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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소포스의 책 읽기 - 철학의 숲에서 만난 사유들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5년 5월
평점 :

플로티노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숲에서 만나는 이들은 다 사유의 친구다. 친구들이 해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궁금해 못 견딜 것 같으면 잠시 조심스레 물어본다. 거기서 들은 이야기를 서둘러 기록한 것들의 모음, (그것은 곧, 책이다.) 이것도 작은 사유의 숲일지 모른다. 숲은 숲을 키운다. 숲은 잠들지 않는다.”
- p11, 프롤로그 내용 중
프롤로그 마지막 글이다. 이 문장이 왜 이렇게 웅장하고 뭉클하게 다가오는지.. 괜히 울컥하는 마음.
한 권의 책은 작은 사유의 숲일지 모르지만, 그 책들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거대한 숲이 된다. 그리고 그 숲은 살아 있는 사유로서 결코 잠들지 않는다. 어쩌면 누군가는 하찮게 여길지도 모를 나의 독서 여정이, 언젠가 그렇게 살아 있는 숲을 이루게 되기를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책을 읽는다는 건 세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일이자, 낯선 질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을 키우는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삶을 잠시 빌려 살아보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고명섭의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책을 읽는 일이 그저 지식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사유의 여정임을 일러준다. 이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오래된 질문을 독서라는 길 위에서 다시 마주하게 한다. 고전은 물론, 영화와 문학, 신화, 생명과학까지 넘나들며, 책 속 문장 하나하나가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창이 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문득 어느 한 구절이 오래 품어온 마음의 결을 건드리는 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책의 인상적인 도입부는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반복’이라는 주제를 풀어낸다.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과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 두 영화는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을 공유하지만, 하나는 어둠의 되풀이, 다른 하나는 빛의 되풀이를 그린다. 《토리노의 말》은 절망의 반복 속에 갇힌 삶을, 《퍼펙트 데이즈》는 미세한 차이를 품은 반복 속의 조용한 희망을 보여준다. 이 대비는 곧 독서의 구조로 연결된다. 동일한 책을 반복해 읽는 행위 속에서 우리는 삶의 다른 국면과 만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어 등장하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귀향’이라는 개념을 통해 독서의 본질을 비춘다. 오디세우스가 진짜로 돌아온 증거는 침대다. 살아 있는 올리브나무를 기둥 삼아 만든 침대. 반복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실의 자리. 이 장면은 수없이 반복해 읽는 책 속에서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귀향하는 독서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이졸데 카림의 『나르시시즘의 고통』을 인용한 장이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현대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고립시키고 있는가를 되짚는다. 카림은 신자유주의 사회가 개인에게 끝없는 ‘자기 이상’을 추구하도록 요구하며, 그 과정에서 자발적 복종이라는 형태의 고통이 발생한다고 진단한다. 자유롭고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스스로를 ‘자기 경영’의 대상으로 삼아 끊임없이 성취를 강요받는 주체. 그것이 오늘날의 나르시시즘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자아 이상’은, 초자아처럼 외부의 금지 명령이 아닌 ‘무엇이든 해내라’는 내면의 명령이다. 이를 수행하지 못하면 열등감과 수치심에 시달리게 된다. 이 사유는 젠더 정체성의 자기 결정 문제로도 이어진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성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를 스스로 정의한다는 것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사회가 요구하는 ‘개성의 극대화’를 충족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카림은 이 현상이 지배적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결국 “나는 나다”라는 자기 이상은 우리를 고립으로 이끈다. 진정한 관계도, 교류도 없는 채, “깊디깊은 내적 고독” 속에 남겨진 개인들. 그 고통은 나르시시즘 사회의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이러한 사유들을 독서라는 행위 안에서 하나로 모은다. 책 읽기는 단지 문장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일이며 삶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이 책은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넘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다.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누구를 위한 삶인가?
나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어떤 사유가 나를 붙잡고 흔들고 있는가?
철학책을 좋아하는 사람, 깊이 있는 사유를 즐기는 사람, 좋은 문장을 곱씹으며 오래 생각하고 싶은 사람, 책을 통해 삶의 방향을 다시 묻고 싶은 사람, 그리고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필로소포스의 책 읽기』는 반드시 만나야 할 책이다.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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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서평단 @woojoos_story 모집',
'교양인 출판사' 도서 지원으로 우주서평단에서 함께 읽었습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이졸데 차림(Isolde Charim)은 『나와 타자들』이라는 저서로 국내에도 이름을 알린 오스트리아의 여성 철학자다. 철학 저술과 언론 활동을 병행하는 차림은 오스트리아의 극우화에 맞서 정치적 저항 운동을 벌이는 실천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나르시시즘의 고통>(2022)은 우리 시대의 현실을 분석하는 카림의 철학적 사유가 번득이는 저작이다. 이 책에서 카림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계가 개인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통해 작동함을 밝혀 보인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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