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예술가들 - 창작은 삶의 격랑에 맞서는 가장 우아한 방법이다
마이클 페피엇 지음, 정미나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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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눈으로만 감상해야 할까?


우리는 보통 미술관에 걸린 작품을 감상할 때 조용히 거리를 두고 서서, 시선을 머문 채 천천히 바라보곤 한다. 그것이 예의를 지키는 방법이고, 미술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는 방식이라 믿는다. 그러나 마이클 페피엇의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을 읽고 나면, 예술에 대한 그런 관념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 책은 단순히 미술 작품을 해설하거나 예술가를 찬양하는 비평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림 뒤편, 프레임 밖에서 흘러나오는 숨소리와 헛기침, 때로는 술에 취한 농담과 날카로운 침묵까지 기록해낸, 지극히 인간적인 예술가들에 대한 기억의 궤적이다.


이 책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초상화인 동시에, 저자 마이클 페피엇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는 루치안 프로이트, 프랜시스 베이컨, 장 미로,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수많은 거장들과 직접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술을 마시며 예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그 만남의 기록은 단순한 인터뷰나 해설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 고백처럼 읽힌다. 예술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곧 자신을 돌아보는 시선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쌓인 시간의 층위들은 이 책을 하나의 자전적 미술 에세이로 변모시킨다.


예술가들의 존재는 책 속에서 신전처럼 등장한다. 저자는 그들을 경외하고, 그들의 작업 앞에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그 신전은 영구불변의 공간이 아니다. 어떤 예술가는 시간이 흐르며 기억에서 멀어지고, 또 어떤 이는 과거의 편견을 뒤엎고 다시금 감동을 선사한다. 감상은 언제나 유동적이며, 평가의 균형은 늘 흔들린다. 이 책은 바로 그 불확실성과 감상의 다층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드문 비평서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점은, 이 책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이 모두 ‘살아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페피엇이 만난 이들은 미술관 벽에 걸린 완성된 이름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고 방황하며, 때로는 무너지는 사람들이다. 작품이라는 껍질 속에 갇힌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술에 취해 뒷담화를 늘어놓고, 사랑 앞에서 무너지고, 작업의 실패 앞에서 괴로워하는 예술가로서, 즉 한 인간으로서의 면모가 그대로 드러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가 베이컨과의 만남을 통해 받았던 충격은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섰다. 그는 베이컨이라는 인간이 지닌 극단적인 감정의 진폭, 예술과 고통, 사랑과 죽음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방식에 깊이 감화되었고, 그 이후로 예술가의 작품뿐 아니라 삶까지 수용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베이컨은 이 책에서 모순된 존재로 그려진다. 유머러스하고 냉소적인 동시에, 상처 입고 고통스러워하며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 사랑하는 이를 잃고 절망했으며, 작업에 몰두하면서도 삶의 허무를 노래했던 베이컨은, ‘위대한 화가’이기 이전에 ‘강렬하게 살아낸 사람’이었다. 저자는 베이컨의 삶이 그의 예술을 만들어냈다고 믿으며, 그의 작품 너머에 숨어 있는 삶의 진실을 더듬는다.


이처럼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은 일종의 회고록적 미술 비평서다. 마이클 페피엇은 예술의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는 완성된 그림보다 작업실에서 흘린 땀과 담배 연기를, 그리고 작업 앞에서 주저하는 예술가의 망설임을 더 깊이 들여다본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예술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삶의 정수이자 고통의 기록, 때로는 생존의 흔적으로 다가온다.


결국 이 책은 지식으로 배우는 예술사가 아니라, 감정으로 읽히는 공감의 기록이다. 작품의 해설보다 삶의 이야기들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말없이 말한다. “예술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감지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은 해설보다 기억이고, 비평보다 고백이며, 감상보다 체험에 가까운 책이다.


페피엇은 예술가들의 삶을 사랑했고, 그 사랑은 그들의 작업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한 시대의 예술을 관통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인간을 이해하고 자신을 비추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예술 감상의 가장 솔직한 시작점이 아닐까.



'디자인하우스 북'을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인스타 #하놀 @hagonolza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라파엘처럼 그림을 그리는 데는 4년이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림을 그리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
- 파블로 피카소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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