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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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위협 앞에서 전의를 상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혹자는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맞서 싸워서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있다. 이를테면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자행한 홀로코스트가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나치에 의해 완전히 포위당했고, 맞서 싸울 어떤 무기도 가지지 못한채, 도망갈 기회도 가지지 못한채 그들의 왜곡된 사상에 의해 희생당했다. 여기 홀로코스트라는 커다란 재앙의 시발점이 된 1938년 수정의 밤 사건 이후 물질적, 정서적 기반을 잃어버리고 삶의 희망을 잃어가는 유대인의 며칠간을 그린 소설 여행자 가 있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나치를 피해 망명했던 유대인으로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어 당시 유대인들의 현실을 소설을 통해 기록했다.

여행자 는 유대인 오토 질버만이 1938년 일어난 수정의 밤사건 이후 나치에게 체포되는 것을 피해 기차를 타고 독일 전역을 여행하는 며칠간 삶을 지탱해줄 정서적, 물질적 기반을 잃고 자신의 삶을 포기해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오토 질버만은 수완있고, 긍지높은 사업가로서 안락한 삶을 영위해 온 사람이다. 수정의 밤 사건이 있은 직후 해외 망명 기회도 더는 없음을 깨달은 그는 달라진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유대인들이 오직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재산과 같은 것들을 버릴 때까지도 자신의 재산과 목숨을 모두 지킬 방법을 고민한다. 끈질기게 자신의 삶을 재건할 방법을 모색하는 질버만의 모습은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어쩌면 미련해 보일 정도로 집요하다.

하지만 질버만은 끝나지 않는 기차 여행의 과정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차츰 잃어간다. 소설 여행자』 에는 오토 질버만이라는 자신의 삶에 대해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던 유대인이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과정을 아주 세세하게 그리고 있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질버만의 입장이 되어 삶에 대한 전망이 낙관에서 비관으로 옮겨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정의 밤 사건이 일어난 직후 더 이상 외국으로 합법적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질버만은 끊임 없는 불안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의 불안의 성분은 차츰 변화해 나가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남은 재산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 암시로 불안을 잠재우고, 자신의 삶은 꽤 괜찮을 것이라고 안정시키는 노력을 하는 반면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누군가 자신을 죽여도 좋다는 인상을 풍기며 돌아다니고 자신의 불안과 우울에 대해서도 더 이상 반기를 들지 않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

1933년 나치당의 수장인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제국의 수장으로 취임한 뒤 시작된 반유대주의 정책, 그것이 본격화된 뉘른베르크 법,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전면화 된 수정의 밤 사건까지 독일 나치의 반유대주읠 인해 망명할 기회를 잃은 유대인들은 목숨의 위기에 직면한다. 이는 『여행자』에서 오토 질버만이 계속해서 기차를 타고 도망다녀야만 하는 이유이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던 질버만 조차도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고 무기력해져 가는 과정은 퇴로를 막아놓은 이렇나 시대적 상황 속에 놓인 인물이 밟는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츤느 그 자신도 2차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해외로 망명을 갔었던 유대인 도망자로서 『여행자』의 모든 감정의 단계를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독자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두려움과 싸우는 질버만으 내면과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강렬한 마음, 마침내 싸우는 것도 기대는 것도 불가능함을 알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빌버만의 여정에서 질버만과 함께 샅샅이 희망을 뒤진 후 결국 절망에 굴복하게 되는 질버만의 심리적 박해 현장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자』 가 더 큰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저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망명한 유대인이었다는 점이다. 『여행자』는 소설인 동시에 나치의 홀로코스트 위협을 실제로 경험했던 유대인의 기록물인 셈이다. 안전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신을 노리는 위험을 피해 끊임없이 떠돌아야만 했던 삶, 혹은 그마저도 할 수 없을 때 발생하는 정신적 붕괴를 그린 소설 『여행자』는 유대인에게 행해졌던 범죄 행위의 무게를 현대인으로 하여금 생생히 실감하게 한다.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의 『여행자』 는 오토 질버만이라는 건실한 유대인이 나치의 홀로코스트 위협 앞에서 사회적 지위를 잃고, 가족과 헤어지는 등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또한 작가 자신이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에서 망명한 유대인이었다는 점이 소설에 드러난 질버만의 심정에 사실성을 더한다. 인간의 왜곡된 사상이, 그 사상을 수단삼아 실현되는 인간의 그릇된 탐욕이 불러온 역사적 비극을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의 『여행자』 를 읽으며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 이 서평은 김영사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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