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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인 계획
야가미 지음, 천감재 옮김 / 반타 / 2025년 8월
평점 :

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 있는데,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나의 살인계획』. 처음 책을 펼쳤을 때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겠거니 했다. 그런데 읽어갈수록 ‘계획’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묘한 섬뜩함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주인공 다치바나는 문학 편집자로 오래 일해온 사람이다. 신인을 발굴하고, 기획을 통과시키고, 작가와 마감 사이에서 씨름하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흥미로운 건 그가 편집자라는 본업 외에도 ‘소설가bot’이라는 SNS 계정을 만들어 글을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스스로도 글을 써야 더 좋은 편집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어쨌든 그는 그렇게 일과 글쓰기 사이를 오가며, 출판계에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갔다. 하지만 잘 나가던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날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면서, 그가 애써 쌓아온 길은 순식간에 끊겨버렸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 정체 모를 한 통의 원고가 도착한다. 처음에는 그저 또 다른 투고 원고인 줄 알았는데, 그 안에는 살인 예고가 적혀 있었다. 농담인가 싶어 넘기려 했지만, 원고 속에는 날짜가 있었고, 구체적인 경고가 이어졌다. 농담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의 일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다치바나의 불안에 동화됐다. 그가 의자에 앉아 담담하게 기록하는 문장들이, 오히려 더 큰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오늘은 이렇게 준비했다”는 그의 말투가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등골이 서늘했다.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 일기 속에 내가 공범처럼 함께 휘말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야기의 시점은 계속 바뀐다. 다치바나의 시선에서 시작했다가, 미사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끼어들고, 또 때로는 범인의 기록처럼 보이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이 사람이 범인일까, 아니면 저 사람이 범인일까. 의심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심지어 처음엔 순수하다고 여겼던 인물들까지 의심하게 되면서, 책장을 넘기는 내 마음도 덩달아 예민해졌다.
특히 미사라는 인물은 참 복잡하다. 그녀의 삶은 시궁창에 가까웠다. 사랑받지 못한 채, 사회적 시선과 왜곡된 가치 속에서 자란 그녀는 결국 ‘예뻐야만 살아남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성형수술 비용을 모으기 위해 몸부림치며,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녀의 방식을 따라할 생각은 없지만, 목표를 위해 불가능할 정도로 몰입하고, 결국 성취하는 과정은 묘한 매력을 지닌다. 한편으론 그 열정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책을 읽다 보면 순간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살인 장면이 묘사될 때는 글자만으로도 현장이 눈앞에 그려져서, 숨소리조차 삼키고 책장을 넘기게 된다. 범인에게 들킬까 봐 내가 스스로 긴장하는 이상한 체험이었다. 정말이지 “심장아, 나대지 마”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중간중간 나를 멈춰 세우는 문장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편집자의 세계를 그린 부분은 실제로 출판 일을 엿보는 듯 흥미로웠다.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 기획과 마감의 싸움, 그리고 한 권의 책이 독자에게 전달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을 거치는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또 미사의 시선에서는 ‘루키즘(외모 지상주의)’이나 ‘에이지즘(나이 차별)’ 같은 단어들이 튀어나온다. 그냥 개념어로 지나가는 게 아니라, 그녀의 삶을 파고든 진짜 현실로서 다가온다. 그래서 읽는 내내 불편하면서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긴장은 더 고조된다. 앞부분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들이 하나씩 연결되며 큰 그림이 완성된다. 그때 느낀 충격은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통쾌함과 함께 온다. 나는 책장을 덮고도 오래도록 그 장면들을 되새겼다.
『나의 살인계획』은 오싹한 이야기만을 남기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상처와 왜곡된 철학은 불편하면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범죄는 멀리 있지 않다”는 메시지가 은근히 스며든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마음속에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의 평범한 하루는 어디까지 안전한가?” 원고라는 익숙한 것이 살인 예고로 바뀌는 순간처럼, 우리의 일상도 언제든 균열이 생길 수 있다.
나는 원래 무서운 이야기를 잘 읽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들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막상 펼쳐보니, 긴장되는데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무섭다고 피하기만 했던 내가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빠져든 소설. 읽는 내내 긴장이 몰려왔지만, 동시에 몰입의 즐거움을 새삼 깨달았다. 아마도 이게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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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반타 출판사'로부터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나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나타내는 인격은 결국 살아오면서 보고 느끼고 결험하고 생각한 것들이다. 모든 경험이 그 사람의 성격이 되고, 가치관이 되고, 인격이 된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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