AI와 기술이 인간의 감정을 빠르게 대체하는 시대 속에서, 이번 호는 시가 여전히 인간의 가장 깊은 층위를 지켜내는 언어임을 증명한다. 느리고 불완전하지만, 그래서 더 진실한 언어들이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시와산문』 128호는 문학이 여전히 삶을 지탱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계절을 넘어 오래 곁에 두고 다시 펼치고 싶은, 겨울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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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립1 @bookclip1'님을 통해
'시와산문사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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