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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번째 레인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5월
평점 :

카롤리네 발의 『스물두 번째 레인』은 물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조용히 건져 올리는 소설이다. 사랑과 책임, 상처와 용서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자, 자매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버텨낸 두 사람의 이야기다.
주인공 틸다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영장을 찾는다. 스물두 번째 레인을 따라 묵묵히 물살을 가르며 하루를 견딘다. 어쩌면 수영은 그녀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중심에는 세 여성이 있다. 언니 틸다, 동생 이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다. 엄마는 상처 입은 사람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보다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방식에 더 익숙한 사람. 자식들과 가까워지고 싶어 하면서도 어느 순간엔 그것을 스스로 망쳐버린다. 다시 잘해보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 의욕은 금세 무너지고 만다. 아마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이라는 병이 그녀를 다시 끌어당긴다.
틸다는 그런 엄마를 향해 분노하면서도, 완전히 미워하지는 못한다. 연민과 혐오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그녀 안에 겹겹이 쌓여 있다. 동생 이다가 엄마에게 맞은 뒤의 모습을 보았을 때, 틸다 안의 분노는 한계에 다다른다. 결국 그녀는 차가운 얼음물 양동이를 엄마의 머리 위에 쏟는다. 책에서 엄마를 ‘괴물’이라 칭하는 장면은 감정의 극한을 드러내는 말이자 틸다의 절박한 외침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엄마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수긍한다. 그 말 속에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다는 자각이 들어 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채 무너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분노보다도 깊은 연민이 차오른다. 그저 미워할 수만은 없는 불쌍한 어른의 초상이 거기 있다.
이다는 나이에 비해 많은 것을 느끼고 이해하는 아이이다. 눈치가 빠르고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읽어낸다. 언니 틸다가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가장 먼저 알아채고, 조심스레 그 감정을 건드리기도 한다. 마치 언니를 살짝 밀어주는 것처럼. 그런 이다는 틸다에게 삶의 이유이자 중심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자매의 관계가 무척 부러웠다. 누군가를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지키고, 또 그 존재만으로 마음의 버팀목이 되는 관계가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단단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틸다는 타인과 감정적 거리를 두는 데 익숙하다.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람을 들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해왔다. 그런 그녀 앞에 빅토르가 나타난다. 처음엔 경계하며 거리를 두지만, 조금씩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다. 눈에 띄는 고백도, 화려한 감정 표현도 없다. 대신 아주 작고 조용한 변화들이 틸다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게 된다. 빅토르는 틸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그저 곁을 지켜주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틸다는 그런 그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스물두 번째 레인』은 단지 가족의 붕괴를 그리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도 사랑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 사랑은 조용히 손을 잡아주는 것, 다친 마음 앞에 오래 머물러주는 것, 함께 침묵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 감정들이 이 책에는 고요하게, 하지만 깊게 흐르고 있다.
책을 읽으며 틸다와 동생 이다의 관계가 내내 마음에 남았다. 자매의 사랑을 엿볼 수 있었고, 빅토르와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달라지는 틸다의 감정선도 따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혼란 속에서도 물속을 헤엄치듯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려 했던 틸다의 모습은, 대견하고 애틋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이 책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상처를 품고도 다시 나아가려는 모든 이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넨다.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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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다산책방(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나 :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데? 긴 침묵이 이어진다. 내 질문에 대답을 얻지 못하겠구나 생각하는데 그가 입을 뗀다. 빅토르 : "이런 외부인의 관점을 너희의 강점으로 인식하렴. 너희는 저 아래에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멋진 집이 없지만, 그럴수록 여기서 얻는 기회를 더 많이 이용하고 너희 자리를 찾아야 한다." 뭐 그런 종류의 말이었지.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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