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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의 진짜 직업
나심 엘 카블리 지음, 이나래 옮김 / 현암사 / 2025년 8월
평점 :

철학자들의 ‘진짜 직업’은 무엇일까? 철학자들은 실제로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을까? 나심 엘 카블리의 『철학자들의 진짜 직업』은 철학을 거대한 사유의 역사로만 보지 않고, 철학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고대 라틴어 격언인 “먼저 살고, 그다음에 철학하라”처럼, 철학자들도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먹고 살아야 했다.
책 속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유명한 철학자뿐 아니라, 덜 알려진 인물들의 이야기도 함께 담겨 있다. 그들의 직업은 매우 다양했다. 예상대로 과학자, 교사, 화술가 같은 직업도 있었지만, 재즈 피아니스트, 사이클 선수, 오토바이 수리공 같은 뜻밖의 직업들도 등장한다. 심지어 노예였던 철학자 에픽테토스,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철학자들의 삶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전문 철학자”라는 이미지와는 크게 달랐다.
책을 읽으며 특히 눈길을 끈 인물은 스피노자였다.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정교수직을 제안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렌즈 세공사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렌즈를 갈아 생계를 유지했지만, 이 일이 그의 철학적 태도와 맞닿아 있었다. 그는 “사물을 실제 존재하는 그대로 보라”고 강조했는데, 이는 광학기기를 통해 보이지 않던 세계를 관찰하는 것과 논증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는 과정이 똑같다는 의미였다. 스피노자는 육체노동과 지적 노동을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았고, 손으로 렌즈를 깎는 일이 곧 진리에 다가가는 철학적 행위라고 여겼다.
한나 아렌트의 경우도 흥미로웠다. 그녀는 독일에서 망명한 후 기자로 활동하며 현실을 기록했다. 기자로서는 사실을 빠르게 전달해야 했고, 철학자로서는 사건의 맥락을 길게 바라봐야 했다. 서로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아렌트는 이를 ‘공개성’이라는 개념으로 연결했다. 그녀가 말한 공개성은 단순히 정보를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공적 토론의 장이었다. 아이히만 재판 보도는 큰 논란을 불러왔지만, 아렌트는 물러서지 않고 지적 용기를 보여주었다. 기자이자 철학자로서, 그녀는 철학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디오게네스의 사례는 조금 특별하다. 그는 위조 화폐를 만든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불법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체계의 모순을 드러내려는 철학적 행동이었다. 그는 사회가 곡물 같은 필수품에는 낮은 가치를 매기고, 보석 같은 사치품에는 높은 가치를 매기는 불합리를 비판했다. “공식적으로는 진짜지만 실질적으로는 가짜”라는 화폐의 모순을 폭로한 그의 행동은, 개처럼 살라며 위선을 거부했던 견유학파 철학자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파스칼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철학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직업을 가졌다. 그는 파리 최초의 대중교통 시스템인 ‘다섯 솔 마차’를 발명한 사업가였다. 파스칼의 발명은 단순히 교통수단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철학적 사유와 닮아 있었다. 그는 수학적 계산으로 신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증명했던 것처럼, 비용과 효율을 따져 교통 시스템을 설계했다. 신앙과 계산, 철학과 사업이 한 사람 안에서 공존했던 것이다.
몽테뉴의 양녀로 불렸던 마리 르 자르 드 구르네도 눈에 띈다. 그는 몽테뉴의 『에세』를 교정하고 편집했을 뿐 아니라, 초기 페미니즘 사상가로서도 활동했다. 그녀가 18세에 『에세』를 접하고 인생 전체를 바꾸게 된 이야기는 책 한 권이 지닌 힘을 잘 보여준다. “다른 이들은 지혜를 가르치지만, 몽테뉴는 어리석음을 지우는 방법을 가르친다”라는 그녀의 말은 몽테뉴의 철학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나 또한 이 대목에서, 책 한 권이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몽테뉴가 기억력이 좋지 않음을 여러 번 고백한 작가라는 점을 떠올리며, 그의 『에세』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히파티아라는 인물은 처음 접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이자 수학자, 천문학자였던 그녀는 큰 영향력을 지녔지만 결국 광적인 수도사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녀의 저작은 전해지지 않지만,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흰옷의 여성 인물이 히파티아일 것이라는 추측은 이미 여러 차례 들어온 그림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했다.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어떤 업적을 더 남겼을지, 아쉬움이 깊게 남았다.
『철학자들의 진짜 직업』은 철학자들을 책 속의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현실에서 일하고 먹고살아야 했던 인간으로 보여준다. 스피노자가 렌즈를 갈며 진리를 보았고, 아렌트가 기사를 쓰며 시대를 기록했으며, 디오게네스가 위조 화폐를 만들며 사회의 위선을 고발했다. 파스칼은 마차를 발명하며 사람들의 이동을 바꾸었고, 마리 드 구르네는 한 권의 책을 통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철학은 결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단순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직업 속에서 철학의 뿌리를 찾아보게 만든다.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꾸고, 생계의 노동이 곧 사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새삼 일깨워준다. 그래서 이 책은 철학사를 다시 읽는 동시에, 철학이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 숨 쉬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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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암사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1662년 파스칼 덕분에 파리에서 최초의 대중교통 시스템이 탄생했다. 바로 ‘다섯 솔(당시 화폐 단위) 마차’로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날 파리대중교통공사(RATP)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다방면의 천재로 산술 기계와 초기 기계식 계산기를 발명하기도 한 파스칼은 또한 철학자이자 공학자로 우리가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교통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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