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조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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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인간이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나의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불멸의 유전자』를 읽고 나니 그 믿음에 균열이 생긴다. 생명은 유전자의 생존 전략이라는 시각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도 사실은 그 전략을 수행하기 위한 임시적인 생존 기계라는 설명은 낯설고, 때로는 불편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진화에 대한 가장 생생하고 근본적인 질문들을 만나게 된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이미 유전자의 주체성을 강조한 바 있다. 『불멸의 유전자』는 그 논리를 더 넓고 깊게 확장한 책이다. 특히 ‘표현형 확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유전자의 영향력이 단순히 생물의 몸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가 만든 둥지, 비버가 만든 댐, 심지어 인간이 만든 예술작품이나 문화까지도 유전자가 환경과 상호작용한 결과물일 수 있다는 시각은 경이롭다. 생명은 더 이상 개별 개체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유전자와 환경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개념은 ‘사자의 유전서(The Genetic Book of the Dead)’였다. 하나의 동물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는 단지 그 개체의 정보가 아니라 그 조상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남았는지를 기록한 기술서라는 것이다. 그 유전체는 마치 겹겹이 쓴 양피지처럼 과거의 환경, 생존 전략, 생물학적 선택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자벌레가 고목을 흉내 내는 능력, 뻐꾸기 새끼가 둥지 안에서 울새에게 먹이를 받아먹는 장면 모두가 그 유전서에 기록된 조상 세계의 설계도인 셈이다.

저자는 여기서 가상의 미래 과학자 ‘SOFT(Scientist Of the Future)’를 종종 언급한다. 이 미래 과학자는 과거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 현재 유전체를 분석한다. 각 생물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는 과거 생존에 적합했던 전략들의 기록이며 이는 현재 환경과 연결된 단서가 된다. 지금 눈앞에 있는 동물의 형질 하나하나가 조상 시대의 생존 해법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자연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이 책의 강점은 개념만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진과 그림, 도식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어, 복잡한 이론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예를 들어 뻐꾸기 새끼가 둥지 안에서 다른 종의 어미 새에게 먹이를 받는 장면은, 이타성과 기생, 본능과 진화가 교차하는 강력한 시각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사례들은 머리로만 이해하던 유전자 이론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도킨스는 이 책에서 수렴 진화(convergent evolution) 개념도 강조한다. 서로 전혀 다른 계통의 생물이지만 비슷한 환경에 놓일 경우 유사한 생존 전략을 택하게 된다는 것. 조류의 다양한 부리 형태는 모두 환경에 맞춰 진화한 결과이며, 유전자의 세계가 얼마나 유연하고 적응적인지를 보여준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신경과 혈관, 인대와 뼈의 배치는 단순한 ‘디자인의 결과’가 아니라, 수천만 년의 발생 과정을 통해 형성된 생명의 지도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더 나아가 ‘학습’조차 유전자 수준에서 선택될 수 있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유전자는 뇌가 어떤 것을 더 쉽게 학습하게 만들지, 어떤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들지를 미리 준비시킬 수 있다. 즉, 생물의 학습 능력조차 진화의 일부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사고하고 선택한다고 믿지만, 어쩌면 그 자유조차 유전자라는 구조물 위에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로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당신은 득실거리고 뒤섞이며 시간여행을 하는 바이러스들이 빚어낸 위대한 협력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이 책 전체를 압축적으로 설명해주는 구절이라 생각한다. 유전자는 협력하며 복제되고 그 과정에서 생명은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찾아간다.

『불멸의 유전자』는 읽기 쉬운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읽기 쉬운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장 한 장 곱씹으며 읽다 보면 그 보상은 생각보다 훨씬 크게 다가온다. 생명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나를 둘러싼 자연과 인간, 문명까지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은 그냥 과학책이 아니라, 유전자의 언어로 쓰인 철학이고 생명의 역사이며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이기적 유전자』와 함께 읽는다면, 우리는 이 복잡한 생명의 체계를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수억 년의 생존 전략 위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 유전자의 세계는 경외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이 책을 추천한다면 과학을 좋아하고 자연과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용이 다소 어려울지라도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책인 것 같다.

'을유문화사'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사자의 유전성는 조상이 살던 세계들에 관한 메시지를 동물의 몸과 유전체에 숨긴 팰림프세스트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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