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멍 - 하루 한 장, 시와 함께
박유녕 엮음, 피에르 조제프 르두테 그림 / 플레이풀페이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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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무렵, 활짝 핀 꽃을 바라볼 때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꽃은 사랑과 감사를 전하는 선물이자, 슬픔보다 기쁨을, 미움보다 따뜻함을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심리학적으로도 꽃을 보면 행복감과 감사함이 증가하고,

공감 능력이 높아지며 스트레스가 줄어든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꽃멍』은 꽃이 주는 긍정적인 힘을 책 속에 담아낸 한 권이다.

이 책 속 꽃 그림은 범상치 않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식물 세밀화 화가로 꼽히는 피에르 조제프 르두테의 작품이다. 그는 약 2,100종의 꽃을 정밀하게 그렸으며, 꽃잎의 결, 잎맥, 빛의 방향까지 과학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예술적 감성을 잃지 않았다.

사진처럼 사실적이면서도 살아 숨 쉬는 듯한 그의 꽃 그림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시선을 사로잡는다.

꽃의 곡선과 색채를 세밀하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 좋은 향기가 번지는 듯하다.

『꽃멍』에는 윤동주, 한용운, 김소월, 김영랑, 정지용 같은 한국의 대표 시인들뿐 아니라

W. B. 예이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윌리엄 워즈워스 등 동서양의 거장 24명의 시가 실려 있다.

1부 ‘사랑’, 2부 ‘열정’, 3부 ‘그리움’이라는 주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명한 작품보다는 덜 알려진 시를 중심으로 엮어 새로운 감상을 가능하게 했다.

저자는 시를 읽을 때 전문적 해석보다는 오롯이 ‘나’와 시가 마주한 순간의 감정에 집중하길 권한다.

이는 마치 르두테의 꽃을 오래 바라보며 느끼는 잔잔한 울림과 닮았다.

이 책은 장미의 이야기를 서두에 풀어낸다.

붉은 장미는 사랑과 정열의 상징으로, 그리스 신화 속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의 전설을 품고 있다.

아도니스가 죽자 달려가던 아프로디테가 장미 가시에 발을 찔러 흘린 피가 붉은 장미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장미는 동화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속에서도 사랑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미녀는 장미 가시에 찔려 깊은 잠에 빠지고, 오직 사랑의 키스로만 깨어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장미를 볼 때 사랑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지 않는가?

책 속에는 ‘읽기보다 가만히 응시하기’라는 짧은 글이 실려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깊이 바라보며 멍하니 있을 때, 대상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이 있다.

꽃도, 시도 마찬가지다. 천천히, 오래 바라볼 때만이 전해지는 속삭임이 있다.

이 책에 실린 시 중 특히 마음에 남았던 몇 편을 꼽아 보자면,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노천명

언뜻 보면 한적한 시골에서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은 단순한 소망처럼 보이는 시다.

그러나 노천명의 삶을 돌아보면 이 시는 고독과 스스로를 지키려는 마음의 기록에 가깝다.

어릴 적 친일 행위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고, 평생 독신으로 홀로 살아야 했던 그녀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이름 없는 여인’으로 살고자 했다.

그것은 낭만이 아니라 고단한 생의 끝에서 찾고자 한 마지막 평온이었을거라 생각하니

딱하고 가엾은 마음을 일게 했던 시였다.

〈반디불〉 윤동주

짧지만 강렬한 시다. 어둠 속 작은 불빛인 반딧불은 희망과 순수의 상징이다.

윤동주의 시 세계에서 ‘빛’은 절망 속에서 꺼지지 않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억압 속에서도 꺼지지 않던 시인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멈추지 않는 강물의 이미지는 곧 인생의 흐름을 상징한다.

사랑과 이별, 기쁨과 슬픔이 섞인 삶의 무상함을 서정적으로 풀어낸 시다.

〈하얀 국화가 피던 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하얀 국화는 절제된 슬픔과 고요한 추모를 품고 있다.

릴케는 한 송이 꽃에 계절과 마음의 결을 담아 차분한 사색에 잠기게 한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힘든 순간, 이 책을 펼쳐 보면 어떨까?

직접 받은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르두테의 그림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선물이 될 수 있다.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데 장미를 살 수 없는 순간이 온다면 『꽃멍』이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꽃과 시가 함께 전하는 위로는 오래도록 남아 다시 꺼내 읽을 때마다 새로운 향기를 풍긴다.

『꽃멍』은 시와 그림이라는 두 예술이 만나 감성과 시선을 확장시키는 특별한 책이다.

시인의 언어가 꽃의 색과 향기를 품고, 꽃의 모습이 시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완성한다.

이 책은 ‘빨리 읽기’가 아니라 ‘오래 바라보기’를 가르쳐준다.

꽃과 시를 사랑하는 이라면 곁에 두고 계절마다 다시 펼쳐보면 좋을 책이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플레이풀페이지(소용)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이름없는 여인 되어
- 노천명(1912~1957)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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