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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 ㅣ 달달북다 1
김화진 지음 / 북다 / 2024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북다 출판사의 ‘달달북다’는 로맨스 장르를 기반으로 사랑과 함께 고민되는 키워드인 칙릿, 퀴어, 하이틴, 비일상을 컨셉으로 잡아 출간되는 단편 소설 시리즈이다. ‘달달북다’의 첫 번째 키워드는 ‘칙릿’과 ‘로맨스’의 결합이다. 칙릿 X로맨스 시리즈의 포문을 연 작품은 김화진 작가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다. 소설에는 ‘돈을 벌러 회사를 다니는 사람1’인 모림과 모림이 출근길에 들르는 떡집의 아르바이트생 ‘찬영’이 연애를 시작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소설에서 모림과 찬영의 관계만큼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모림의 일터에서의 고민이다. 동기들에 비해 승진이 늦고 상사와 동료들에게 조금 더 의욕을 가지라는 주문을 받는 주인공은 자신의 일을 버겁게 느낀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게 업무를 처리하고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지만 왜인지 자신이 회사라는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감각은 모림을 작아지게 만든다.
이런 모림에게 힘을 주는 것은 그가 최근에 읽는 소설 <팔뤼드>이다. <팔뤼드>는 앙드레 지드의 소설로 모림의 요약에 따르면 주인공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소설 ‘팔뤼드’를 쓰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이 쓰는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티튀루스’인데, 모림은 <팔뤼드>의 주인공이 묘사하는 티튀루스의 내면 묘사를 좋아한다. 티튀루스는 우울하고 진지한 자신의 내면을 미워하지 않고 산책을 하며 찬찬히 들여다본다. <팔뤼드>의 주인공과 티튀루스의 공통점은 타인의 인정을 구하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깊이 몰입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소설 쓰기에 도취되어 있고 티튀루스는 남들이 재미없거나 우울하다고 지적할만한 자신의 내면을 섣불리 바꾸려 들지 않는다. 모림은 그렇게 자신만의 진짜를 찾아야 한다는 기분 좋은 초조함을 느낀다.
떡집 남자, 찬영은 모림에게 새롭게 찾아온 몰두할 대상이다. 모림의 마음 속에서 찬영의 별명은 자연스럽게 ‘티튀루스’가 된다. 티튀루스는 <팔뤼드>의 주인공의 주인공이며 오직 주인공 자신에게만 의미있는 존재이다. 찬영 역시 오직 모림에게만 흥미롭고 소중한 대상이기에 모림은 그를 티튀루스로 칭한다. 서른 한 살 직장인으로서 승진을 하고 건실한 사람과 결혼을 계획한 다른 누군가의 입장에서 찬영은 만날 만한 남자가 못 된다. 직업 불명, 나이 스물 여덟, 힙한 취미와 차림새. 하지만 모림이 바라는 삶은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궁금하고 함께 있어보고 싶은 사람, 혹은 대상과 함께하는 것이다. 팔뤼드의 주인공처럼, 티튀루스처럼.
‘칙릿’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내가 막연히 예상하고 기대했던 이야기는 아마도 이런 것이다. 직장에서의 치열한 경쟁과 성취, 독립적이고 화려한 도시의 삶, 불현듯 찾아오는 운명적인 로맨스 ‘사건’, 일과 사랑 사이에서의 갈등, 결국 그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거머쥐는 주인공 ···. 판타지 같은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이런 이야기들이 많았고 나는 그것을 즐겁게 소비해 왔다.
하지만 김화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에서 그려지는 일과 사랑은 그 온도 면에서 내가 보아왔던 서사와 사뭇 달랐다. 조금 미지근하달까. 모림은 일에 권태를 느끼고 호감을 느끼는 찬영과는 불꽃튀는 사랑을 나누기 보단 함께 저녁 산책을 하는 사이다. 이것이 김화진표 칙릿의 차별점이 아닐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화려하고 닿을 수 없는 듯한 모습의 일과 사랑이 아닌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그 삶의 일부로서 시작된 사랑.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는 사랑 역시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한 단면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며 한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을 조명한다.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공감은 아마도 사랑과 맞닿아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이 촘촘히 서술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모림과 찬영의 연애가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 아직 시작하는 단계의 찬영이 정말 좋은 남자일지 소설의 결말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찬영을 따라 달리는 모림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아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 소설은 그런 모림을 응원하고, 믿게 하고, 함께 따라 달리고 싶어지게 한다.
책의 끝부분엔 작가의 말 대신 김화진 작가의 작업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소설의 중요한 키워드인 회사, 연애, 소설로 카테고리를 나누어 글을 쓰는 과정에서 한 생각과 의도가 적혀 있었다. 소설을 읽으며 막연히 느꼈던 분위기와 주인공의 성격이나 상황이 작업 일기를 읽으며 한층 또렷해졌고 그냥 지나쳐 버릴 현실의 어떤 순간들도 작가의 시선을 통해 소설이 된다는 점은 위로가 되었다. (현실이 소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 깨닫든 신나는 일이다.) 무엇보다 소설에 등장한 주인공이 읽은 책 외에 김화진 작가가 최근에 읽은 책들을 소개받을 수 있어 좋았다. 그 책들을 내가 모두 찾아 읽을 확률은 희박하지만 김화진 작가가 그 책들에서 무엇을 포착하여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지 듣는 게 좋기 때문이다. 나는 김화진 작가가 읽은 책보다 김화진 작가의 독후감을 더 좋아하는데, 이것이 아마 작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아닐지 싶다. 유명하거나 흔한 내용도 김화진을 경유해 나오면 흥미로워지고 그가 느낀 것을 나도 같이 간직하고 싶어지는 것은 내가 이 작가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는 연애 소설이자 자신의 삶을 고민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연애 소설로 보아도 30대 초반 직장인 여성의 이야기로 보아도 무방하다. 김화진 작가의 작품 세계를 좋아하고 삶의 색깔을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공감과 응원을 안겨줄 소설이다.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현재를 고민하는 한편 즐기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의미 있는 소설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