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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그림 찾기 - 차별과 편견의 경계에 갇힌 사람들
박천기 지음 / 디페랑스 / 2025년 9월
평점 :

사람은 왜 누군가를 더 좋아하고(편애), 다른 누군가를 덜 좋아할까? 책은 “편애와 차별은 아주 오래된 역사”라고 말한다. 성서 이야기만 봐도 그렇다. 신이 아벨의 제물은 받아 주고 카인의 제물은 거절했던 순간부터,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집안까지 편애가 가족 갈등과 질투, 소외를 낳는 장면이 반복된다. 조지 오웰이 적은 스페인 아라곤 농부의 예처럼, 때로는 이유조차 불분명한 ‘호불호’가 차별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즉, 차별은 꼭 거창한 이념이나 명령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싫어서”, “왠지 별로라서”와 같은 막연한 감정에서도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할 건 눈에 잘 보이는 차별 장면만이 아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소개한 우화가 힌트를 준다. 경비원들은 손수레에 실린 물건만 검사하느라, 정작 사람들이 ‘손수레 자체’를 훔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친다.
사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누군가의 심한 말, 노골적인 괴롭힘 같은 “보이는 폭력(주관적 폭력)”만 문제 삼다 보면, 그런 일이 반복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규칙과 구조(객관적 폭력)— 예를 들어, 특정 집단을 낮춰 부르는 문화, 승진·선발 과정의 숨은 기준, 우리 모두가 당연히 여긴 말투와 관행을 놓치기 쉽다. 이 책은 겉의 사건만 보지 말고, 선택이 만들고 있는 배제와 그로 인해 생겨난 ‘배제된 사람들’까지 함께 보자고 제안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차별 감정을 당장 0으로 만들자는 식의 구호가 해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제도를 고쳐 차별을 줄일 수는 있어도, 사람 마음속의 불쾌·혐오·경멸을 완전히 없앨 수 있을까?
중요한 포인트는 감정과 행동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차별 ‘행동’과 제도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동시에, 차별 감정이 어떻게 생기고 굳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고치기 어렵다. 이 감정은 보통 비대칭적으로 굳어 ‘편견’이 되고, 밖으로 흘러나오면 ‘차별’이 된다. 게다가 이 감정은 타고난 것만이 아니다. 사회에서 배워진 감정이 많다. 특정 지역이나 성별을 낮춰 부르는 말처럼, 누군가를 한 덩어리로 묶어 별명 붙이고 깎아내리는 말들은 그 자체로 편견을 학습시키고, 한 번 굳어지면 새로운 사실을 보여 줘도 잘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제일 무섭다”는 말은 의미가 크다. 문제의 원인을 늘 남에게서 찾는 태도가 미성숙을 넘어 잔인함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철학은 이 메커니즘을 반복해서 보여 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말을 “bar-bar(어버버)”로 조롱하며 ‘미개’라고 불렀던 일, 움베르토 에코가 “적은 실제로 위험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묘사’되기 때문에 적이 된다”고 한 말은, 다름을 곧 틀림으로 바꾸는 습관이 얼마나 오래되고 강력한지 알려 준다. 이 습관은 가해자만을 망치지 않는다. 차별과 편견의 경계에 갇힌 사람—낙인찍는 쪽도, 낙인찍히는 쪽도—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그래서 필요한 건 ‘경계를 부수는 분노’가 아니라, ‘경계를 알아차리고 건너는 지혜’다. 다리를 놓아 서로 왕래할 수 있게 만드는 변화, 즉 말의 순서·질문의 방식·선발 기준처럼 일상의 설계를 조금씩 바꾸는 일이다.
이 책은 성·언어·관습에서의 이중 잣대도 구체적으로 짚는다. 순결을 여성에게만 과도하게 요구해 온 문화, 남성에게는 같은 기준이 거의 적용되지 않았던 언어의 역사, 한쪽 성별의 권력자에게는 너그럽고 다른 쪽에는 더 가혹한 시선 같은 것들이다. 이런 사례는 차별이 나쁜 마음 몇 개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 언어와 풍습 속에 스며든 절차와 관행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디지털 시대의 문제는 또 다른 층위를 더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백 번 스마트폰을 확인하며, “함께 있지만 혼자(셰리 터클)”라는 역설 속을 산다. 팔로우·좋아요·조회수 같은 숫자는 관계와 존재감을 ‘수치’로 만들고, “선팔·맞팔” 같은 관행은 어느새 인정욕구와 비교 강박을 키운다. ‘FOMO(놓칠까 봐 두려움)’는 불안을 키우고, 온라인 따돌림은 초성·암시·집단 동조 같은 은밀한 방식으로 벌어진다. 피해자는 고통을 또렷하게 느끼지만, 가해자는 장난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 쉽고, 어른이나 교사가 개입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철학자 루소는 마을 축제에서 시작된 ‘발효(사람들 사이에 끓어오르는 감정)’와 ‘모방’이 질투·허영을 낳고, 결국 끝없는 비교 경쟁으로 흐른다고 설명했다. 소셜미디어는 고프먼이 말한 ‘자아 연출’을 초단위 비교로 가속하며, “끝없이 자신을 팔아야 하지만, 아무도 사지 않을지 모른다는 공포”(주보프)를 키운다. 연결은 늘었는데, 외로움과 우울은 더 쉽게 찾아온다. 그래서 걷기·쓰기·생각하기 같은 침묵의 활력을 회복하는 작은 실천과, 휴대폰을 내려놓는 ‘디지털 디톡스’ 같은 시도가 의미를 갖는다.
정신질환을 둘러싼 역사도 “보이지 않는 손수레”를 생각하게 한다. 중세의 마녀사냥, 근대 이후의 수용·격리 정책을 돌아보면, 광인·정신질환자를 사회에 해가 되는 존재로 낙인찍고 통제를 정당화해 온 흐름이 보인다(푸코). ‘정상’이라는 기준이 발명되며, 그에 맞지 않는 사람은 실패의 증거처럼 취급되기도 했다(그린커). 더 안타까운 건, 격리가 만든 문제(고립이 낳는 증상)가 다시 격리의 이유가 되는 악순환이다(고프먼). 언론이 사건을 크게 다룰수록 두려움은 커지지만, 실제로 정신질환자 범죄율이 일반보다 낮다는 데이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책은 위험 요소로만 보는 시선을 넘어서,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 주체로 상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낙인과 격리 대신, 지원과 보호라는 다른 해법이 보인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주제는 지도에서도 드러난다. 메르카토 도법 지도가 항해에는 편리했지만, 유럽과 북미를 실제보다 커 보이게 만든 것처럼, 우리가 익숙하게 믿어 온 ‘표준’은 특정 관점의 산물일 수 있다. 이건 지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중심·방향 개념 자체가 주관적일 수 있다는 경고다. 시야를 우주로 넓히면, 인간은 티끌처럼 작아 보인다. 그렇다고 인간의 존엄까지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버릴 ‘오만’과 지킬 ‘존엄’을 가르는 분별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다. 같은 맥락에서, 인공지능도 사람보다 덜 편향적일 수 있지만, 전제는 인간의 편견으로 오염되지 않은 데이터와 절차다. 다양성과 공정함을 설계에 박지 않으면, 알고리즘은 사람의 차별을 더 빠르고 넓게 복제한다.
마지막으로, 불교 철학의 도움을 받아 분별(차이를 느끼는 감각)을 무조건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분별은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한다. 다만 그 분별이 우열과 배제로 곧장 이어질 때 문제가 된다. 불교는 문자·언어를 전부 버리자고 하지 않고, 그것들을 방편으로 쓰되 한계를 넘어서는 연습을 하라고 권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무상)은 곧 매 순간의 ‘차이’다. 하늘의 구름이 계속 모양을 바꾸지만, 그 변화에 차별의 근거는 없다는 깨달음—차이를 자각하되, 차별로 굳히지 않는 태도가 핵심이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힘은 벽을 망치로 부수는 힘이 아니라, 잔해를 남기지 않도록 건너는 지혜다. 말과 질문의 순서를 바꾸고, 기준의 출처를 투명하게 만들고, 데이터의 깨끗함을 확인하고, 먼저 듣고 나중에 말하는 작은 습관을 늘리는 일. 이런 미세 조정이 차이를 차별로 굳히지 않게 만든다.
“다름을 틀림으로 바꾸지 말라.”
눈에 띄는 사건만이 아니라, 차별을 반복시키는 보이지 않는 구조와 습관을 함께 보라. 차별은 ‘나쁜 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배워 온 말·관행·제도 전체의 문제다. 그러니 분노로 벽을 치는 대신, 질문과 설계 변경으로 다리를 놓자. 감정은 성급히 부정하지 말고, 행동과 제도를 공정하게 바꾸자. 그렇게 매 순간의 차이를 자각하고, 차별로 굳지 않게 돌보는 태도가 우리와 공동체를 덜 아프고 더 단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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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서평단 모집',
'다반/디페랑스 출판사' 도서 지원으로 우주서평단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집단 채팅방에서의 따돌림에는 일정 패턴이 존재한다. 그 첫 시작은 ‘저격 대상‘, 즉 희생양을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격 대상을 향한 저격 글이 올라 오는데, 피해자의 실명을 거론하는 경우보다는 초성을 쓰거나 그만의 특징을 적시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는 나름 교묘한 방식을 채택한다고 한다. 이런 비난의 글들에 이른바’ 바람잡이‘로 초대된 아이들이 동조하는 댓글을 남기며 온라인 괴롭힘에 집단으로 가담하게 된다. 그야말로 그 방식의 치졸함과 치밀함이 상상을 뛰어넘는다.
- 베르퀸시 당국이 남들의 부러움을 유발하는 인스타 과시용 사진 촬영을 공식적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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