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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잘 노는 어른이 될 거야 - 삶의 인사이트가 넘치는 어른 사용법
이지행 지음 / 푸른향기 / 2025년 11월
평점 :

『아주 잘 노는 어른이 될 거야』는 얼핏 보면 그냥 귀엽고 가벼운 힐링 에세이 같지만, 몇 장만 넘기다 보면 슬쩍 이런 생각이 든다.
“혹시 나… 너무 오래 ‘어른 역할’만 하느라, 나로 사는 법을 까먹은 건 아닐까?”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날카롭게 건드린다.
회사, 집, 책임, 성실함으로 빽빽하게 채운 하루 뒤에 남는 게 묘한 허무뿐인 사람에게, 저자가 슬쩍 웃으면서 말을 건넨다.
“이제는, 조금쯤 잘 놀아도 되지 않겠냐고.”
그렇다고 “퇴사하고 세계 여행을 떠나라”, “비싼 취미 하나쯤 가져라” 같은 뻔한 해답을 내미는 책은 아니다. 거창한 성공 공식을 알려주거나, 현실을 통째로 박차고 나가자고 부추리기보다, 진짜 어른이 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 ‘놀아야 버틸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아주 현실적인 톤으로 들려준다. 그래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나도 좀 재미있게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든다.
무엇보다 저자 이지행의 이력 자체가 이 이야기에 힘을 실어 준다. 연봉 1천만 원 받으며 영화사에서 컵라면으로 버티던 시절부터, 더 배고픈 공연판, 하루 종일 게임만 해도 되는 것 같던 게임회사, 그리고 늘 ‘남들 쉴 때 일하는’ 광고회사까지, 그는 오랫동안 성실과 과로의 세계 한가운데에 서 있던 사람이다. 수천 번의 프레젠테이션과 주말 야근 끝에, 단테가 말한 것처럼 인생의 한가운데 어두운 숲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저 언덕 너머에는 편안한 어른의 삶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정작 어른이 되어 보니 개미처럼 일만 하다 개미지옥 속에 빠져 있는 느낌.
“내가 이러려고 어른이 된 건가?”라는 자조 끝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의외로 단순하다. 어차피 못 놀아도 후회, 놀아도 후회라면 차라리 놀고 후회하자는 것. 그래서 평생의 짝꿍과 옥탑방 하나를 얻어,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한 번 놀아 보기 위해서’ 출근하는 삶을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이 책이 말하는 ‘놀기’가 흔한 탈출 판타지가 아니라, 어른으로서 나답게 버티고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는 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책은 연극처럼 4막으로 구성되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는 “실수투성이 어른의 삶을 어떻게든 나다운 놀이로 바꿔 보려는 마음”이다. 첫 번째 막 ‘어른은 나도 처음이라’에서는 “이러려고 열심히 어른이 된 건가?”, “어차피 인생은 실수투성이다”, 끝없이 비교에 시달리는 마음이 구체적인 장면과 함께 펼쳐진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평생 쫓아온 환상이 사실은 허무한 동경에 불과할 수 있다는 깨달음, ‘이 산이 아닙니다’라는 푯말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느낌이 웃기면서도 씁쓸하다. 그렇다고 냉소로만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애니메이션 속 고길동과 지니를 불쌍한 캐릭터로 랭킹하는 장난스러운 리스트 끝에, 소설 『향수』 속 ‘존재의 냄새를 잃어버린 남자’를 소환해 감정과 눈물을 잃어버린 삶의 위험을 짚는다. 어른이란 만남보다 이별이 많은 나이이기에, 슬퍼할 권리와 함께 울어 줄 능력이 중요하다는 말에서, 이 책이 말하는 “잘 논다”는 것이 결국 더 깊이 느끼고 공감하는 법에 가깝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후 막에서는 옥탑방 아지트 ‘놀고 있네’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강남 빌딩 숲 사이 작은 옥탑방에 부부가 출근하듯 오르내리며 기타를 치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중요한 건 이곳이 무책임한 도피처가 아니라는 점이다. 회사가 망해 가는 현실, 줄어든 수입, 주변의 시선과 내일에 대한 불안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저자는 더 이상 ‘언젠가의 안온한 삶’을 위해 오늘을 끊임없이 유예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떠오른 인용이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다.
조르바는 오늘만 사는 인간이다. 그는 젊은 고용주에게 이렇게 말한다.
“두목, 나는 말요… 금방 죽을 것처럼 삽니다. 산다는 게 이런 것 아닙니까? 죽기 전에 즐겨야죠! 서둘러야죠! 나는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합니다.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생각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야심 차게 준비하던 탄광 사업이 망한 뒤에도, 그는 좌절하는 대신 마지막으로 질펀하게 춤을 추며 말한다.
“보스, 이게 인생 아뇨! 이럴 땐 춤을 춰야 해요.”
실패하면 좀 어떤가, 잃어버리면 또 어떤가, 주어진 오늘 이 순간을 즐기면 그만이라는 이 태도가, 옥탑방에서 “오늘을 잘 놀아 두자”고 결심하는 이 부부의 마음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모두가 따라 부르는 교향곡 같은 정답의 템포 대신, 각자 자기 리듬으로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비유가 더 선명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마흔을 “두 번째 사춘기”라고 부르는 대목도 기억에 남는다. 아이의 부모, 회사의 팀장,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면서 어느 순간 내 이름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저자는 사전에 적힌 ‘어른’의 정의를 되짚으며 어른이란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사람”에 더 가깝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내일은 누구에게나 여전히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는 첫날일 뿐이라는 말과 함께, 거대한 도약 대신 오늘 삼겹살 한 끼를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일, 완벽한 부모 대신 ‘오늘도 겨우 통과한 어설픈 어른’임을 인정하는 일, 1등이 아니어도 내 리듬으로 당당히 넘버투로 살아보겠다는 작은 결심들이 우리를 버티게 한다고 말한다. 재즈 피아니스트 델로니어스 몽크의 “틀린 음도 괜찮다. 그걸 네 식대로 이어가면 그게 재즈”라는 말을 빌려, 엇박과 실수까지도 나만의 리듬으로 이어갈 때 그것이 곧 ‘나다움’이자 ‘아름다움’이 된다고 정리하는 대목에서는, ‘아름답다’의 ‘아름’이 ‘나’를 뜻한다는 설명과 함께 나답게 살아낸 하루의 가치가 또렷해진다.
읽는 동안 가장 좋았던 건, 이 책이 현실을 통째로 부정하거나 모두에게 퇴사를 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밥벌이와 꿈, 책임과 놀이 사이를 부딪히며 조율해 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 주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과, 어른답게보다 나답게 살고 싶다는 오래된 욕구, 그리고 지금 자리에서 조금 덜 죄책감 가지고 쉬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당장 옥탑방까지는 아니어도, 집 한 켠의 작은 공간이나 잠깐의 산책 시간, 혹은 부담 없이 끄적일 수 있는 노트 한 권 같은 ‘나만의 쉬는 자리’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아주 잘 노는 어른이 될 거야』는,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문득 “이러려고 어른이 된 건가?” 싶은 순간이 자주 찾아오는 사람에게, 퇴사와 이직, N잡 사이에서 방향을 잃고 흔들리는 사람에게, 부모와 직장인, 배우자라는 역할 속에서 ‘나’라는 이름이 흐릿해진 사람에게 특히 건네고 싶다. 정답이 없는 인생이라면, 언젠가 한 번쯤 “아주 잘 노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 책은 그 결심 위에 작은 불씨 하나를 더 올려놓는, 유쾌하면서도 은근히 진지한 어른을 위한 삶의 태도 안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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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푸른향기 서포터즈 13기 활동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로 직접 작성된 포스팅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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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80세 노인으로 태어난 어느 아이의 이야기다. 사실 F.스콧 피츠제럴드가 1922년에 발표한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이라는 단편소설이 그 원작이다. 소설은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남자, 즉 늙은이로 태어나 점점 젊어지는 한 남자의 삶을 다룬다. 벤자민 버튼은 태어나자마자, 할아버지와 맞담배를 피고, 세상사에 대해 논쟁하다가 나이가 들어 걷지도 못하는 기저귀 찬 갓난아이로 생을 마감한다. 보통의 인생과 반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늙어가면서 삶의 경험을 쌓고 성숙해진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고 소설은 말한다. 어른으로 태어났다고 한들,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로 태어났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는 거다. 원래 인생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강물이니까 말이다. 세상을 살아보았다 한들, 내일은 또다시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첫날일 뿐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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