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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서양
니샤 맥 스위니 지음, 이재훈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6월
평점 :

서양 문명은 정말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돼 로마, 기독교, 르네상스, 계몽주의로 이어졌을까?
그 계보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누가 선택했고, 또 누가 빠졌을까?
니샤 맥 스위니의 『만들어진 서양』은 바로 이 질문의 이면, 즉 우리가 ‘서양’이라 부르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추적한다. 우리가 학교에서, 박물관에서, 미디어 속에서 익숙하게 접해온 ‘서양 문명’이라는 이름의 역사에는 실은 수많은 선택과 배제가 깃들어 있다. 이 책은 그 서사의 기원을 되짚고, 그 안에서 누구의 이름이 강조되고 누구의 목소리가 지워졌는지를 섬세하게 파헤친다.
이 책은 14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서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해부한다.
그들은 사상가, 예술가, 과학자, 때로는 종교인이나 시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그들의 업적보다도 그들이 ‘서양 문명의 대표’로 선택된 방식이다.
그 선택의 이면에는 문화적 편견과 정치적 목적, 인종과 성별, 계급이 얽혀 있다.
서문 「기원의 중요성」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문제를 분명히 드러낸다.
‘기원’은 단순히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정치적 선택이다.
서양 문명이라는 거대한 이야기는 원래 여러 문화와 민족, 사상이 얽혀 만들어졌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단순하고 일직선적인 이야기로 고정되었다.
저자는 이처럼 정해진 서사를 다시 풀어내고, 더 넓고 다양한 서양의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필리스 휘틀리였다.
18세기 미국의 흑인 노예 소녀였던 그녀는, 열여덟 살에 시집을 내며 문학사에 기록된다.
그러나 그녀가 시를 썼다는 사실은 당시 백인 사회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법정에 불려나와 라틴어 문법과 성서 지식, 시적 수사에 대한 시험을 받았고,
결국 시의 진위는 인정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자유를 얻은 후에도 사회적 보호는 없었고, 극심한 가난과 자녀들의 죽음을 겪으며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휘틀리는 그저 ‘뛰어난 흑인 시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서양 고급문화의 족보’라는 허상을 뒤흔든 인물이었다. 이 책에서 그녀의 삶은, 선택된 서양 문명의 서사에 ‘포함되지 못한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배제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허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책에는 필리스 휘틀리 외에도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중 한 명인 헤로도토스는 흔히 ‘역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최초의 역사가가 아니다. 그보다 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에는 이미 역사 기록이 존재했고, 그가 태어나기 200년 전에는 고대 그리스어로 된 역사 저술도 있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는 역사적 사건을 단순히 나열하는 대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초점을 맞추며 역사 서술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글에는 환상적이고 기이한 이야기들이 많았고,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거짓말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리스 바깥의 세계, 비서양 세계에 대해 열린 시선으로 기록했고, 이것이야말로 후대가 만든 서양 중심 서사와의 결정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이 책은 바로 그 간극을 지적한다. 우리가 ‘서양’의 기원을 말할 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누락하고 있는지를.
르네상스 시대의 툴리나 다라고나도 이 책의 중요한 인물이다.
여성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그녀는 남성 중심의 사유 공간에서 당당히 목소리를 냈고, ‘감각’과 ‘이성’의 조화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녀는 서양 철학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녀의 삶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성적 주체성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지워졌다. 저자는 이런 배제의 반복이 서양이라는 개념을 얼마나 폐쇄적이고 제한된 틀로 고정시켜 왔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프랜시스 베이컨은 ‘근대의 시작’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경험을 중시하는 과학적 탐구 방식의 선구자로 추앙받는다. 처음에는 동명인인 화가가 생각났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베이컨은 근대 과학의 기반을 닦은 사상가를 말하고 있다. 이 책은 베이컨의 역할을 보다 다층적으로 조명한다. 그는 단지 관찰과 실험을 강조한 근대 과학의 기반을 닦은 사상가만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적극적으로 계승하고 미화한 지식인이었다. 17세기 영국에서 고대 문명을 ‘진정한 서양’의 표상으로 삼아 현재 유럽 문명의 정당성을 구축하려는 흐름 속에서, 베이컨은 ‘서양의 기원’이 고대 그리스-로마에 있다는 인식을 강화한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서양’이라는 개념은 점차 그리스-로마의 미학과 이념을 중심으로 단일화되었고, 나중에는 제국주의적 정당화의 사상적 근거로 작동하게 된다.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서양’은 정말 그렇게 찬란하고 선형적인 진보의 결과인가?
아니면 수많은 편집과 삭제, 오해와 왜곡의 결과로 만들어진 신화인가?
『만들어진 서양』은 위대한 인물을 다시 쓰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인물들을 통해, 우리가 위대하다고 믿어온 서양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선택적이고 정치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동시에 이 책은 배제된 사람들의 기억을 복원하고, 그들이 진정한 ‘서양’의 일부였음을 증명하는 데 집중한다.
이 책은 역사라는 무대에서 누가 중심이 되고, 누가 배제되어 왔는지를 다시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이 오늘날 우리의 정체성과 세계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함께 성찰하게 만든다.
📌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독자
- 서양 문명사와 철학, 문화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찾고 있는 독자
- 인문학 전공자 혹은 서사와 권력의 관계에 관심 있는 이들
- 기존의 위인전에서 느꼈던 피로감, 혹은 의문을 가지고 있던 사람
- 여성, 흑인, 주변부 인물의 역사에 주목하고 싶은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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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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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틀리의 성취는 명백히 놀라웠다. 법률로 노예제를 보장하고 인종주의를 그 구조의 핵심적인 신념으로 삼는 식민지 사회에서 흑인 노예이자 젊은 여성이 서양의 고급문화를 안다는 것은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휘틀리의 생애와 저작은 앞선 장에서 조지프 워런과 그의 혁명파 동료들이 선전한, 인종에 뿌리를 두고 생물학적 혈통으로서 틀을 갖추었던 서양 문명이라는 발상에 담긴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상상된 서양의 족보에 속할 수 없는 휘틀리와 같은 사람들이 그 문화적이고 지적인 유산에 그토록 숙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휘틀리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써 생물학적 서양이라는 이념에 도전한 셈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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