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을 빌려드립니다 : 영국 - 인류 역사와 문화의 새로운 발견 박물관을 빌려드립니다
손봉기 지음 / 더블북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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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박물관을 빌려드립니다: 영국편》은 유물과 인물을 통해 사람을 보게 만든다. 전시된 그림·조각·도구를 단순한 설명으로만 다루지 않고, 그 물건을 만들고 붙잡고 살아낸 이들의 마음과 선택, 그리고 그 시대의 공기까지 함께 불러낸다. 그래서 진열장 속 한 점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단순한 전시품이 아니라 과거로 들어가는 작은 문처럼 느껴진다. 그 문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잠시 들여다본다.

이 책은 먼저 대영박물관으로 데려가 중동·이집트·그리스‧로마·아시아·유럽 전시관을 자연스럽게 거닐게 한다. 그중 첫번째 장소는 55번 전시실(중동 전시관)이었다. 여기서 만난 것은 아시리아 마지막 왕 아슈르바니팔의 점토판 도서관이다. 종이가 없던 시대, 사람들은 설형문자를 점토판에 새겨 기록을 남겼고, 그 결과 13만 점에 이르는 점토판이 그들의 생활과 생각을 지금까지 전한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길가메시 서사시』 11번 점토판이다. 기원전 7세기의 홍수 이야기가 적혀 있어 성서의 노아 이야기보다 약 400년 앞선 기록임을 보여 준다. 서사의 중심엔 친구 엔키두의 죽음 이후 영생을 찾아 나선 길가메시가 있다. 그는 불로초를 손에 넣지만 뱀에게 빼앗기고, 마침내 깨닫는다. 영원을 좇기보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사는 것이 인간에게 가능한 최선이라는 사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메소포타미아가 전하는 메시지는 Carpe Diem(카르페 디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다.

이집트 전시실에서는 내세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그들이 꿈꾼 곳은 멀고 낯선 천국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는 자리였다. 결국 잘 산 하루를 쌓는 일이 최고의 준비라는 뜻처럼 느껴졌다. 그리스 전시실의 파르테논 조각과 오디세우스 항아리는, 신의 영생보다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사랑했던 태도를 보여 준다. 늙고 약해지는 한계가 있으니 더 뜨겁게 사랑하고 더 깊게 행복을 느껴야 한다. 여기서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해진다. 박물관은 완벽한 과거를 쌓아 두는 창고가 아니라 지금을 더 잘 살기 위한 힌트를 주는 곳이란 것을.

로마 편은 인물의 궤적으로 읽힌다.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를 외치며 로마로 진군했지만 끝내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당한다. 유언에 따라 조카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유산을 잇는다. 처음엔 카이사르의 부관 안토니우스와 공동 통치를 택하지만,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며 이집트에 기울자 민심은 돌아선다. 옥타비아누스는 최고의 장군 아그리파를 앞세운 해전 승리로 정국을 뒤집고, 로마의 첫 황제가 된다. 그는 힘을 과시하기보다 무상 곡물 배급, 경기와 공연, 도시 정비로 시민의 일상을 바꾸었다. 그래서 “흙더미 위의 로마를 대리석 위에 올려놓았다”는 말이 생겼다. 그러나 화려함 이면에는 늘 불안이 있었다. 토가 속에 갑옷을 입고 호위병 10명을 상시 대동했던 습관이 그것을 말해 준다. 임종 직전의 한마디인, “내 연극이 볼 만했습니까? 마음에 들었다면 박수를.”이란 말을 통해 평생 황제라는 역할을 완벽히 해내기 위해 애쓰면서도 한 사람으로서는 외로웠던 마음을 조용히 드러낸다.

두 번째 무대인 V&A에서는 아름다움이 생활 속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배운다. 하이드 파크와 켄싱턴 궁전을 지나며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을 소개한다. 앨버트는 1851년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를 성공시키고, 그 수익으로 로열 앨버트 홀과 과학·자연사·V&A가 이어지는 ‘박물관 지구’를 닦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도 빅토리아는 뜻을 이어 공간을 완성했다. 좋은 문화 공간은 우연이 아니라 오랜 준비와 애정의 결과라는 점이 또렷해진다.

정문 안에서는 데일 치훌리의 거대한 유리 샹들리에가 먼저 시선을 붙잡는다. 한쪽 눈을 잃은 뒤 비대칭과 불규칙을 자기 언어로 만든 작가답게, 9미터가 넘는 유리의 소용돌이가 로비 전체를 빛과 그림자로 물들인다. 지하로 내려가면 고딕의 창문 트레이서리가 돌로 만든 레이스처럼 서 있다. 데번셔 사냥 태피스트리는 귀족의 사냥 장면과 의복, 문장(‘많은 욕망’), 희귀 모피까지 한 폭에 담아 신분·취향·권력을 ‘보여주고 공유’하던 방식을 설명한다. 지금의 SNS처럼 자신을 알리고 지위를 확인받는 매체였던 셈이다.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카스트 코트였는데, 이름 그대로 진본이 아니라 석고로 본뜬 복제품을 모아둔 전시실이다.

(영단어 ‘CAST’는 쇠를 녹여 거푸집에 부은 다음 굳혀서 만드는 물건을 말하는 것으로 진본이 아니라 복사본을 뜻한다.) “왜 복제품을 모아두었을까?”라는 의문은 곧 풀린다. 유럽 전역을 직접 여행하며 공부하기 어려웠던 시절, 누구나 배울 수 있도록 명작을 실물 크기로 본떠 한자리에 모아 둔, 교육을 위한 공공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 승전비 복제는 실물을 그대로 세울 수 없어 상·하부로 나눠 전시하고, 2층 난간에서 위쪽 장면까지 보게 했다. 다뉴브강 도하→전투→승리 의식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전쟁 자랑이 아니라 로마는 이렇게 기억되고 싶다는 기억의 설계가 보인다. 옆의 미켈란젤로 ‘다비드’ 석고본은 아래에서 올려다볼 것을 계산해 머리와 손을 조금 크게 만든 비례, 보수적 시선 때문에 덮개를 씌웠던 일화까지 알려 준다. 작품은 작가의 의도와 시대의 시선을 함께 읽을 때 완성된다. 마지막으로 본 조반니 볼로냐의 〈블레셋인을 죽이는 삼손〉은 나선처럼 치솟는 소용돌이 구도 덕분에 어느 각도에서도 긴장이 흐른다. 굳게 다문 입, 힘줄 선 팔, 발목을 붙잡고 매달린 상대의 절박한 표정과 같은 감정이 돌 속에 선명하게 비춰진다.

이 책을 덮고 나면 핵심이 또렷해진다. 물건을 보면 사람이 보이고, 과거를 보면 오늘이 보인다. 메소포타미아는 지금을 사는 용기, 그리스는 유한함을 사랑하는 태도, 로마는 힘과 품위의 균형, V&A는 아름다움이 일상에서 자라는 과정을 가르친다. 그래서 박물관은 오래된 것을 모아 두는 창고가 아니다.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선택을 묻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기억을 나눠 주며, 우리가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살아갈지 결심하게 만드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박물관은 과거의 끝이 아니라 오늘을 더 잘 살도록 연결해 주는 시작점임을 이해하게 된다.

'더블북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영단어 ‘CAST’는 쇠를 녹여 거푸집에 부은 다음 굳혀서 만드는 물건을 말하는 것으로 진본이 아니라 복사본을 뜻한다. 17세기 산업혁명으로 부유해진 영국에서는 귀족 자제들을 중심으로 그랜드 투어가 유행처럼 번졌다. 견문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멀리 그리스까지 방문하는 일종의 유학이었다. 하지만 문화적 변방에 위치했던 영국에서 이런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물리적, 경제적 이유로 다른 나라에서 공부할 수 없는 젊은이들을 위해서 유럽의 주요 유적지와 유물을 본뜬 복제품을 만들어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런 복제품을 모아놓은 V&A 전시실이 바로 카스트 코트다. 이곳에서 인기 있는 작품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승전비와 빅토리아 여왕이 이탈리아로부터 선물 받은 석고 주조물을 똑같은 크기로 복제한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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