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8 - 박경리 대하소설, 2부 4권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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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8권』은 “이제 어디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갈까”를 묻는다.

흉년이 들고, 왜놈들은 “문서가 없다”는 말로 사람들의 땅을 빼앗는다. 병이 나도 약 한 첩 못 짓는 집이 태반이다.

이런 바닥의 현실에서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이 생존의 자리 위로 종교와 정치 이야기가 포개진다. 스님과의 긴 대화 속에서 불교·유교·동학·태평천국·백련교가 오가지만 결론은 단순하다. 멋진 말이나 내세의 약속보다, 지금 당장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먼저라는 것. 억압이 깊어질수록 돈과 힘이 손을 잡고, 그 틈에 낀 평범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피해를 본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이 부분은 8권 전체의 기초가 되는 부분 같다. ‘왜 싸우느냐’보다 ‘무엇으로 버티느냐’를 묻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이제 인물들이 제자리를 다시 잡는다. 길상은 더 멀리 나가 독립운동을 돕기로 마음먹는다. 서희는 집 안에서 남은 삶을 지키며 “돌아갈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김개주의 아들 김환과 환이(구천)가 등장하면서, 피와 역사, 사랑과 죄책이 한꺼번에 꿈틀거린다. 작가는 ‘반역의 피’를 눌려 살던 사람들이 "이대로는 못산다"라고 말하며 일어서는 마음으로 보여 준다. 김환은 그 기세를 타고났지만 방향을 잘 못 잡아 흔들리고, 환이는 길상과 서희, 이동진의 오래된 상처를 다시 건드린다. 나는 여기서 ‘반역’이 단순한 불온함이 아니라 살아 보려는 발버둥이자 더 나은 삶을 향한 힘으로 읽혀졌다.


이 책의 정점은 월선의 병세와 마지막 밤이다. 옹이는 다 식어 가는 월선을 무릎에 안고 “우리 많이 살았다, 여한 없제?”라고 묻는다. 월선이 고개로 답하자, 그는 고요히 이불을 펴고 작은 얼굴을 쓸어주며 눕힌다. 장식 없는 이별이 품격이 되는 순간이다. 그 옆에서 죽은 이의 돈을 노리는 임이네의 모습은 더 추하게 보인다. 옹이는 남 탓만 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아오며 저지른 잘못을 떠올리고, 남은 날을 바르게 살려 한다.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이 사랑은 끝났지만 예의와 품격은 남는다.


서희의 마음은 그보다 더 큰 파도를 지난다. 조준구와 홍씨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돌아가서 다 갚겠다”는 분노가 치밀지만, 그는 끝내 마음을 다잡는다. 분노를 좇다 보면 아이들과 자신의 삶이 무너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서희는 계산으로 조준구를 무너뜨리고, 아이 둘의 손을 잡고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길상은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서희의 길은 ‘지금 여기서 가족을 지키는 일’, 길상의 길은 ‘밖에서 더 크게 싸우는 일’로 갈라진다.

나는 이 선택을 파탄이 아니라 각자 중요한 것을 선택한 것으로 읽고 싶었다.

서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몫이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김두수는 반대로 더 어두운 쪽으로 깊어진다. 금녀를 쫓아 하얼빈까지 가고, 총을 맞고도 이익부터 계산한다. 그는 독립세력의 재산까지 노린다. 거창한 말은 필요 없다. 김두수에게 탐욕이 있었고, 돈과 힘이 한패가 된 세상은 그런 사람을 더 빨리, 더 높이 올려 주었다. 그러니까 김두수의 악행은 그 사람만의 문제이면서, 그런 사람을 키워 주는 세상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이 조합은 앞으로의 더 큰 비극을 예고한다.

한편, 이 모든 소용돌이 뒤에서 시간은 묵묵히 흐른다. 누가 이겨도 외로움은 그림자처럼 붙고, 상처는 쉽게 낫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늘을 다시 추스른다. 서희는 돌아갈 준비를, 길상은 떠날 준비를, 옹이는 남은 날을 단정히 살아갈 준비를 한다. 책의 마지막에 남는 마음은 울분만이 아니다. 주먹을 꽉 쥔 분노가 아니라, 조용하지만 단단한 결심이다. 지금 당장 완벽히 이기지 못해도 내 자리를 만들며 버티겠다는 결심이다.


『토지 8권』은 선악을 가르는 판결문이 아니라 살 길을 찾는 사람들의 기록이다.

월선의 마지막은 “사랑은 끝까지 돌보는 일”임을,

서희의 결심은 “생존도 전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길상의 선택은 “해방에는 값이 따른다”는 현실을 보여 준다.

김두수의 행로는 “나쁜 마음을 더 키우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일깨운다.

큰 구호 대신, 오늘을 살아내는 힘과 자세를 묻는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음이 쓸쓸하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앞으로 걸어갈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다음 9권이 기대되게 만드는 8권이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더럽고 아니꼬운 놈들만 잘사는 이눔의 세상 아니오? 도둑질 많이 하는 놈일수록 잘살고, 신령님이 있긴 어디 있어? 신령님? 복장 터지는 얘기지."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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