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 세상의 모든 딸, 엄마, 여자를 위한 자기 회복 심리학
박우란 지음 / 향기책방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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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만난 문장은 “감정적 밀착이 꼭 좋은 소통은 아니다”였다.

그 문장 앞에서 잠깐 멈췄다. 엄마와 딸이 정서적으로 밀착된 관계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모녀 관계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프롤로그는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감정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딸은 엄마의 감정을 자기 감정처럼 떠안게 되고, 결국 자신을 잃은 채 살아가게 된다.


책의 1장을 펼치자마자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다.

“사랑은 아들에게, 요구는 딸에게.”

이 짧은 소제목을 보는 순간, 마음속 깊은 데서 묘하게 화가 치밀었다. 왜였을까. 생각해보면 늘 사랑은 남동생의 몫이었다. 자식들을 먹여 살린다고 부모님은 늘 바빴고, 온 가족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사랑은 언제나 아들에게 먼저 향했다. 나는 늘 양보하며 조용히 살아야 했다. 딸인 나보다 아들이 먼저였던 수많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이 문장을 보자 그동안 외면했던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나도, 사랑받고 싶었던 거 아닐까?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는 딸로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감정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저자 박우란은 정신분석과 상담 경험을 바탕으로, 엄마와 딸이 어떻게 서로의 감정을 뒤섞고, 때로는 얽히며 상처받는지를 진단한다. 특히 엄마가 딸을 ‘자신의 연장선’처럼 느끼게 되는 심리를 파고들며, 왜 딸만 유독 더 많은 요구를 받고 더 쉽게 감정의 수용자가 되는지를 이야기한다.


딸은 엄마가 울면 함께 울고, 엄마가 지치면 본능적으로 위로하려 든다. 아이의 감정이 형성되기도 전에, 엄마의 감정을 먼저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 엄마 눈치를 많이 봤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집은 딸 셋, 막내 아들이 있는 집이라 항상 분주했고, 엄마는 늘 바빴다. 아빠는 매일 술에 취해 가족들에게 함부로 대했고, 그런 상황을 참고 견뎌낸 엄마가 언제나 안쓰러웠다. 어린 나도 엄마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 내가 먼저 참는 것이 엄마를 도와주는 길이라 믿었고,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책은 이러한 ‘무의식의 전이’가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다양한 사례와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딸이 엄마의 감정 상태에 맞춰 자기 감정을 억누르며 자라면, 결국 자아가 성장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자신의 감정을 구별하지 못한 채, 늘 타인의 감정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자기 감정에는 둔감하면서도 남의 감정에는 과하게 민감한 사람이 되기 쉽다.


더 깊은 통찰은 몸과 감정의 연결에서 드러난다. 억눌린 감정은 결국 몸으로 드러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말처럼, 말로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몸을 공격한다. 책은 몸이 보내는 신호를 감정의 ‘언어’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도 이유 없이 지치고 아팠던 날들이 떠올랐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괜찮아”를 반복했던 시절, 그 무언의 짐이 결국 내 몸 어딘가에 스며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책 말미에는 엄마가 자식을 자신에게 묶어두려는 무의식적인 욕망도 다뤄진다. 딸에게 “너 말고 누가 있니?”, “너 하나 있어서 산다”는 말을 하며 감정의 줄을 조여오는 엄마들. 겉으로 보기엔 사랑처럼 들리지만, 실은 딸을 정서적으로 붙잡아두는 말이다. 우리 집은 자녀가 셋이고 난 셋째였기 때문이었을까. 엄마에게 그런 말을 자주 듣진 않았지만, 언젠가 한번 엄마는 “너희들 때문에 산다”는 말을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히 책임감을 느꼈다. 특히 폭력적인 상황이 생기면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독립해야 할 시기에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쉽게 집을 떠나지 못했다. 엄마를 두고 가면 안 된다고, 내가 엄마 곁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뿐만 아니라 언니들도 마찬가지로.


책을 읽다 마주한 “엄마를 잃어야 내가 산다”는 문장은 처음엔 조금 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이건 단절이 아니라 ‘감정의 분리’라는 걸 알게 됐다. 더 이상 엄마의 감정에 갇히지 않고, 내 감정에 집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 어릴 적 엄마의 슬픔을 내가 대신 감당해야 한다고 믿었던 나에게, 이 문장은 해방처럼 다가왔다.


이 책은 엄마가 된 사람에게도, 아직 딸로만 살아본 사람에게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지금 누구의 감정을 살고 있는가?”

육아와 관계, 결혼과 역할에 지쳐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조용히 손을 내민다.

누가 더 많이 희생했느냐보다, 서로가 얼마나 무력감과 외로움을 이해하려 했는가.

이 책은 그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자고 말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 아닐까.

엄마가, 딸이, 아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안간힘 쓴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은 따뜻하게 말해준다. 이제는 너 자신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정말,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유노북스 출판사'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유노북스출판사 인스타 @uknowbooks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엄마 자신도 모르는 욕망을 딸 아이가 쫓으려 하니 그야말로 답답하고 숨이 막힐 수밖에 없지요. 혼돈 그 자체입니다. 무언가 좇는데 뭘 좇고 있는지를 모른 채, 계속 쫓아서 잘 되어야 한다고 요구만 받고 있는 상황인 것이지요.
엄마가 자신의 욕망과 기준을 뚜렷이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엄마 본인도 스스로가 무엇을 좇고 있는지도 모를 그것을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이 문제라는 의미지요. 엄마가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가 좇아야 하는데, 본인도 정확히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모른 채 그것을 아이가 성취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아이를 심리적으로 위험하게 할 수 있습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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