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되는 순간들 - 이제야 산문집
이제야 지음 / 샘터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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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되는 순간들’ 이 책은 첫 장을 읽을 때부터 저릿한 감이 왔다.

이건 나의 평생 소장용 시집이 될 것 같다란 감이 들었다.

지난 1년 동안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었다. 익숙한 분야는 물론, 그동안 멀리했던 장르들까지 일부러 손을 뻗었다. 그중에서도 시집은 나에게 유독 어려운 분야였다. 시를 읽는 일이 종종 추상적인 언어를 헤매는 일이었고, 때로는 “이게 무슨 말이지?”라는 질문만 남긴 채 덮어야 했다. 그 난해함이 나와 시집 사이의 거리감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정보가 넘쳐나고 AI가 문장을 대신 쓰는 시대에, 오히려 시집이야말로 인간만의 느림과 사유를 회복할 수 있는 통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른 속도에 끌려 다니고 있는 듯한 내 모습에 지쳐 있을 때쯤, 이 책 『시가 되는 순간들』을 만났다.

첫 장을 시작하자마자 나의 눈길을 끄는 문장을 만났다.

“사랑을 알아버리기 전에 사랑을 외우기도 한다…‘라고 시작하는 문장이었다. 이 문장을 무심히 넘겼다면 몰랐겠지만, 가만히 곱씹다 보니 어느새 잊고 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어린 날의 감정, 누군가를 무작정 좋아했던 기억, 그 시절의 나를 마주보는 듯한 경험을 느꼈다. 짧은 문장 속에서 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어서 펼쳐진 ‘언어가 되기 전의 사랑’이라는 글은 앞선 문장의 파동을 구체화하는 글이었다. 글 속에는 엄마와 두 아이가 함께한 브런치 카페의 장면이 담겨 있었는데 그 풍경 속에서 시인은 언어 이전의 사랑, 본능처럼 흘러나오는 감정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사랑이란 감정은 때로 설명보다 앞서 오고, 말보다 몸짓에 먼저 스민다. 그러한 사랑을 시인은 ‘언어가 되기 전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 문장이 공감되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던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사랑을 흉내 내는 모습에서 시인은 본질을 길어 올린다. 사랑을 알기도 전에 아이는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

시인은 “시는 사랑을 몰랐던 때로 돌아가 모든 사랑을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를 쓰는 순간 기존의 믿음은 완전히 깨집니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어온 사랑, 익숙하다고 여겼던 감정들이 실은 얼마나 낯선 것인지 깨닫게 된다. 시를 읽는다는 건 그런 낯설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단단한 믿음을 흔드는 것에서부터 시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잊고 있었던 말들이 떠오른다. “그리하여 시를 쓰는 일은 우리가 알고 있던 단어를 지워가며 사랑의 애초를 소중히 하는 것. 사랑을 하며 잊어갔던, 어쩌면 영영 기억하지 못했을 단어들을 모으는 일인지도요.” 이 문장은 이 시집이 품고 있는 감정의 핵심이다.

『시가 되는 순간들』은 시를 말하는 책이지만 동시에 기억의 복원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는 기억하고 싶은 것보다 기억되는 것을 쓰는 일. 기억되는 것들은 꽤 자주 살아나서 묵은 미안함이 용서되기도, 반복되는 슬픔에 익숙해지기도 한다.’ 이 구절에서 나는 시의 쓸모를 다시 생각했다. 시는 치유이고 회복이며, 말하지 못했던 마음을 조심스레 다듬는 작업이다. 시를 읽는다는 건 꼭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기 위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아름답지 않았던 것들이 아름다워질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이다.

이 책은 시를 어려워했던 나에게 시를 이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를 느끼는 방식을 알려주었다. 무언가를 온전히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냥 마음에 닿는 문장을 따라가도 된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래서 이 시집은 나에게 단순한 시집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내 감정과 마주하고, 묻어두었던 마음을 끄집어내게 해준 책이다. 삶이 너무 빠르고 복잡해서 나를 놓치며 살고 있던 때에 이 책은 조용히 손을 잡아준다. 더딘 이해가 오히려 깊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려준다.

『시가 되는 순간들』은 시와 거리 두던 마음에 조용히 스며드는 첫마디 같은 책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시가 왜 필요한지를 질문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따뜻한 대답이 된다.

읽는 내내 많은 부분에서 마음이 움직였다.

이제는 나도 시를, 그 조용한 언어를 다시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나는 이 시집을 평생 곁에 둘 책이라 부르기로 한다.


'까치글방 서포터즈 3기' 활동을 통해 '까치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사랑을 알아버리기 전에 사랑을 외우기도 한다. 마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사랑의 시절을 기억하라는 듯이. 시를 쓰는 일은 우리가 알고 있던 단어를 지워가며 단어의 애초를 아끼는 것. 어쩌면 영영 모를 수 있었던 단어들을.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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