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사유 - 위대한 화가들이 마지막 그림으로 남긴
크리스토퍼 니브 지음, 김다은 옮김 / 사람in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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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들”

크리스토퍼 니브의 『불멸의 사유』는 미술사에 대한 통찰을 넘어, 삶과 죽음, 기억과 시간에 대한 사유를 깊이 있게 담아낸 책이다. 특히 이 책은 예술가들의 ‘후기 양식’을 중심으로, 그들이 삶의 끝자락에서 남긴 마지막 작품들에 주목한다. 책을 열자마자 독자를 맞이하는 프롤로그부터가 깊은 인상을 남긴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전례 없는 고립의 시간 속에서 예술가들의 ‘후기 양식’—즉, 죽음을 앞두고 예술가들이 도달한 표현의 마지막 지점—에 주목한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매일같이 들려오던 사망 소식과 고요한 도시 풍경, 그 속에서도 피어난 제비꽃과 패모꽃을 회상하며 “슬프고도 아름다운 봄이었다”고 쓴다. 이 감정은 이 책이 일관되게 유지하는 정조이자, 예술가들의 말년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의 핵심이기도 하다.

책은 폴 세잔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세잔은 죽을 때까지 그림만을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는 작업을 위해 직접 작업실을 지었고, 익숙한 붉은 물병, 푸른 그릇, 흰 그릿, 크림색 접시, 낡은 책상, 활처럼 휘어진 테이블 그리고 작업용 해골까지—낡고 익숙한 물건들을 곁에 두고 그림을 그렸다. 작업실에 둔 ‘해골’은 특히 눈에 띈다. 그냥 소품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세잔에게는 그저 그런 물건이 아니었던 것 같다. 죽음을 상징하는 이 해골을 곁에 두고 그림을 그렸다는 건, 그가 삶과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세잔은 끝까지 배우고자 했고, 그 응시 속엔 어쩌면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어떤 질문이 있었던 것 같다.

세잔은 예민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그와 가까웠던 소설가 에밀 졸라와는 오랜 친구 사이였지만, 졸라가 발표한 소설 『작품』 속에 예술에 집착하다 몰락하는 화가의 모습을 세잔이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관계는 멀어졌고 결국 절교에 이른다. 세잔은 “그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느꼈던 듯하다. 그를 직접 만난 화가들과 비평가들 역시, 세잔을 몹시 내성적이고 의심이 많으며, 타인과 어울리기 어려운 인물로 묘사한다. 그는 사람 많은 전시회도 꺼려했고, 오직 자신의 작업에만 몰두하길 원했다.

그런 세잔 곁에는 말년까지 조용히 자리를 지킨 인물이 있었다. 바로 카라팡크(Carapence)다. 그는 세잔이 생빅투아르 산 근처 작업실로 이동할 때마다 짐을 나르던 조수이자 운전수였다. 세잔은 그와 3프랑 운임을 두고 언쟁을 벌이다가 화를 내며 해고했다가도 며칠 뒤면 다시 불렀다. 대개 이런 다툼을 반복하는 사람 곁에는 주변 인물이 사라지기 마련인데, 카라팡크는 다시 돌아와 조용히 일을 이어갔다. 이 반복적인 갈등과 화해는 세잔 특유의 신경질적이지만 예술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세잔이 말년에 마지막으로 그린 수채화는, 생소뵈르 지역 작업실 테라스에서 바라본 정원 풍경이다. 그림에는 낮은 돌담과 레몬나무, 생트 빅투아르 산의 실루엣이 조용히 담겨 있다. 그는 이 장면을 매일 바라보며 수채화로 옮겼고, 어느 날 작업 중 갑작스러운 뇌우를 맞고 돌아온 뒤 병이 악화되어 일주일 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세잔의 이 마지막 그림을 두고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다”고 말한다. 평생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해온 세잔이, 마침내 말없이 답을 남긴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수채화는 이전보다 훨씬 단순하고 투명했고, 그 안에는 어떤 계산도 없이 그저 바라보는 마음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남기기 위해 그렸던 것이 아니라, 끝까지 보고자 했던 시선이 담긴 그림이었다.

책은 이후에 17세기 고전주의 화가 니콜라 푸생과 클로드 로랭의 말년 작품들로 이어진다. 푸생은 죽음과 운명을 주제로 삼았고, 로랭은 빛으로 시간의 흐름을 그렸다. 두 화가는 로마 근교에 살며 이따금 만나 프랑스어로 대화를 나눴지만, 서로의 말을 꼭 듣는 것은 아니었다. 로랭이 천체에 대해 말하면 푸생은 반응하지 않고, 푸생이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면 로랭은 하늘만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의 ‘엇갈린 대화’는 서로를 무시한 것이 아니다. 같은 풍경을 보아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이해하고 또 공유한 것이다. 저자는 이들의 말년을 ‘사유의 결정체’로 읽는다. 회화적 기교를 넘어, 삶의 본질에 다가서는 시도였다.

책의 후반부로 가면,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등장한다. 그는 말년에 청력을 잃고 정치적 박해를 피해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벨기에 브뤼셀을 거쳐 프랑스 보르도로 이주한 그는 더 이상 궁정화가도, 국가적 인물도 아니었다. 완전히 유배자였고, 인간으로서의 고야만 남았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남긴 드로잉과 판화는 오히려 더욱 자유롭고 내밀하다. 고야의 그림에는 공포도, 분노도, 희망도 없이 인간 존재의 민낯만이 남는다. 그의 말년은 후기 양식을 사회적·정치적 맥락으로까지 확장해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불멸의 사유』의 가장 큰 미덕은, 미술사를 단순히 연표나 양식의 흐름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책은 화가들의 삶과 역사, 사회, 그리고 정서적 풍경을 교차시키며 예술가의 마지막 시선을 독자에게 건넨다. 후기 양식은 단지 늙은 화가의 마지막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에서 가장 깊은 사유에 도달한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투명한 언어이며, 때론 말 없는 직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조용한 목소리가, 우리에게 가장 오래 남는 울림이 된다.

우리는 누구나 결국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간다. 하지만 그 끝에서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지는, 오직 평생을 응시해 온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불멸의 사유』는 그런 예술가들의 마지막 시선이 담긴 책이다.

죽음 가까이에서 피어난 수채화, 침묵 속에서 남긴 드로잉, 서로 다른 철학이 부딪친 엇갈린 대화들.

이 책은 그런 마지막 이야기들을 모아,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피에르 보나르, 티치아노 베첼리오, 미켈란젤로, 램프란트 판 레인, 프란스 할스,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로랭, 디에고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조르조 모란디, 장 시메옹 샤르댕, 오노레 도미에, 조르주 루오, 섕 수틴—삶의 끝에서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화가들의 이야기도 함께 담겨 있다.

어떤 이들은 죽은 아내를 그리며 욕실을 그렸고, 어떤 이들은 빛을 따라 흐르는 시간을 좇았으며, 어떤 이들은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연필 하나로 인간 군상을 붙들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늙어갔고, 조용한 언어로 삶의 마지막을 기록했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사람in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회화는 그 자체로 창조와 관념의 영역으로 올라서지 못하고
한낱 필멸하는 인간과 물질의 자기 표상을 위한 지저분하고 지난한 작업이 될 것인가?
아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회화는 시와 함께 불멸의 사유 속에 존재하며 환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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