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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노트 - 식물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신혜우 지음 / 김영사 / 2021년 4월
평점 :
시험
기간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자의식이 강해짐을 느낀다. 밤을 새자고 다짐 해놓고 단 잠을 잔 어제의 나에 대해, 밥만 먹고 과제하자고 다짐해놓고
과식 후 또 잠에 든 나에 대해, 그렇게 자고 일어나 잠깐 워밍업 한다고 노트북으로 넷플릭스를 2시간 동안 시청한 나에 대해, 주로 최악인
나에 대해 생각한다. 이럴 때 나는 자신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고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다시 시간을 낭비한다. 결국 자신감이 떨어지고 나는 왜 이
모양으로 태어났을까 외치고 싶을 때쯤 우울이 찾아온다. 이런 경험, 나만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싶다.
자신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우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 자신을 잊는 일이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시작한 과제, 서평 쓰기, 아르바이트
출근, 강의 듣기 등에 집중을 하다보면 나는 지리멸렬한 나의 내부로부터 벗어나 명료한 목표의 세계로 진입한다. 내가 아닌 다른 대상에 나의
정신을 분배한다. 나의 머리 속은 곧 자신에 대한 평가가 아닌 외부의 것들로 채워진다. 비로소 스스로에 대한 품평에서 벗어나 마음은 치유된다.
자신에 대한 난도질을 멈추는 지혈의 순간을 제공하는 '외부 지향의 시간'은 어쩌면 자의식 과잉 인간들에게는 최고의 위로가 되어준다.
이
책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다. 마감일이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마감일에 분주해진 마음으로 자의식을
몰아내고 읽기 시작한 책은 바로 <식물학자의 노트>. 책장을 열자 다정한 설명이 곁들여진 섬세한 식물 그림들이 펼쳐졌다.
<식물학자의 노트>는 다양한 식물들의 종류, 특성, 생존 방식 등을 알려주며 식물들이 다양한 환경에서 생존해 나가기 위한 지혜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다. 우화처럼 동물을 통해 인간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식물들이 주체가 되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을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과 함께 제시할 뿐이다. 과연 '식물학자의 노트' 답다. 어느새 나는 비루한 자신을
잊고 식물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식물학자의
노트>는 식물학자 신혜우가 '세리시이오'에서 '식물학자의 노트' 라는 이름으로 연재한 글들을 묶어 내놓은 책으로 5개의 장, 31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왕립원예협회의 보태니컬 아트 국제전시회에서 2013, 2014, 2018년에 참여하여 모두 금메달은 수상한
신혜우 연구자는 식물학자이자 식물화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신혜우의 그림은 단순한 미적 용도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논문에 쓰일 식물화를
그려지기 때문에 <식물학자의 노트> 의 식물화 또한 식물의 전 생애를 보여주는 정확하고도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식물에
대한 자세하면서도 어렵지 않은 설명과 함께 첨부된 그림 덕에 식물을 상상하는 데 부족함을 느낄 틈이 없다. 식물들이 씨를 퍼뜨리는 방법, 수분
매개자와 식물이 서로의 이로움을 위해 공진화를 하는 순간, 꽃이 피고 지는 시간에 맞춰 만들어진 린네의 꽃시계 등 식물에 관한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부담없이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다. 전문적 지식을 담고 있기 때문에 자칫 어려울 수 있는 내용임에도 술술 읽히는 것 또한
<식물학자의 노트>의 장점이다. 하지만 마냥 가볍기만한 책은 아니다. 학창시절 배웠던 식물들을 떠올리며 읽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지식이 책의 주를 이루지만 식물들이 주체가 되어 삶을 꾸려나가는 과정의 가치가 진중함이 되어 책에 산뜻한 균형감을 선사한다.
모든
장에는 인간의 눈에 전혀 미동도 없어 보이는 차분한 식물들의 그림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하지만 그 그림과 나란히 놓인글에는 식물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보내는 치열하고 창의적이 분투의 순간들이 담겨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는 식물을 주체로 내세워 우아하고 고요해 보이는
그들이 얼만큼 치밀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 하는지를 보여준다. 자의식의 늪에서 괴로워하고 있던 나는 잠시 나를 주인공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뒤
관객의 입장이 되어 식물들의 삶을 감상할 수 있었다. 수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나무를 지켜주는 나무의 수피를, 번식을 위해 씨앗을 7m까지
날려보낼 수 있는 루엘리어 실리어터프로러를, 낙엽이 떨어져 나간 자리인 엽흔 위에 형성되는 겨울눈에서 미리 봄을 준비하는 꽃잎과 잎들을
바라보며 나는 식물들에 대한 작은 존경의 마음을 빚는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멋진 것들에 대한 작은 존경은 다시 빚어져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으로 모습을 바꾼다. 자의식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나는 어느새 위로를 받은 후이다. 지금보다 괜찮아질 수 있을거라는 용기는 꼭 그렇게
되고 싶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므로. 살아내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에 식물들의 삶은 부족함이 없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진다.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마음은 분명 식물들이 내게 건네준 위로임이 틀림없다.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