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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불행 - 부서지는 생의 조각으로 쌓아 올린 단단한 평온
김설 지음 / 책과이음 / 2023년 6월
평점 :

김설의 에세이 『다행한 불행』은 제목처럼 모순을 끌어안은 책이다. 불행을 미화하지도, 장황하게 늘어놓지도 않는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날들 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버티고 무엇으로 다시 일어서는지 차분히 보여준다.
작가 프로필의 문장 “사는 대로 쓰고, 쓰는 대로 살고 싶다”가 특히 마음에 남는다. 글을 쓰려 들면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치던 순간과 감정에 자연스레 초점이 맞춰진다. 그냥 흘려보냈을 말이나 장면도 기록하려 마음을 기울이다 보면 새 이야기가 된다. 『다행한 불행』의 글들은 그런 과정에서 태어난 기록에 가깝다. 힘든 경험도 글 속에서는 담담한 고백이 되고, 때로는 유머와 통찰로 바뀌어 독자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건넨다. 그래서 “사는 대로 쓰고, 쓰는 대로 살고 싶다”는 말은 삶을 더 세밀히 바라보고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용기로 다가온다.
책의 시작은 엄마의 결혼 이야기다. “끝내 이혼을 선택하지 않은 엄마는 마흔 살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연애 때는 서로에게 매혹되었으나 결혼의 시간은 집요한 불행으로 기울었다. “부부 사이에 증오나 미움이 끼어들면 가정은 회의감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된다”는 문장은 저자의 유년을 관통한 진실이자, 이후 자신이 맺는 관계를 바라보는 기준이 된다. 결혼은 길을 걷다 맨홀에 빠지거나 다이아몬드를 줍는 확률의 게임 같고, 타인과 함께 살겠다는 뜻 자체가 어쩌면 무모한 도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은 뒤에는 생존이 먼저였다. 돈은 늘 모자라고 미래는 불투명했다. 그래서 그는 온갖 일을 해본다. 청소, 판매, 대리운전… 이게 아니면 저거라도라는 마음으로 다양한 일을 하게 된다. 시작은 늘 두려웠지만, 끝내고 나면 두려움 대신 오기가 남았다. 가난과 결핍은 무거운 족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추진력이 되었다. 한 번 크게 곤궁을 겪고 나니 웬만한 불행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이 생겼다. 저자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오늘을 버티는 힘을 갖는다.
관계의 장에서는 다른 종류의 상처가 다뤄진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해서 상처가 생기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더 깊어지는 상처도 있다. 배우자의 무기력과 무관심은 그 자체로 칼이 될 수 있다. 한동안 저자와 남편은 서로를 탓하고 비판했다. 시간이 지나 보니 둘 다 비슷했다.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상대를 통제하려 들었던 것이다. 이 깨달음 이후 그녀는 오히려 바꾸려는 노력을 멈춘다. 대신 무너지지 않게 옆에 있기로 방향을 바꾼다. 누군가가 믿고 기다려주는 행동만으로도 사람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자 그 관계는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포기에 대한 태도도 인상 깊다. 저자는 체념과 초월을 번듯한 말로 포장하지 않는다. 결국은 내려놓기라고, 한 번은 “모르겠다” 하고 발을 빼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포기가 도망이 아니다. 나를 갉아먹는 기대와 타인을 옥죄는 집착을 잘라내는 선택에 가깝다. 이 태도는 생활 방식으로도 이어진다. 각자의 방을 쓰기로 한 결정이 그렇다. 이는 사랑의 약화가 아니라 존중의 확장이다. 각자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자기 리듬대로 숨 쉬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함께 사는 두 사람이 서로의 공간과 내면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는 것은, 오히려 관계의 온도를 적정하게 유지시킨다. 부부라고 해서 삶 전체를 항상 같이 공유하거나 겹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행운과 불운을 다루는 방식도 명쾌하다. 한동안 그는 운이 없다고 자주 말했지만, 지금은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말이 현실을 마술처럼 바꾸지는 않지만, 일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꾼다. 병은 재발하지 않았고, 오래 바라던 자신의 방이 생겼고, 각방을 쓰면서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위태로운 줄 위에서 간신히 버티던 삶이 어느 순간 줄 위에서 노는 법을 배워간다. 비결은 거창하지 않다. 적당히의 힘, 중간지대의 지혜다. 과하게 달리지지도, 완전히 주저앉지도 않으면서 오늘의 신호에 속도를 맞춘다. 오늘은 빨간불에 자주 걸렸지만 내일은 다를 수 있다는 경험이 쌓일수록 불행을 내일로 끌고 가지 않게 된다.
이 책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축은 유머다. “어떻게 그 힘든 세월을 살았냐”는 질문에 작가는 주저 없이 유머라고 답한다. 유머는 현실을 희석시키는 얄팍한 웃음이 아니라, 정면으로 버티게 해주는 완충 장치다. 힘든 날이면 그녀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나는 여기에 살러 온 게 아니라 관광하러 온 거야.” 소매치기를 당해도, 직업 체험이 엉망이어도, 다음 행선지는 또 있다고 믿는다. 이 가벼운 농담이 몸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저자는 폭로에 가까운 기록을 책으로 엮어내는 동안, 그녀는 “전쟁의 처참함에 대해 쓸 때는 처참함을 고발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털어내려고 쓰는 것”이라고 말한 로맹 가리의 말을 자주 떠올렸다고 한다. 그 말에 기대어 그는 진실과 비밀 사이를 오가며 자신을 조각냈고, 조각난 채로도 전진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 보니 알게 된다. 예기치 못한 불행이 오히려 내 안의 어떤 부분을 단단하게 만든 사실 말이다.
그렇다면 그 불행은 결과적으로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역설이 책의 제목을 납득하게 만든다.
읽고 나면 몇 가지 태도가 오래 남는다. 누군가를 이상하다고 쉽게 규정하지 않으려는 주의, 완벽한 소통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인정, 행복이란 어떤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 덤처럼 따라오는 성질이라는 이해. 그래서 그녀는 이제 인생을 굳이 찬란하게 만들려 들지 않는다. 반짝임을 애써 만들기보다, 매일의 생활에서 작게 기쁜 것을 찾는다. 남편이 술을 간절히 원하는 날이면 “독을 사는 기분”으로 카트에 맥주를 담으면서도, 그 선택이 오늘의 평온을 지킨다는 걸 안다. 과함과 결핍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그녀의 문장은, 우리에게 삶을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보자고 권한다.
다행한 불행』은 한 사람이 버티고 살아내기 위해 써 내려간 실험 노트 같다. 불행은 언제든 불쑥 찾아오고 우리는 종종 무력해지지만,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또 다른 문이 열린다. 그 문을 직접 열고 들어가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문장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저자는 상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되, 그 상처가 삶 전체를 지배하지 않도록 적절한 거리를 둔다. 바로 그 태도가 이 책이 전하는 가장 현실적인 위로다. 현재 삶이 불안정해 흔들리는 이들, 사랑과 결혼의 무게에 지친 이들, 스스로를 늘 운이 없다고 탓하며 부정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책은 특히 유효하다. 남은 시간을 후회 없이 더 단단하게 살아내고 싶다면, 이 책이 든든한 연습장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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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이음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나는 아무리 부부라도 타인이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남편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오류였다. 변화를 간섭하는 건 오히려 변화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때부터는 그저 이 사람이 무너지는 것만 막아주자는 마음으로 옆에 있었다. 남편은 어설픈 협박이 먹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은 관심받고 지지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내가 자기를 믿고 기다려준다고 느낄 때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 게 보였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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