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데이즈 제프 다이어 선집
제프 다이어 지음, 서민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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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무언가의 ‘처음’에 집중한다. 하지만 저자는 『라스트 데이즈』에서 ‘끝’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 책은 인생의 종착점, 창작의 마지막, 관계의 퇴장처럼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 순간들을 조명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끝나간다는 건 끝났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마지막이야말로 가장 진한 의미를 남긴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 책을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 즉 ‘로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는 로저가 은퇴를 앞두고 보여준 경기 장면을 통해, 몸이 더 이상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더라도 여전히 우아하고 품위 있게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한다. 그 장면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끝나가는 시간 속에도 품위와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책은 로저 페더러에 관한 전기나 스포츠 회고록이 아니다. 로저는 말년의 스타일, 예술의 마지막 태도에 대한 사유를 이끌어내는 출발점일 뿐이다.

저자는 로저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자신의 중년기 변화, 육체의 쇠퇴, 창작에 대한 회의, 점점 줄어드는 가능성 속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마음을 탐색한다. 그 흐름은 철학자 니체, 음악가 베토벤과 바그너, 시인 필립 라킨,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작가 헤르만 헤세 등의 인물들로 확장된다. 저자는 이들의 말년 작품과 삶의 마지막 태도들을 따라가며 한 가지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우리는 어떻게 끝을 맞이하고, 그것을 어떻게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책의 중후반부에서 저자는 시각 예술을 통해 시간의 감각이 깨어났던 경험을 들려준다. 독서 중 문득 감정이 예민해지는 순간들, 그는 이를 “readerly spots of time”이라 부르며, 시각 예술이 그런 각성의 순간을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특히 프리드리히의 그림은 저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니체 독본』, 『이 사람을 보라』의 표지에서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단번에 알아보았던 경험을 회상한다. 안개 낀 숲, 언덕 위의 고목, 침묵과 황혼의 폐허가 담긴 이미지들은 자신이 막연히 느끼던 감정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저자에게 시각 예술, 문학, 음악은 각기 다른 영역이 아니라, 서로 밀어주고 감각을 확장시키는 하나의 흐름이다. 프리드리히의 그림에서 느낀 고요한 분위기,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에 대한 생각,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에서 전해지는 깊은 감정은 이 책 전체에 잔잔하게 흐르는 공통된 감성으로 이어진다.

특히 저자는 니체의 말을 인용하며 삶의 끝자락에서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태도에 주목한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선언으로 유명하지만, 동시에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하루, 적어도 한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하라”고 조언한 인물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말을 떠올리며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라고 감탄한다. 삶이 무겁고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느껴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작지만 따뜻한 실천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거창한 철학이나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하루에 한 번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다. 저자는 이것을 ‘친절이라는 일상의 윤리’로 해석한다.

저자는 또한 음악을 통해 시간과 감정이 뒤섞이는 방식을 탐색한다. 그는 바그너와 니체의 관계를 돌아보며, 두 사람이 결국 등을 돌렸지만 예술에 대한 열정만큼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니체는 바그너에서 벗어난 뒤, 음악은 “가볍고도 깊이 있어야 한다”고 했고, “독일적인 것이 아닌 남쪽의 것”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니체는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저자는 니체가 외롭고 괴로웠던 토리노 시절 이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면,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 상상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낸다.

이처럼 이 책은 철학과 예술, 문학과 음악을 넘나들며 끝과 마주한 이들의 모습을 통해 말년의 시간에도 여전히 가치 있는 삶이 가능함을 말한다. 그것은 위대한 결과나 업적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더 이상 무엇을 이루지 않아도, 존재 그 자체로 빛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라스트 데이즈』는 그런 책이다. 삶의 끝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그 마지막 순간이야말로 오히려 가장 깊은 울림과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프리드리히의 고요한 풍경, 니체의 조용한 조언, 베토벤의 음악, 로저의 움직임이 이 책에서 하나로 이어지는 이유는 결국 같다.

끝나가는 모든 것 안에도 여전히 무언가가 태어나고 있다는 사실,

저자는 그것을 조용하지만 단단한 문장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끝을 두려워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제는, 끝의 모양까지도 내 방식대로 만들어보고 싶다.”라고 말이다.

'을유문화사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인간과 시간을 벗어난 6000피트 저편"의 한 점 위에 서 있는 프리드리히의 방랑자가 경험하는 풍경. 영원회귀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된 순간은 그와 같은 절정의 경험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가치를 재평가하겠다는 시도는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엄청난 미완으로 남겨질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니체가 그런 시도를 하는 과정 중에 제시했던 소박한 제안들을 기억하자. 신의 죽음을 선포한 것으로 유명한 자칭 안티크리스트는 아침에 기도를 드리는 종교적 예식 대신에, "깨어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하루 적어도 한 사람에게라도 기쁨을 줄수 있을지 생각하라"고 권고한다.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이른바 "마음의 예의"를 옹호한 니체는 이후 쉽게 조롱의 대상이 된 캘리포니아 문화의 미덕인 습관적인 친절을 극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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