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쇄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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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일단 마음 먹고 칼을 집었으면 - 파쇄』는 장편소설 『파과』의 외전이자,

주인공의 10대 시절 한 장면을 담은 단편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시대적 배경은 1963~1965년 정도라고 한다.

그 시기는 박정희 정권 시절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는 주인공의 나이나 직업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읽다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다양한 추측을 하게 된다.

이야기는 깊은 산속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손과 발이 결박된 채 깨어난다.

시야는 가려져 있고, 풀잎의 촉촉함과 흙 냄새, 공기의 온도, 새소리만이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하게 한다. 실장이라는 인물은 무사한지, 소리를 내야 할지, 숨죽여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시각이 차단된 채 청각과 촉각에만 의지하는 상황이 나까지 숨을 죽이게 만든다.

주인공은 묶인 손을 풀기 위해 돌로 결박을 풀고 있을 때,

스륵— 젖은 바지 위로 발목에서 다리를 따라 천천히 올라오는 감촉이 느껴진다.

반가운 마음에 하마터면 “실장님” 하고 부를 뻔했다는 대목에서, 나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데 그것은 사람의 손길이 아니라 뱀의 포복이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공격으로 간주되어 물릴 수 있고, 독사라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주인공은 어깨가 들썩이지 않도록 호흡을 줄이며 버틴다.

뱀은 그녀의 몸을 젖은 나무나 바위로 여겼는지 나른하게 몸을 옮기고, 머리부터 기다란 몸통이 옆구리와 어깨를 스치며 지나간다.

그 순간, 나 역시 숨을 멈춘 채 이 상황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바랐다.

나는 그 순간 그녀와 같이 그곳에 함께 존재했다.

그 공포와 막막함이 온전히 나에게 느껴졌는데,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남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 극한의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된 경위를 재빠르게 파악하기 위해

산장에 오게 된 첫날부터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다.

산장에서 함께 있는 ‘그’라는 인물이 ‘실제 현장’에서는 총보다 이걸 더 쓰게 될 거라며 칼을 들어 보인다.

그 말투나 몸짓이 내일 날씨는 맑고 구름 한 점 없겠다고 하는 예보 같은 톤이어서 위협 비슷한 무언가도 읽어내지 못하고, 와서 자세히 보라는 뜻인 줄 알고 무심코 몇 발 걸음 다가가는데, 칼날이 눈앞의 허공을 사선으로 가른다. 그 순간 나 조차도 덜컥 겁이나며, 이 인물이 결코 안전한 존재가 아님을 경각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총과 칼을 다뤄야 하는 상황과 ‘실제 현장’에서 이것들이 쓰인다는 말 때문에 이들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그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한 지점이다.

그 이후에도 그녀를 단련시키기 위한 다양한 훈련이 병행된다.

처음 위험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실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자로,

주인공을 훈련시키기 위해 특별 지시를 받은 인물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는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인한 존재로 만들어야하는 인물처럼 보였다.

예상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으로 그녀를 몰아넣는 것도, 모든 것이 계획된 훈련 과정의 일부였다.

그 공간은 매 순간 긴장을 놓칠 수 없는 곳이었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녀는 간첩을 처리하기 위해 정부가 비밀리에 길러낸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것!

물론 책에서 그런 설정을 명시하진 않았다.

그저 읽는 과정에서 시대적 배경과 훈련의 성격이 맞물리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상상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인공은 자신이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 점차 자각하는 듯했다.

앞으로 수많은 시체의 산을 쌓을 손, 자르고 찌르고 태우는 불모의 손.

과녁이 아닌 생명을 쏘고, 빼앗고, 파괴하는 삶이 시작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 손은 무언가를 죽임으로써 무릎 아래 깔린 사람을 살려내기도 할 것이다.

폭력과 구원, 파괴와 보호가 한 손 안에 공존하는 아이러니가 그녀를 흔들었다.

평범했던 과거와는 영영 결별하게 될 예감, 그리고 자신이 침몰하게 될 높은 확률을 직감하면서도 그 길을 받아들여야 함을 인지했다.

작가 구병모는 이 주인공을 완전무결한 인물로 그리지 않는다.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은 유해한 감정과 건강하지 않은 사고도 품은 채 살아간다.

오히려 그 결격이 주인공을 매력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래서 독자는 이 인물을 단순히 ‘킬러가 되어가는 과정’으로만 보지 않고,

불완전한 모습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흥미로웠던 점은, 간첩이나 강인한 상대를 제거해야 하는 킬러와 같은 설정이라면 흔히 남성 캐릭터를 떠올리기 쉽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여자’라는 이유로 나약하다고 여겨지는 고정관념을 깨고,

오히려 남성과 동등하게 — 혹은 그 이상으로 — 극한의 상황을 돌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여성이라는 존재가 단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의 장에서도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스스로의 서사를 써 내려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하다.

결국 『파쇄』의 주인공은 성별에 구속되지 않는 힘과 결단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복합적인 면모를 끝까지 증명해낸다.


'최규리 북스타그램 @guulyy_'님을 통해

'위즈덤하우스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앞으로 수많은 시체의 산을 쌓아나갈 손, 자르고 찌르고 태워버릴 불모의 손, 과녁 아닌 생명을 쏘고 나서야 악탈과 섬멸의 언어로밖에 표현할 길 없는 삶을 시작했음을 알게 되고 지나온 보통의 시간과 평생을 걸쳐 이별하게 되리라는 예감, 높은 확률로 예정된 자기 침몰의 방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죽임으로써 무릎 아래 깔린 사람을 살려낸 손이라는 총체적인 아이러니가 콧속을 시큰하게 찔러오다 뒤흔든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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