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9 - 박경리 대하소설, 3부 1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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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토지 9권(3부 1)』은 3·1운동 이후의 거친 시대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고 무엇을 고르는지 조용히 따라가는 이야기다. 처음에 나오는 “뿌리 없는 나무도 없고, 열매 없는 나무도 없다”는 말이 이 권 전체를 이끈다. 뿌리는 우리 각자의 과거와 가족, 고향이고, 열매는 오늘 해야 할 선택과 책임이다. 나는 뿌리를 없애야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인정하고도 한 걸음 내딛는 용기가 더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무대는 간도와 용정, 하얼빈, 그리고 평사리로 이어진다. 만세의 함성은 잦아들었지만 체포와 감시, 흩어진 가족,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이 남는다. 자연은 먼저 봄을 보여 준다. 얼음이 녹아 강물이 흐르고, 까치는 지푸라기를 물어 나르고, 번데기가 몸을 흔들어 나비가 되려 한다(9권 p247). 추운 겨울을 버틴 다음에야 따뜻한 계절이 오는 것처럼, 사람들도 그렇게 버틴다.

서희는 오래 준비한 끝에 조준구와 마주선다. 집을 넘기는 자리에서 서희는 두 가지를 딱 잘라 말한다. 양심을 가져갈 것인지, 오천 원을 가져갈 것인지 고르라고 한다. 조준구는 돈을 고른다. 그 순간 서희가 크게 웃는다. 그 웃음은 단순히 “이겼다”가 아니다. 오래 의심하던 조준구의 속마음을 스스로 드러내게 만들었다는 시원함, 길게 끌던 싸움이 끝났다는 가벼움, 그리고 상대의 낮은 선택을 바라보는 차가움이 섞인 웃음이다. 나는 이 장면이 통쾌한 응징이라기보다 “판단을 끝낸 순간”처럼 느껴졌다. 말싸움으로 누르지 않고, 선택의 자리로 끌어내어 스스로 답하게 만든 점이 서희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에 쥔 승리와 마음의 평안은 다르다. 아이들을 얻고 집을 되찾아도 서희의 가슴에는 바람이 분다. 긴 세월의 결핍이 남긴 허기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길상과의 사이는 가깝지만 멀고, 환국과 윤국을 향한 애틋함은 때로 불안과 집착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는 상처가 채워지는 동안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채운 뒤에도 모습을 바꿔 계속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홍이는 이 권에서 유난히 마음을 끈다. 월선의 죽음 뒤에 그는 흔들리고, 생모 임이네를 받아들이지 못해 거칠게 굴기도 한다. 그래도 끝내 아버지 용이를 찾아 산으로 들어가 섣달 그믐에 함께 내려온다. 홍이는 그 길에서 어른의 문턱에 선다. 용이는 예전의 호기와 기세가 사라지고 병든 몸으로 삶과 죽음 사이를 서성인다. 말은 줄었지만, 지나온 날들의 무게가 더 크게 느껴진다. 나는 부자의 화해가 큰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겨울바람을 함께 맞는 조용한 시간에서 시작된다고 느꼈다.

한복이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낙인 때문에 언제나 문턱 앞에서 멈춰야 했던 사람이다. 함께 노래하고 외치고 싶어도 스스로를 묶어 두어야 했다. 그러다 드디어 역할을 맡고, 길상이 한복이를 온몸으로 끌어안는다. 그때 한복이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분명히 확인한다. 나는 옳다고 말하는 것보다 자리를 내어 주고 일을 맡기는 행동이 사람을 살린다고 생각했다.

김두수는 점점 더 어두워진다. 처음에는 흔한 악한처럼 보였지만, 권력에 기대고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면서 끝내 금녀를 망가뜨리는 지점까지 간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약한 자가 더 약한 자를 밟는 모습이 되풀이된다. 이런 흐름을 보면 한 사람의 타락을 성격 탓만으로 말하기 어렵다. 나는 분노가 필요하지만, 분노만으로는 길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구조를 알아야 분노가 정확해지고, 그래야 바꿀 힘이 생긴다.

평사리의 사람들은 늙고, 병들고, 떠난다. 한때 마을의 중심이던 사내들은 이제 탕숫국을 기다리는 나이가 되고, 아기였던 아이들은 거칠지만 가능성이 보이는 청년이 된다. 이 교대의 풍경은 앞서 본 봄의 풍경과 겹친다. 강물이 흐르고 둥우리가 쌓이고 번데기가 깨어나는 것처럼, 사람의 삶도 그렇게 변한다. 봄은 달콤하기만 한 계절이 아니라, 아프게 몸을 일으키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문턱에서 백정들이 쫓겨나는 장면은 이 권의 중심에 놓인 문제다. “신 앞의 평등”이라는 말은 있지만, 현실에서는 문턱을 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자신을 받아 주는 곳으로 향한다. 이것은 교리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맞아 주느냐 밀어내느냐의 문제다. 나는 정의가 정답을 말하는 입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맞아들이는 손에서 시작된다고 느꼈다.

상현 같은 청년은 방황한다. 배운 것은 많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신여성”을 둘러싼 시선도 흔들린다. 만세 이후의 허탈, 윌슨의 민족자결, 러시아의 혁명, 최재형의 죽음 같은 시대의 사건들은 인물들의 마음을 흔드는 바람이 된다. 이 소설은 사건을 장식처럼 세우지 않고, 사건이 사람의 속으로 들어와 체면, 두려움, 의기, 허무를 건드리는 모습을 따라간다. 그래서 이 권에서 감동은 크고 화려한 장면보다, 장터의 소음, 집안의 언쟁, 식탁의 한숨, 아이들이 잠든 뒤의 정적 같은 아주 구체적인 순간에서 온다고 느꼈다.

마지막에 다시 서희로 돌아온다. 조준구와의 매듭이 지어져도 서희의 길은 끝나지 않는다. 복수는 마음을 가볍게 해 주지 않고, 사랑은 마음을 완전히 붙들어 주지 않는다. 그래도 서희는 더 이상 과거에만 묶여 있지 않다. 아이들이 있고,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고,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서희가 내게 남긴 표정은 “승리의 환호”가 아니라 “책임의 미소”였다. 크지 않지만 단단해서 오래 남는 표정이었다.

결국 9권은 각자 자기 뿌리를 안고 오늘의 열매를 맺으려는 사람들의 기록이다. 서희는 판단을 끝내고 다음 걸음을 뗀다. 홍이는 상실을 지나 어른이 되는 길에 선다. 용이는 약해진 몸으로도 기억의 무게를 견딘다. 한복이는 일을 맡아 공동체의 품으로 들어온다. 김두수는 더 깊은 어둠으로 내려가며 우리가 고쳐야 할 문제를 드러낸다. 이들 곁에서 계절과 역사, 문턱과 환대, 체면과 행동의 갈등이 한 줄로 이어진다. 나는 이 책이 큰 구호 대신 작은 결심을 남기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오늘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시작하라고,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해 주는 이야기였다.



#채손독 을 통해 #도서협찬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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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究竟)열반한들 그것이 무엇이랴. 석가여래께서 입멸하셨을 적에 많은 성문들은 어찌하여 울었더란 말이냐
죽음이기 때문일 것이며, 다시 만나볼 수 없다는 슬픔 때문일 것이며… 형체가 있고서야 마음을 보지 아니하겠는가.
마음 없는 형체는 물건이요. 형체 없는 마음은 실재가 아니지 아니한가.
목숨이 오고 가고, 오고 갔을 뿐인데 육도윤회라 하는가. 윤회는 무엇이냐.
내가 모르는 윤회는 없는 것이며 내 목숨 간 곳을 모른다면 그것은 내 목숨이 아니지 아니한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 아아 ㅡ 어느 곳에도 실성은 없으니, 사멸전변, 내가 없도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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