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오이
남대희 지음 / 메이킹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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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오이』는 큰 사건보다 우리 주변의 작은 장면을 천천히 바라보는 시집이다. 화려한 표현을 많이 쓰지 않고, 꼭 필요한 말만 남긴다. 그래서 읽다 보면 페이지를 빨리 넘기기보다 잠깐 멈추어 생각하게 된다. 시의 주인공은 낙엽, 가로등, 붕어빵, 흰 꽃, 비 온 뒤 신호등 같은 일상의 것들이다.

이런 평범한 풍경을 통해 시간, 기억, 이별, 사랑 같은 주제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은행잎〉에서는 아침에 문을 열자마자 낙엽이 먼저 지나간다고 말한다. 시인은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햇빛과 바람이 만든 문장이라고 본다. 거창한 사건이 없어도, 가을은 낙엽이 떨어지는 일로 매일 새롭게 써진다는 뜻이다. 즉, 계절은 거대한 드라마가 아니라 작은 변화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이팝꽃이 피었다〉는 피었다는 말은 곧 진다는 말이라고 말한다. 꽃은 피는 순간부터 이미 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흰색을 “고요하고, 환하고, 말없이 어둡다”고 설명하는데, 이 말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흰색은 밝지만, 너무 밝아서 오히려 조용하고 깊다. 그래서 꽃이 피면 바람이 불어오듯, 시작 속에 끝이 함께 있다는 걸 알려준다. 시인은 결국 “꽃은 피면서도 이미 떠나고 있다”고 정리한다. 우리는 보통 피면 기쁘고 지면 슬프지만, 이 시는 두 감정이 동시에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삼거리 붕어빵〉은 겨울 거리의 따뜻함을 잘 잡아낸다. 오래된 이층집 아래 작은 화덕이 불을 품고, 금빛 붕어빵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세상이 잠깐 따뜻해진다. 가로등 아래 쪼그려 앉은 아이의 눈에는 겨울이 구워지는 냄새가 밴다. 이 시는 설명을 길게 하지 않는다. 대신 냄새, 온기, 빛 같은 감각으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가로등 불의 시간〉과 〈가로등 풍경〉은 저녁의 분위기를 차분히 담는다. 가로등이 켜지면 도시가 천천히 저문다. 잊힌 말들이 눈처럼 쌓이고, 멀어진 얼굴들이 불빛 아래 스친다. 가로등은 단순히 길을 비추는 기계가 아니라, 하루 동안 지나간 발자국과 마음을 조용히 기억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불빛 아래 멈춘 그림자들이 말 대신 서로의 체온을 비춘다는 구절도 인상적이다. 말이 없어도 서로의 온기가 전해지는 순간이 있다는 뜻이다.

〈가을날 은행나무 아래서〉는 아주 개인적인 감정으로 들어간다. “죽으면 나비가 될까?”라는 짧은 질문 뒤, 바람이 휙 불고 은행잎이 와르르 날아간다. 그중 한 잎이 어깨에 내려앉는 순간 “엄마 냄새가 난다.” 냄새는 기억을 바로 불러낸다. 이 시는 긴 설명 없이도 독자가 자기만의 ‘엄마 냄새’를 떠올리게 만든다.

〈도시의 네거리〉는 현실의 무게를 보여준다. 비 오는 신호등 아래 우산들이 모여 멈춰 있고, 길모퉁이 붕어빵은 속을 익히는 중이다. 하지만 벤치 위에는 검은 장갑 한 짝이 놓여 있고, 주머니 속 구겨진 영수증을 만지다 보면 내일이 청구서처럼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따뜻함과 걱정이 한 장면 안에 담겨 있다.

도시의 하루가 가진 다양한 느낌을 보여준다.

〈죽은 것들이 만든 풍경 4〉는 상실을 다루지만 지나치게 슬프게만 보지 않는다. 갈대는 알 수 없는 일을 잊지 못해 고개를 흔들고, 보이지 않는 노루의 흔적처럼 땅속 뼈마디에서 김이 오른다. 시는 “가을은 멈추지 않고 / 죽음 곁에도 / 풍경은 그대로 물들 뿐”이라고 말한다. 누군가 떠나도 계절은 계속 흐른다. 이 말은 차갑게 들릴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삶이 계속된다는 위로이기도 하다.

〈해바라기〉는 고흐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헬로 하면 옐로로 대답하지” 같은 장난스러운 말로, 해바라기와 태양의 색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친 하루를 끝내 일으키는 건 복잡한 설명이 아니라, 눈앞을 환하게 밝히는 색과 빛이라는 메시지가 전해진다.

정리하자면, 『고이오이』는 사라지기 쉬운 작은 순간들을 조용히 붙잡는 시집이다. 낙엽 한 줄, 가로등 불빛, 붕어빵의 김, 흰 꽃의 떨림 같은 장면을 통해, 우리는 시간과 기억, 만남과 이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문장은 짧고 여백이 많다. 그래서 독자는 스스로 생각을 채우게 된다. 한 번에 많이 읽기보다, 하루에 한두 편씩 천천히 읽으면 더 좋다. 그러면 평범한 길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신호등 아래의 숨결, 저녁 불빛의 온기, 바람에 흔들리는 낙엽의 소리 같은 것이 더 또렷해진다. 『고이오이』는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시집이다. 소음 많은 날, 마음을 잠깐 쉬게 하고 싶을 때 특히 빛난다.

'메이킹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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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불의 시간

가로등 켜지면
도시는 천천히 저문다

잊힌 말들 눈처럼 쌓이고
멀어진 얼굴들 불빛 아래 스친다

오늘도 한 자락 어둠을
조용히 데우는 중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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