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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슬며시 - 살짝 망하고 조금 귀엽게
시미씨 지음 / 느린서재 / 2025년 5월
평점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괴물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몇몇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고 하지 않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걸 행복이라 부르는 거야.”
시미씨의 만화책 『행복은 슬며시』는 이 말과 꼭 닮아 있다. 특별하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작고 사소한 순간들을 행복으로 그려낸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까만 털복숭이 반려견 ‘단’이 있다. 시댁에 화재가 나면서 갈 곳을 잃게 된 강아지, 연탄처럼 까맣다고 해서 ‘탄’이라 불리던 녀석이 어느 날 저자의 집에 들어왔다. 이름을 바꾸자니 혼란스러울까 걱정도 되었지만, 결국 “단 하나뿐인 존재”라는 의미를 담아 ‘단’이라 부르게 된다. 그 순간부터 단은 단순히 함께 사는 반려동물이 아니라, 가족이자 삶의 중심이 된다.
저자는 처음에는 누군가를 돌볼 여력이 있을지 두려웠지만, 시간이 흐르며 오히려 자신이 돌봄을 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산책길에서 신나게 폴짝거리며 웃는 모습,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깜빡 잠이 드는 순간, 밤에 나란히 누워 고르게 이어지는 숨소리까지, 단과 함께하는 매 순간은 사랑스럽다. 새벽까지 이어진 작업으로 생활 패턴이 흐트러지고,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이 겹쳐 하루가 망했다고 느껴질 때조차 단의 발바닥에서 은근히 풍기는 꼬순내는 세상을 다시 다정하게 물들이곤 한다.
이 책은 2019년 단이와 함께한 시간들을 그림일기처럼 기록한 것이다. 반려인 ‘진’, 귀여운 ‘단’, 그리고 분량은 적지만 잠깐씩 얼굴을 비추는 도마뱀 ‘도마’까지. 이 작은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담겨 있다. 산책길에서 낯선 강아지를 만나면 크게 짖어버려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뜻밖에 얌전히 어울리며 “앞으로는 괜찮아질지도 몰라” 하는 희망을 품게 한다. 예전처럼 폴짝폴짝 뛰어오르던 단이 어느 날은 힘겹게 침대에 오르거나 다리를 절뚝거릴 때면 걱정으로 마음이 무겁고, 분리불안 때문에 상담실을 찾았던 날의 긴장감마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미씨의 그림은 단순하면서도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화려한 기교 대신 여백과 선, 표정에 집중해 등장 인물들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담아낸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단의 눈빛과 표정에서 마음이 읽혀지고, 독자 역시 함께 “귀여워! 귀여워!”를 연발하게 된다. 말티즈와 푸들의 교배종을 ‘말티푸’라 부른다는 소소한 정보조차 단의 그림과 어우러져 귀여움의 한 장면이 된다. 페이지 사이사이에는 단의 사진도 함께 실려 있어 단의 까만 털과 반짝이는 눈, 산책하는 뒷모습, 신나해하는 순간들을 볼 수 있다.
『행복은 슬며시』는 그림책이라 단숨에 읽어버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 장면 앞에서 오래 머물게 된다. 한번씩 찾아오는 공허함과 불안감을 붙잡아 주는 건 진과 단의 존재였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곁에 있던 장면을 알아차리는 순간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단과 함께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저자의 삶도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에는 낯선 개를 마주칠까 괜히 돌아가던 길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치며 하루는 한층 더 단단해졌다. 독자는 그 과정을 따라가며 저절로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고, 반려견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깊은 공감을, 키우지 않는 사람이라도 ‘단’ 같은 귀여운 강아지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품게 되기도 한다.
『행복은 슬며시』는 단순한 반려견 만화를 넘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행복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시댁에서 갑작스레 일어난 화재가 계기가 되어 맺어진 인연이었지만, 함께 살아가며 집안의 공기와 일상의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는지, 그 변화가 삶을 얼마나 부드럽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책 속 장면들을 읽다 보면 우리가 흔히 지나치는 일상조차 새삼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이 책은 거창한 이론이나 정의를 내놓지 않는다. 대신 작은 하루의 조각들을 보여준다. 이 책은 연탄처럼 까맣던 털복숭이 강아지 ‘단(단 하나뿐인 존재)’과 새로운 삶을 열어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지쳐 쓰러진 하루에도 단을 바라보며 피어나는 웃음 속에서 깨닫게 되는 마음과 행복은 요란하게 다가오지 않고, 언제나 우리 곁에서 ‘슬며시’ 스며든다는 사실을 따뜻하게 일깨워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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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는 시간 잠들기 전이면 그런 시간이 많았다. 특히나 아무 걱정없이 평온하다는 생각이 들면 어김없이 현재를 그리워하는 시간 빛이 밝을수록 짙어지는 어둠처럼 막연한 불안이 커질수록 더없이 애틋해지던 평범한 날들이 있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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