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단어들 - 삶의 장면마다 발견하는 순우리말 목록
신효원 지음 / 생각지도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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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쓸 수 없는 글. 이 책은 그런 책입니다.

신효원의 《우리가 사랑한 단어들》은 한 번에 읽어치울 책이 아니다. 책장에 꽂아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는 책이다. 글을 쓰다 표현이 막힐 때,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 가슴속에서 ‘사물거리다’ 할 때,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적확한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 이 책을 찾게 된다. 이 책은 단순히 단어를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단어를 몸으로 느끼게 한다. 한 장 한 장을 천천히 펼치며 단어 하나를 오래 바라보고, 입안에서 굴려 보며 ‘이 단어는 이런 맛이었구나’ 하고 맛을 보는 식으로 읽으면 더 좋다.

읽을 때는 먼저 순우리말이 주는 느낌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떠오르는 감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뒤에 뜻을 찾아보면 좋다. 내가 느낀 감정과 사전적 의미가 맞닿을 때의 기분이 오래 남아 그 단어도 오래 남는다. 이를테면 ‘그느르다’를 생각해보면 마음 어딘가가 포근히 덮이는 기분이 들고,

‘다사롭다’를 낮게 중얼거리면 굳어 있던 어깨가 풀리고 호흡이 깊어지는 느낌이다.

누군가의 미소를 보며 ‘상그레하다’고 생각하면 기분 좋은 느낌에 덩달아 웃게 된다.

이유 없이 뒤숭숭한 날에는 ‘사물거리다’라고 스스로를 명명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정서를 안전하게 붙잡아 둘 수 있다. 단어 하나가 표정이 되고, 걸음이 되고, 하루의 태도가 되는 경험이 이 책에서는 자연스럽다.

책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과거의 순간을 기억나게 했던 문장은 ‘찬란한 내 밑줄의 역사’였다.

“오랜만에 불려 나온 밑줄 친 문장들에는 오래전 내 모습이 묻어 있다.

나는 그때 왜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었을까.

그 시간의 나는 조용했고 말이 없었고 힘들었구나,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구나, 그런 마음이었구나, 하고 오래전 나를 고요하게 만난다.”

오래전에 밑줄을 그어 둔 문장들을 다시 불러내며 그 순간의 자신과 조용히 마주하는 글이었다.

나는 왜 그때 그 문장에 줄을 그었을까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시간의 나는 조용했고 말이 없었고 조금은 힘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멋있어 보여서 긋던 줄이 아니었다. 그때의 나를 지탱해 줄 말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었다.

막막함 속에서 손을 잡아 줄 문장, 혹은 언젠가 그렇게 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둔 문장.

밑줄은 결국 내 감정의 연대기였고, 그 밑줄을 다시 읽는 일은 과거의 나를 덜 냉혹하게 이해하는 일이었다.

이 책은 단어의 사전식 풀이가 아니라, 일상의 장면과 몸의 기억을 통해 단어를 되살리는 글들로 이루어진다. 단어 하나와 그에 얽힌 개인적 사연, 그리고 그 장면을 응축한 짧은 시구와 이미지가 한 편의 시화전처럼 이어진다. 덕분에 독자는 단어를 알게 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어를 실제로 겪게 된다. 이는 저자가 단순히 단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내며 그 안에 순우리말을 자연스럽게 심어 둔다. 덕분에 다소 낯설 수도 있는 단어들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온다.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아, 단어는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 사전에서 뜻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 속에서 단어가 어떻게 제자리를 찾는지를 몸소 보여주기 때문에 순우리말이 어렵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고 감성적인 언어로 다가온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책들은 예쁜 말을 소개하는 데 집중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책은 다르다. 말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말을 쓰고 싶게 만든다.

저자의 경험이 담긴 에세이가 단어의 쓰임을 가장 정확한 온도로 전달하고,

그래서 독자는 “좋은 단어를 알게 되었다”가 아니라 “나도 오늘 이 말을 한 번 써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덮게 된다.

후반부에 가면 저자가 아끼는 말들을 접할 수 있다.

‘마음새’와 ‘마음자리’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지를 묻는 말처럼 다가온다.

마음새를 감사의 일들로 다듬고, 마음자리엔 쉽게 상처 내는 칼을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보짱’은 낙관이 아니라 지속의 언어다. 흔들려도 버티게 하는 침묵의 힘이 그 말 안에 있다.

‘돋되다’는 하루의 작은 상승을 기꺼이 인정하게 만들고, ‘도두보다’의 시선을 더하면 무엇이든 한 번 더 좋게 기울여 보고 싶어진다. ‘내풀로’는 타인의 기대를 과하게 짊어지지 않고 내 호흡과 속도를 회복하는 주문처럼 들린다. ‘또바기’는 사랑과 신뢰의 기준을 마련해 주고, ‘소롯이’와 ‘오롯하다’는 간직과 충만의 언어로 나란히 선다. 마지막으로 ‘아람’은 시간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준다.

성급한 성취 대신 익음의 시간을 통과하겠다는 약속, 그래서 떨어져도 품위 있는 무게를 얻겠다는 약속이 그 한 단어에 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내려 갈 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글을 쓸 때마다, 혹은 표현하지 못한 감정에 헤맬 때 참고하기 좋은 책이라서,

책장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아야 할 책이라고 느낀다.

오늘의 마음에 맞는 단어를 하나 고르고, 그 말을 입안에서 조용히 굴려 보다가,

그 단어가 이끄는 방향으로 하루를 조금 기울이면 충분하다.

책을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우리에게 순우리말을 알려주는 역할뿐만 아니라,

새로운 언어를 통해 자신을 돌보는 메세지까지 함께 전하는 것 아닐까.

오늘의 마음을 가장 잘 설명하는 한 문장, 한 낱말이 마음에 담기면,

그 언어는 태도가 되고, 하루의 질감을 바꿀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결국, 이 책이 가르쳐 주는 것은 말을 통해 나를 이해하고,

나를 이해함으로써 더 다정하게 살아가는 법인 것 같다.


'생각지도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오랜만에 불려 나온 밑줄 친 문장들에는 오래전 내 모습이 묻어 있다.
나는 그때 왜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었을까.
그 시간의 나는 조용했고 말이 없었고 힘들었구나,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구나, 그런 마음이었구나, 하고 오래전 나를 고요하게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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