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 가족의 밭농사 - 조기 은퇴 후 부모님과 함께 밭으로 출근하는 오십 살의 인생 소풍 일기, 2023년 국립중앙도서관 사서추천
황승희 지음 / 푸른향기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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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 가족의 밭농사‘라는 제목을 보고 있으니, 밭농사와는 또 어떤 사연이 얽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귀농 이야기일 것 같으면서도, 어쩌면 가족 이야기나 사람 이야기가 가득할 것 같은 책이었다. 책을 펼치기 전에는 그저 ‘시골에서 농사짓는 가족의 일상’ 정도를 떠올렸는데,

이 책은 80살이 넘은 부모님과 함께 살아가며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좀 더 가까워지는 과정과,

행복한 일상에 대해 알려주고, 일상의 경험으로 삶에서 깨달은 바를 알려 주는 이야기다.

“정 붙이면 어디든 고향인겨. 재미나지 뭘.”

이 말은 저자가 부모님께 군산으로 이사해서 우리 같이 살면서, 밭도 조금 일구면 어떨까하고 조심스럽게 꺼냈을 때 나왔다. 오래 살던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면 오히려 외롭고 적적해질 거라는 오빠의 걱정도 있었고, 그 마음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고향을 떠난다는 건 생각보다 큰 일이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그 걱정을 툭 내려놓게 하듯, 정만 붙이면 어디든 고향이 된다고 말했다.

“재미나지 뭘.” 하고 덧붙이는 그 한마디가, 이사도 새 시작도 겁내지 말라는 말처럼 들렸다.

이어지는 문장들에서 아버지는 ‘늙음’도 비슷한 방식으로 말한다. 늙음이란 관념이고, 노인이냐 아니냐는 연금 탈 때 말고는 사실 의미가 없다고. 중요한 건 오늘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내일 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는지라는 것이다. 그 말을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나이를 숫자로만 재단하던 내 기준이 조금 흔들렸다. 그렇게 아버지는 이 이야기에서 늘 먼저 길을 내는 사람처럼 보인다. 망설임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걱정하기 전에 할 수 있는 걸 챙겨두는 사람. 그래서 ‘엄마 아빠의 특별한 귀농’은 말로만 머무르지 않고 빠르게 현실이 되었고, 결국 우리는 땅을 사기로 마음을 모은다.

마트에서 햇반이나 사던 저자가 스스로 땅을 다 사다니, 그 말 한마디에 스스로도 놀란 설렘을 숨기지 못한다. 뭔가 대단한 일을 이룬 것 같고, 안 될 것도 같았지만 달려드니 또 되는 게 신기했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가 된 셈이라며, 마르크스 얘기까지 꺼내는 대목에서는 기분이 묘해진다. 이제는 부모님 주택을 팔아 그림 같은 집을 지을 거라고, 엄마 아빠의 소중한 꿈을 이루어 드린 것 같아 뿌듯했다고도 적는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다. 이 선택의 중심에는 늘 아버지의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군산으로 내려올 결심을 하고 나서 아버지는 오빠에게 따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가족이 있고 잘 벌어 먹고 살지만, 네 동생은 혼자서 저렇게 자주 아프고 하니 나랑 네 엄마가 내려가서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건 해줄라 헌다.” 그리고 “내 비록 늙었어도 부모로서 저 혼자 먹고 살아갈 가장 편한 길이 뭔지를 가서 해놔야 하지 않겄냐”라고. 결국 텃밭은 텃밭이 아니었다. ‘텃밭을 가장한 과년한 딸 노후대책’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사람들이 던지는 “참, 효녀네”라는 칭찬이 부끄러워진다.

농사를 시작하고 나서야 ‘몸’의 차이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이 일이 없으면 몸이 굳어버려 못 쓴다며 늘 적당한 노동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아빠에게, 밭일은 어쩌면 소일거리일지 모른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그 소일거리조차 고된 노동이 된다. 같은 밭, 같은 일인데도 몸이 다르면 일이 달라진다. 그래서 ‘사이보그 가족’이라는 제목이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보청기와 임플란트, 철 같은 보조 장치를 달고 살아가는 몸들. 완전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는 몸들이다.

밭에서는 내가 생각보다 훨씬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자주 확인한다. 요즘은 검색하면 다 나온다지만, 현실에서는 포털 지식이 쓸모없을 때가 생긴다. 정보 공급자와 수급자 사이에 깊고 넓은 상식의 차이가 있고, 세상은 ‘같은 언어 다른 생각’이라는 함정투성이이기 때문이다. 밭 앞에 서면 나도 딱 그런 모습이 된다. 평생 직장생활하고 은퇴한 남성이 사회에 나오면 초등학생이나 마찬가지라더니, 내가 그랬다. 그래도 또 하나 배운다. 몰라도, 서툴러도, 살아가며 배우면 된다는 것을.

이장님을 찾아 시골 마을 골목길을 헤매던 날에는, 뜻밖에도 내가 나를 만나고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저 골목 귀퉁이쯤에서 두리번거리던 내가 서 있었다. 내 것이었던 적이 있다고 하기엔 너무 오래된, 나에게도 있었나 싶은 잊고 있었던 나의 동심.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하나 생긴다.

“그때 못 찾은 보물 말이야. 걱정 마. 항상 네가 보물이었어. 너 꽤 괜찮게 살았거든.” 밭으로 내려온 길이 단지 이사나 귀농의 길이 아니라, 나를 만나고 돌아오는 여행이 되기도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리고 밭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벼는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밭농사도 다르지 않았다. 병원 드나드느라 밭에 조금 덜 다녀간 것이 이렇게 큰 표시가 날 줄이야.

흙은, 땅은, 농사는 진짜 거짓말을 안 한다. 완벽하게 정직하다.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순간도 있다. 일 시키는 직장 상사도 없고 지긋지긋한 야근도 없다. 땅은 내가 땀 흘린 만큼의 먹거리를 내어준다.

작물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다. 상추만 해도 청상추, 적상추, 잎이 너풀거리는 꽃상추가 있고, 우리 밭의 청상추는 초록초록하고 조직이 얇아 야들야들해서 어지간한 화초보다도 이쁘다고 말하게 된다. 파종 방법이 작물마다 다 다르다는 사실도 신기하다. 시금치는 흩어 뿌리고, 고구마는 줄기로 심고, 마늘은 통마늘 알로 심는다. 옥수수도 옥수수알로, 땅콩도 땅콩 알로, 감자는 통감자를 조각 내 싹 난 곳이 위로 가게 심는다. 특히 감자나 마늘처럼 이게 먹으면 음식이고 심으면 종자가 되는 순간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죽은 것 같은 것이 어떻게 땅속에 들어가서 싹을 틔울까.

그저 음식 재료로만 보이던 것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니, 우리 영장류들이 겸손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농사가 늘 따뜻한 일만은 아니다. 농사라는 게 식물을 다루는 일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고라니도 쥐도 생각할 일이다. 생명을 기르면서도 생명을 내치기도 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자연 속에서 산다는 건 결국 좋은 것만 택하는 일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까지 함께 감당하는 일이라는 걸 배운다.

이 책은 여기서 땅이라는 존재를 더 크게 묻는다. 땅에 주인이 있고, 그것을 돈 주고 사고판다는 사실이 여전히 신기하고도 납득하기 어렵다. 토지는 공기처럼 애초에 있는 것인데, 그 소유권만으로 생산의 대가를 엄청나게 가져가는 것이 정당한가. 전기, 수도, 도로 같은 공공재보다 더 초 공공재가 있다면 인간이 창조하지 않은 공기와 땅이어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아도, 결국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이렇게 많이 가져도 되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제도나 욕망만큼 도덕과 만족도 중요한 가치가 아니냐고, 화자는 계속 스스로에게 묻는다. 순진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질문이다.

이야기는 다시 가족으로 돌아온다. 공장이 불에 타 가산이 기울었을 때도, 전염병이 돌아 닭과 돼지를 모두 살처분해야 했을 때도, 아빠는 꿋꿋이 버텨냈다. 일터에서 생 손가락 두 개를 잃고도 “손톱 덜 깎아서 좋지. 뭐~”라고 말하던 사람. “바쁘면 좋은 거여.”라고 말하는 이유도, 결국은 언제든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알고 남에게 신세는 지지 말아야 한다는 생활신조 때문이었다. 한편 엄마와의 대화에서는 보청기라는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면 누구라도 지치고, 목소리가 커지고, 결국 짜증이 난다. 잘못은 내 빠른 말과 신호 없이 본론부터 나와버리는 대화법인데도, 별수 없이 엄마에게 실망을 흘려보내고 마는 나. 그 생각이 고약해서 나 자신에게도 실망한다. 그래서 다시 다짐한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자, 엄마의 얼굴과 입을 보고 말하자, 그리고 감사하자. “엄마, 내가 더 잘할게. 엄마를 답답해해서 오늘도 미안해.”

후반부로 가면, 혼자 사는 삶과 관계에 대한 고민도 이어진다. 누군가의 ‘가족의 탄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의 상실’일 수 있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관계를 범주화하고, 선택과 집중을 고민하고, 진한 우정보다 느슨한 연결을 선호하게 된다. 취향을 기반으로 한 관계의 힘을 믿고, 예비 무연고자—비혼 독거인—가 서로를 준가족의 울타리에 담을 방법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양이 이야기가 실려 있다.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존재의 체온. 그 체온이, 밭이 땀 흘린 만큼만 정직하게 내어주던 먹거리처럼, 조용히 하루를 버티게 만든다.

『사이보그 가족의 밭농사』가 끝에 가서 조용히 남기는 말은 분명하다.

삶은 완벽해질 수 없고, 가족은 늘 복잡하며, 몸은 쉽게 고장 난다.

그래도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내일 하고 싶은 것을 품고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이다.흙처럼 정직하게 사람답게 살아보려는 이 기록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푸른향기 서포터즈15기' 활동을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엄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거 같아? 엄마는 인생을 뭐라고 생각해?"
"인생이 뭐가 있니? 목숨 붙었으니 사는 거지."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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