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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속물근성에 대하여 - SBS PD가 들여다본 사물 속 인문학
임찬묵 지음 / 디페랑스 / 2025년 6월
평점 :

책을 읽는 내내 묘한 이끌림을 느꼈다. 찻잔, 위스키, 정장, 도자기 인형 같은 사물 이야기에 자꾸 빠져들었고, 어느새 검색창을 열고 해당 브랜드나 물건을 찾아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그 순간, 지금껏 외면해온 내 안의 ‘속물근성’이 드러나는 것 같아 슬쩍 당황했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면 아마도 저자의 문장에 제대로 설득당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의 속물 근성에 대하여』는 제목처럼 남성적 시선의 고백으로 시작되지만, 읽다 보면 이 이야기는 성별을 초월해 누구나 품고 있는 내밀한 욕망과 취향의 이야기라는 걸 깨닫게 된다. 소비와 선택이 단지 경제적 판단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은 “나는 술을 좋아한다”는 고백으로 시작된다. 폭탄주로 시작해 와인을 거쳐, 결국 싱글몰트 위스키에 다다르는 여정은 단순한 음주 경험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이자 성숙해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위스키의 역사와 브랜드, 문화적 배경을 공부하며 저자는 술을 단순히 마시는 행위가 아닌, 어떻게 즐기느냐에 대한 태도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이 술에 얽힌 한국 사회의 풍경도 함께 그려낸다. 저자는 술을 “국가가 허용한 마약”이라 표현하며 허무함을 견디기 위해, 내일을 버텨내기 위해 술이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면죄부이자 생존 전략이 되어왔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왜 어떤 술은 그냥 마시는 것으로 끝나고, 어떤 술은 취향이나 개성처럼 여겨지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칸트의 ‘취미판단’이라는 개념을 끌어온다. 칸트는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단순히 감정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는 나름의 이성과 기준이 함께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술을 대하는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단순히 술을 마신다는 행위가 아니라, 어떤 술을 어떻게 즐기느냐는 것이 결국 그 사람의 취향과 삶의 감각을 보여주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책은 이렇게 개인적인 취향에서 시작해 역사와 철학, 사회를 향해 확장된다. 홍차에 얽힌 이야기도 그러하다. 지금은 마트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홍차가 사실은 영국과 청나라를 전쟁으로 몰아간 주역이었고, 티 캐디라는 잠금장치에 보관될 만큼 귀했던 시대가 있었다. 이 한 잔의 차에 담긴 식민주의의 그림자와 제국의 탐욕을 되짚어보는 과정은 단순한 식품 소비를 넘어서는 역사적 성찰로 이어진다.
그의 시선은 도자기와 인형으로도 확장된다. 영국 도자기 브랜드의 장인정신, 얇고 단단한 본차이나 기술, 그리고 유럽 귀족들 집의 벽난로 위에 올려졌던 스태퍼드셔 도그 인형! 이 인형이 귀족들이 기르던 킹 찰스 스패니얼 외형을 본떴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중산층의 신분상승 욕망을 반영한 결과였다는 설명은 그저 귀엽기만 했던 인형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만든다.
인형 하나에도 시대정신과 계급의식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가 참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뿐만 아니라, 한복과 정장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전통의 품격을 해치지 않는 창조적 변형에 대해 고민하고, 폴란드 군복에서 유래한 서양 정장을 공자의 ‘회사후소’ 개념과 연결시켜 형식과 격식의 의미를 되묻는다. 이 모든 이야기의 끝마다 철학자, 역사학자, 사상가들의 목소리가 조용히 배치되어 있다.
사물의 이야기는 그렇게 철학적 사유로 이어지고, 단순한 감상이 아닌 성찰의 형태로 다가온다.
책의 후반부에는 저자의 PD 시절 이야기가 담긴다. 레바논 공습 당시 위험지역에 직접 들어가 취재했던 경험. 피난길에 올라 목숨을 걸고 카메라를 들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 저자가 기억하는 것은 전장의 풍경뿐이고, 정작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 순간 그는 깨닫는다. 인간보다 프로그램을 우선시했던 자신에게 부족했던 건, 바로 ‘공감’이라는 자질이었다고. 그래서 그는 묻는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시험은 수능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측정하는 ‘공감능력시험’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책은 교양 프로그램처럼 구성되어 있다. 각 챕터는 에피소드처럼 읽히지만, 그 안에는 역사, 철학, 정치, 사회학이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국 홍차의 역사와 아편전쟁, 청나라에 처음 들어온 수입 비누의 가격, 양반 전용 전통 소주가 희석식 소주로 마케팅되며 신분 이미지를 확장한 이야기, 그리고 소스타인 베블런의 ‘과시소비’ 이론과 베블런 효과 등등 그 모든 요소가 이 책 안에서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
결국 이 책은 한 사람의 취향이 어떻게 세계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이 좋아하는 물건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 속에는 그 사람의 기억과 문화, 가치관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사물은 단지 기능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시대의 풍경이자, 인간의 욕망이자, 공감을 위한 매개체가 된다.
🎯 이 책은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 사물에 담긴 이야기와 역사적 맥락을 탐험하는 걸 좋아하는 분
- 음식, 술, 패션, 차, 도자기 등 일상 속 ‘물건’에 관심이 많은 분
- 교양 있는 에세이를 즐기고, 인문학적 시선을 품은 글을 좋아하는 분
- ‘속물’이라는 말에 거부감보다는 솔직한 호기심을 느껴본 적 있는 모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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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서평단 @woojoos_story 모집',
'다반/디페랑스 출판사' 도서 지원으로 우주서평단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술을 좋아한다. 사람이 먹는 것 중 술만큼 사치스러운 것이 있을까? 그냥 먹어도 될 쌀과 포도를 응축해서 청주와 와인을 만든다. 그것도 모자라 불을 지펴 수증기를 방울방울 모아 증류주를 만든다. 서양 사람들이 증류주를 spirit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재료인 곡물이나 과일의 영혼만을 모아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쌀 한 됫박으로 지은 밥을 한 번에 다 먹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걸로 만든 술은 두 병이고 세 병이고 먹어 치운다. 기근이 들었을 때 괜히 금주령이 내려진 것이 아니다. 술 한 병 만들 쌀로 죽을 끓이면 한 가족이 몇 끼니는 버텼을 테니, 이 얼마나 큰 사치인가. 이렇게 만든 술과 딱 맞는 음식을 찾아 즐기면 이런 호사가 또 없다. 술은 부족한 맛은 지워 주고 즐기고 싶은 맛은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준다. 그뿐인가. 내가 닫아 두었던 감각과 감정들을 해방시켜 평소라면 느끼지 못했을 것들을 끌어내 주기까지 한다. 술잔을 앞에 두면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도 술술 풀리게 마련이다.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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